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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의 외주화, 수용소

국가폭력의 외주화, 수용소
강성호 역사학자 / justbookshop@hanmail.net

미셸 푸코는 인구에 대한 통치를 근대적 정치 메커니즘의 핵심으로 파악했습니다. 이를 생명 정치라고 명명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생명 정치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요소를 정치로 끌어들였습니다. 생명을 간접적으로 조절하고 통제하는 권력인 셈입니다. 예컨대, 가족계획사업, 낙태의 합법화, 위생 캠페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조르조 아감벤은 미셸 푸코의 논의를 바탕으로 권력에 내맡겨진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에 대한 사유를 선보였습니다. 성원권이 박탈된 존재. 그게 바로 벌거벗은 생명입니다.
수용소는 생명 정치의 장이었습니다. 수용소는 근본적으로 ‘추방령의 정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갇힌 이들은 국민에 포함되지 않지만, 공권력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야말로 누가 벌거벗은 생명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한센인과 부랑자를 통해 생명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추방’과 ‘강제 격리’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으로 살아야 했던 한센인과 부랑자. 이를 통해 국가폭력의 이면을 고찰하고자 합니다.


추방된 존재, 한센인

아마 한센인은 ‘벌거벗은 생명’의 명백한 사례일 겁니다. 한센인들은 전근대 시기 전염의 공포로 인해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나야 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소위 ‘문둥이’로 불린 이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유랑 걸식하는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이들은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근거 없는 소문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한센병을 완치할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미신요법들이 떠돌아다녔는데, 대개 어린이를 납치해서 인육을 먹는 존재로 그려졌습니다.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에 “나환자들이 아이들의 간을 빼먹고 암매장했다”는 제보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옛이야기로만 치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에는 근대 의학의 발전으로 한센병의 병원체가 발견되었습니다. 한센병이 접촉에 의해 전염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전염의 공포는 위생 담론과 결합하면서 이들을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점차 이들을 격리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1931년 「나 예방법」을 제정하여 한센인의 강제적 격리 수용을 합법화시켰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위생적 안전을 위해 한센인들을 추방하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때 과학으로 포장된 추방의 기술이 한센병을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록도 수용소의 역사는 한센인에 대한 공포가 변화하는 과정과 관련이 깊습니다. 현 국립소록도병원은 소록도자혜의원(1916), 소록도갱생원(1934), 중앙나요양소(1949), 갱생원(1951), 소록도갱생원(1957) 등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자혜’가 ‘갱생’으로 개칭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단지 치료를 받기 위해 수용된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정신적, 신체적, 사상적으로 검열을 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1934년에 소록도갱생원으로 바뀌면서 격리수용소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 후 획기적인 치료제인 DDS가 도입됨에 따라 한센병의 완치가 가능해졌습니다. 이제는 음성자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한센병 관리정책의 핵심으로 주목받았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한센인 정착촌 사업을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하기 시작했고, 전염병 예방법을 개정하여 한센병의 격리치료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1950년대까지 강제수용소에 격리되어왔던 한센인은 ‘특수지역’으로 분류된 농장으로 이주하여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인구로 관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적으로 자유를 얻은 건 아니었습니다. 보건소 및 국립나병원은 중앙 등록제를 개시하여 한센인 인구를 관리했습니다. 정착촌 사업의 경우 음성자만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거기가 정착촌은 제2의 소록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본적으로 국립소록도병원의 규율에 준해 운영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착촌의 규율을 거부하는 한센인은 선도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소록도로 강송 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요산 김정한이 1970년에 발표한 「인간단지」라는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한 우 노인과 치구는 한센병을 완치하여 국립수용소를 나와 박 원장이 운영하는 자유원에 정착하게 됩니다. 박 원장은 음성나환자를 수용한 자유원과 부랑자를 수용한 희망원을 경영하면서 회비, 구제 양곡, 치료제 등을 착복해온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자유원의 사람들은 우 노인을 새 원장으로 추대하고 박 원장의 비리를 폭로한 진정서를 경찰에 접수했습니다. 박 원장은 희망원 사람들을 동원해 자유원을 습격했습니다. 출동한 경찰은 박 원장을 체포하기는커녕 우 노인과 치구를 ‘나환자 데모’의 주동자로 체포하였고, 이들을 국립수용소로 강제로 보내버립니다.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이들은 자유원 사람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인간단지’를 만들기 위한 여정을 떠났습니다. 혹자는 이 작품이 한센인의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 자체에 의문을 던졌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 작품은 몇 가지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되었습니다. 「인간단지」에 등장하는 자유원은 부산 다대포 성화원을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곳 원장과 직원들은 오랫동안 성화원 사람들을 격리, 감금, 폭행했을 뿐만 아니라 강제노역도 시켰다고 합니다. 우 노인과 치구가 강송 당한 국립수용소는 국립용호병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곳은 원장이 3년에 걸쳐 부식비를 착복했으나 일부 환자들의 폭로에도 불구하고 원장의 측근들이 내부 고발자들을 소록도로 감금하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1963). 혹자는 이 작품이 박정희 정권의 한센병 관리정책이 어떤 모순을 야기했는지를 문학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인간단지」의 소재 중 하나였던 오마도 간척사업 사건(1962-64)은 국가에 의해 자행된 범죄였습니다. 5․16쿠테타 이후 소록도병원에 부임한 조창원 원장은 오마도 간척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한센인의 황무지 개척이나 간척지 개척은 자신들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소록도병원은 간척사업에 한센인들을 동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국가가 간척지를 빼앗았습니다. 공사 기간에는 쌀과 부식비가 착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임까지 유용되었습니다. 작품에서는 박 원장이 3만여 평의 매축지를 사유지로 삼았고 거기서 한센인들이 길러낸 곡식도 빼돌렸던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협잡꾼들을 위한 조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마도간척공사 사진 (사진 출처:  보건복지부 국립소록도병원 사이트)

수용소에 갇힌 부랑인들

5․16쿠테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사회 정화를 빌미로 부랑아 집단을 국가에 의해 갱생되어야 할 존재로 지목했습니다. 부랑아를 강력히 단속하는 정책을 펼쳤던 거죠. 이는 사회정화가 군사정권의 ‘혁명적 업적’을 가시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사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 언론은 군사정권이 과감한 결단과 용기로 사회악을 제거하는 데 큰 업적을 세웠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명랑사회’가 이루어졌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과 강력함을 드러냈습니다.

부랑아는 한국전쟁 이후 가족을 잃은 고아와 굶주림을 면하고자 집을 뛰쳐나온 아이들을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여론은 부랑아들을 사회문제로 하나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주로 남대문 시장 일대와 명동 뒷골목, 그리고 종로 3가와 동대문 시장을 무대로 삼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부랑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용시설을 하나둘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예컨대, 서울 홍제동에는 동북소년원을, 사직동에는 중앙소년원을 세웠습니다. 문제는 열악한 시설, 엄격한 규율, 굶주림으로 인해 부랑아들은 수용시설을 꺼렸다는 점입니다.

부랑아는 4월 혁명의 거리 시위를 급진화시킨 주체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간 쌓여온 응분을 밤거리를 휘저으며 터뜨렸습니다. 부랑아들은 이승만이 물러난 이후에도 데모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언론과 대학생들은 이들을 4월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골칫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죠. 박정희 정권이 사회 혼란을 바로 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랑아들을 단속할 때는 찬사와 묵인으로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 시기의 대표적인 부랑아 수용소로는 형제복지원을 들 수 있습니다. 1960년 형제육아원으로 시작된 형제복지원은 군 출신인 박인근이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맺고 운영하면서 3천 명을 수용하는 부랑인 시설로 발전했습니다. 이때가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훈령이라는 형식을 빌려 납치, 강제격리, 강제수용 등을 자행했지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지원 속에서 강제수용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사회적 존재를 소거했습니다. 납치 차량을 자체적으로 운영하여 부랑아들을 잡아들이게 했습니다. 거주지가 명확하거나 가족이 있는 경우에도 무조건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납치된 부랑아들은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절연되었습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심지어 머리카락까지)을 상실한 채 오로지 알몸만으로 격리된 공간에 들어섰습니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생명’입니다. 고통과 욕구만이 존재하고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채 텅 빈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용소의 삶은 고통을 유발하는 폭력의 연속이었습니다. 폭행과 굶주림, 과도한 규율, 강제노역으로 점철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형제복지원에서는 1975년부터 1987년까지 513명이 사망했습니다. 공식기록으로만 따져봤을 때 말입니다. 아마 기록의 조작 또는 누락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시신의 암매장이었습니다. 죽음마저 기억할 여지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그가 세상에 살았다는 사실을 말소시켜버린 겁니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할 만큼 끔찍한 일들이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졌습니다. 


국회 앞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촉구 농성 현장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형제복지원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진상 규명과 함께 따져 봐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회복지의 실천과정에서 벌어진 오류인가. 아니면 인권침해의 사건인가.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동안 사회복지시설로 운영되었습니다. 매년 20억 이상의 국고 지원을 받았습니다. 수용자들의 머릿수가 액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부랑아들을 검속해 형제복지원에 넘긴 경찰들은 두당 짭짤한 근무 평점을 받았습니다. 국가는 단순히 돈만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부랑인 단속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습니다. 형제도 복지도 없는 그 지옥은 국가가 위탁이라는 형식으로 만든 ‘한국판 아우슈비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한순미, 「나환과 소문, 소록도의 기억」, 『지방사와 지방문화』13권 1호, 457-458쪽.
  • 김려실, 「1970년대 생명정치와 한센병 관리정책」, 『상허학보』 48집, 2016.
  • 「소록도병원에서 부정」, 『경향신문』1964년 12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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