여성이 기록하고 여성을 기록하는 도서관 `여기`
여성이 기록하고 여성을 기록하는 도서관 「여기」
박한나 작가 / hanna_p@naver.com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전시된 강남역 살인 사건 기억ZONE ⓒ 박한나
2016년 5월 서초동 노래방 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불특정 여성을 살해했다. 피해자보다 먼저 화장실에 출입한 남자 6명은 그대로 돌려보낸 뒤였다. 여자라면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단 생각에 여성들은 사건 현장 근처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았다. 피해자를 추모하고 여성혐오 문제를 지적하는 포스트잇이 강남역 외벽을 둘러쌌다. 여성들은 우연히 살아남았다며 우연히 죽은 피해자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성평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이야기하는 복합 공간
이후 여성운동은 큰 변화를 겪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여성혐오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성평등을 공부해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지적하며 저항했다. 이로 인해 갈등도 일었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젠더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게 됐다.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이제 중요한 사회 이슈로 자리 잡았다. 단번에 큰 변화가 이뤄진 것은 모두가 외면할 때부터 묵묵히 활동해 온 여성운동가와 단체가 토대를 닦아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차별로 인한 문제를 찾아내고 연구하며 피해당한 여성을 돕고 이를 고치려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하지만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이들이 가진 경험과 연구가 흩어져서 체계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2층에 위치한 「여기」는 이들의 활동과 연구 자료를 모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평등정책 전문도서관이다. 여성단체와 NGO로부터 자료를 기증받고 서울시와 관련 기관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를 모아 2015년 7월 개관했다. 설립 취지에 맞게 「여기」라는 이름에는 ‘여성이 기록하고 여성을 기억하는 공간, 이곳(Here)’라는 뜻을 담았다. 현재는 성평등과 연관된 단행본은 구매해 소장하고 관련 단체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록물도 지속적으로 모아 여성운동의 역사를 축적해 나가는 중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포스트잇도 「여기」에서 기억존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계단 형태를 띈 서가의 모습 ⓒ 박한나
특색 있는 도서관답게 「여기」의 공간은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다. 일단 서가가 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성평등 역사 발전을 의미한다. 한 계단씩 발전해 온 성평등이 앞으로도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자료가 기증 단체 별로 배치된 것도 특징적이다.
특히 여성단체에서 기증받은 자료가 꽂힌 가운데 서가는 낮고 공간이 여유로워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도서관 설립 당시 의도한 것으로 기록물 보존과 전시,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이 가능한 라키비움(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복합 공간)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의 한쪽 벽면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여한 한국 여성미술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고,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포럼이나 세미나는 서가 사이에서 진행된다. 도서와 자료를 모아 여성운동의 어제를 기억하고, 포럼과 세미나를 열어 오늘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함으로써 모두가 평등한 내일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평등 도서관 여기 ⓒ 박한나
운동과 정책의 소통을 기록하는 도서관
최근 여성운동이 활발해졌지만 성평등 사회로까지 갈 길은 멀다. 「여기」의 조화순 사서는 “도서관에 오시는 분들이 하시는 대표적 질문이 ‘남자가 들어가도 되나요?’예요. 성평등이 여성을 위한 것이라고 오해하시기 때문이겠죠.”라고 말한다. 차별로 인해 억압받았던 여성 인권을 복원하려는 여성운동을 남성 인권을 해하거나 성대결로 보는 오해와 편견이 뿌리 깊은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에서는 시민들이 여성운동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서관 견학과 연계 수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3월부터 매달 주제를 정해 도서관 소장 자료를 전시하는 자료 컬렉션도 그 중 하나다. 7월에 열린 ‘처음 만나는 페미니즘’ 컬렉션은 큰 인기를 끌어 위치만 옮겨 현재까지도 전시되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할은 이름처럼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여기」가 속한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연계기관에서 필요한 정책을 수행하고 좋은 연구물을 생산하도록 도와 직접적인 사회 발전을 이루기 때문이다. “저희는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정책이 바뀌고 바뀐 정책이 다시 여성운동에 영향을 주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어요. 운동과 정책이 서로 소통하면서 선순환 할 때 성평등 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조 사서는 이야기한다.
현재 「여기」는 기록의 역할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기록물을 디지털화하면 대여나 이용이 어려웠던 기록물을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고 거리가 멀어 도서관에 오기 힘든 사람들도 자료를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카이브가 오픈되면 「여기」는 한국의 여성운동과 여성정책을 모두 포함한 여성사를 온오프라인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젠더라이브러리가 된다. 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돼 조 사서의 바람대로 “성평등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안식처”가 되고 여성운동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거나 무관심한 시민에게는 성평등의 의미와 필요성을 공감하도록 돕는 「여기」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