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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의 희생자- 조작된 간첩

분단체제의 희생자- 조작된 간첩
강성호 역사학자

대한민국의 역사는 ‘유령의 역사’였습니다. 살아 숨 쉬지만 성원권(Membership)이 박탈된 존재. 그들은 바로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이었습니다. “적의 영역 안에 들어가 비밀리에 정보를 수집하는 자”는 동서고금의 역사에 존재해왔습니다. 다만, ‘간첩’이라는 말은 ‘스파이’와 좀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분단체제의 산물이랄까요. 우리가 <007>이나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영화를 보면서 스파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반대로 간첩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간첩’은 분단 사회의 금기이다 보니 이런 차이가 발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제는 일상을 살아가던 평범한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간첩이라는 누명을 받고 한평생 짊어져야 했던 고통과 상처였습니다. 이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의 국민에서 간첩이라는 유령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들은 누구일까요.


간첩, 정적 제거를 위한 명분

한국 현대사에서 간첩은 국가보안법이 악법이라는 사실을 핵심적으로 드러냅니다. 1948년 12월 1일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남한을 급속도로 ‘반공규율사회’로 규정시켰습니다. 이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일상 속에 내재화된 사회를 의미합니다. 국가보안법은 평화적 통일을 명시한 헌법의 방향성과 충돌하면서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국가보안법은 분단체제를 법제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가 제주4ㆍ3사건의 진압을 거부하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신생정부의 체제 안정화에 큰 걸림돌이 된 건 당연지사. 이에 이승만 정권은 신생정부의 기틀을 다지고 좌익세력을 제거하고자 국가보안법을 서둘러 만들었습니다. 초안이 제출된 건 1948년 11월 9일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날(12.1)을 고려하면,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단기간에 매우 중대한 법률적 사안이 통과된 셈입니다. 그것도 형법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의 최초 피해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정적들이었습니다. 신생정부가 만들어진지 반년쯤 지나자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일명 반민특위)가 결성되었습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을 처벌하기 위한 특수기관이었습니다. 1949년 상반기는 그야말로 반민특위의 시대였습니다. 아쉽게도 반민특위의 과거사 청산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의 사무실은 경찰의 습격을 받았고, 6월 20일 야당 의원들은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국회프락치 사건’이 터진 겁니다. 국회 내에 북한의 프락치(첩자)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죠. 주목할 점은 프락치로 지목된 이들이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반대를 했던 의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법조항의 자의석인 해석과 집행을 근거로 국가보안법의 악용을 우려했습니다. 역사는 얄궂습니다. 이들이 우려했던 현실이 자신들에게 닥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승만 정권은 국회 내 개혁파 소장의원들을 탄압하고자 이들을 간첩으로 내몰았습니다.

북풍(北風)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북한의 재침략 가능성을 유권자들에게 어필함으로써 선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그렇다면, 이 북풍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최초의 북풍은 두 번째 총선거인 1950년 5ㆍ30선거를 전후로 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이었습니다. 먼저, 5ㆍ30선거가 실시되기 5일 전, 서울지검은 성시백이라고 하는 간첩이 서울 지역에 입후보한 몇몇 인물들에게 정치자금을 주려고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성시백이라고 하는 간첩을 내세워 김구 및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세력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이승만 정권에게 불리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받은 타격은 생각보다 심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는 국회의원들의 투표만으로 이루어지는 간선제였기 때문이죠.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 선거를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려고 부단히 애썼는데, 그 과정 속에서 ‘국제공산당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1952년 5월 26일 이승만 정권은 국제공산당의 비밀정치공작에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10명의 국회의원들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고,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꿔버렸습니다. 한국 현대사상 최초의 헌법 개정이 이루어진 겁니다.

국회프락치 사건(1949)과 성시백 사건(1950), 그리고 국제공산당 사건(1952)을 통해 간첩은 정권이 내세울 수 있는 위협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간첩이라는 존재는 남한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이는 원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가시화하여 전쟁의 불안감을 고조시키기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먹혀들어갈 수 있는 근거를 얻었습니다. 이를 통해 정권은 자신들의 억압을 은폐하거나 합리화시킬 수 있었죠.

 

조작간첩 사건이 자행되었던 (구)남영동 대공분실의 담벼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함량 미달의 간첩들

이승만 정권이 주로 정적 제거에 초점을 맞춰 조작 간첩 사건을 일으켰다면, 박정희 정권은 함량 미달의 간첩들을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체제 유지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은 건 똑같지만, 내놓으라하는 정치계의 거물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마저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7ㆍ4남북공동성명(1972) 이후 남파간첩이 거의 종식되면서, 정권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유형의 간첩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작 간첩 사건은 공안기관의 수사관들이 실적을 내기에 가장 좋은 건수였습니다. 진도 간첩단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박경준의 증언에 의하면, 수사관들은 “이번에 큰일을 하고 실적을 올렸으니 누구는 포상 받고 누구는 승진하고 포상금”을 탔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보안과의 경우 간첩검거에 따른 포상분배가 있었는데, 간첩검거와 무관한 부서의 직원들에게까지 포상이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정권은 개인의 승진과 포상을 걸어놓고 간첩 조작을 둘러싼 경쟁을 부추겼던 겁니다.

웃긴 건 함량 미달의 간첩들을 만들다보니 북한이나 간첩 행위에 대해 잘 알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조사와 함께 교육을 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촌극(寸劇)이죠. 1982년에 간첩으로 몰려 징역 10년에 자격 정지 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던 차풍길은 수사관들이 동두천에서 알아 온 내용이라며 흰 메모지에 군사정보내용을 달달 외우도록 했다고 합니다(2008년에 무죄 판정 받음). 1979년 삼척 간첩단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중 김순자는 수사관들로부터 간첩 종류가 일곱 가지라는 걸 배웠다고 합니다(2013년에 무죄 판정 받음). 진짜 간첩이라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교육을 시킨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안기관이야말로 간첩 양성소였던 셈입니다.

조작 간첩 사건은 유형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가족 중 한명이 한국전쟁 때 월북하거나 납북된 경우입니다. 공안기관은 이를 트집삼아 전쟁 후 월북한 가족이 남파간첩으로 내려와 피해자들을 간첩으로 포섭했다는 식의 시나리오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으로 행방불명된 가족이 비극의 소재로 돌아온 셈이죠. 대표적인 사례로, 한 가족이 간첩단으로 몰려 온갖 고문을 당했던 1981년 진도 간첩단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2012년에 무죄 판정 받음). 한국전쟁 때 진도 출신의 박영준이라는 사람이 월북했는데, 남한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겁니다. 심지어 동생 박경준은 진도군 고군면 부면장을 지낸 지방공무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억울한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납북어부’입니다. 휴전선이 따로 없는 바다에서 어부들은 오징어잡이배나 멸치잡이배를 타고 나갔다가 정체가 불분명한 함선에 이끌려 북의 조그만 포구에 도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1년여 정도 지내면서 여러 가지 조사와 회유를 받습니다. 문제는 남한으로 돌아가면서 발생했습니다. 공안기관의 폭행과 고문을 받고 북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는 함구령을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분단 사회에서 북을 경험했다는 건 평생 꼬리표가 붙어 감시와 통제를 받는 신세가 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특히, 1970년대 중반부터 납북 어부들은 조작 간첩 사건의 단골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감시와 규제를 받았습니다. 공안기관의 감시가 10년 이상씩 지속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함께 납북되었던 동료들이나 지인들이 공안기관에 매수되어 자신들을 감시할 때도 있었습니다. 국가폭력이 납북어부를 간첩으로 몰아 가족을 해체하는 단계를 넘어서 지역사회를 와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 중 가장 많은 사례는 아마 일본 관련 사건일 겁니다. 유학, 취업, 여행, 사업 등의 이유로 일본에 갔다 온 이들은 간첩이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이 유형의 가장 큰 특징은 조총련계 인물과의 접촉입니다. 조총련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준말로 친북적 성향을 지닌 재일동포 집단이었습니다. 공안기관은 조총련을 조작 간첩 사건의 시나리오를 쓰기에 가장 손쉬운 소재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조작 간첩 사건은 유형에 따라 만들어지는 몇 가지 공식이 있었는데, 단연 조총계가 으뜸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재일동포는 그토록 그리운 고국을 방문해도 차디찬 감옥 바닥에 갇히고 혹독한 폭행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지인 중에 조총련의 말단 직원만 있어도 바로 간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재일동포 사회는 민단계와 조총련계를 가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국땅에 ‘동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결집된 양상입니다. 어떨 때는 아버지가 조총련에, 아들이 민단에 가입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남한을 방문한 재일동포가 조총련계 사람을 안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재일동포 사회의 특수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을 조작 간첩 사건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환대의 공동체를 이루자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 존재입니다. 일종의 자격인 셈이죠.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 등은 사람됨이 사회적 성원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입니다. 사회적 성원권은 상대방의 존재를 알아보고, 상대방이 나의 알아봄을 알아차릴 수 있게 신호를 보낼 때야 성립됩니다. 만약 상대방의 존재를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만약 이 무시가 집단적으로 작용한다면, 상대방은 그야말로 유령이 되고 말 겁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을 들어보면, 유령으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연좌제로 가족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은 건 물론이고, 피해자들은 철저히 고립된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은데,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온전히 머물 데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장소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유령이었던 셈입니다.

우리가 국가폭력 문제를 다룰 때 고려해야 할 사안은 많지만 무엇보다 ‘환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자리를 준다는 건 그 자리에 딸린 권리들을 인정한다는 뜻이죠. 분단체제라는 구조 속에서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은 유령으로 오랫동안 살아가야 했습니다. 간첩의 멍에를 지고 사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의 일상은 고문으로 파괴되었으며, 그 폐허 위에서 이들은 혼자 버텨야 했습니다. ‘왜 하필 나일까’라는 물음을 매일매일 되새기며 억울함을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우리는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 환대란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입니다.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이 유령에서 사람으로의 성원권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건 무조건적인 환대입니다. ‘장소’를 갖지 못해 배회하는 이들에게 머물러도 좋은 자리를 기꺼이 내어 드림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환대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참고문헌》

  • 「분단체제 속 국가폭력과 분단 트라우마의 혼재- 속초지역의 사례」, 김종군, 『통일인문학』제74집, 2018
  • 『폭력과 존엄 사이-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다』, 은유, 오월의봄, 2016
  •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문학과지성사, 2015
  • 『국가보안법 연구2-국가보안법 적용사』, 박원순, 역사비평사, 1992
  • 『간첩사건 조작 증언 자료집』, 민가협 장기수가족 협의회, 1989
  • 『보안사』, 김병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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