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이소선의 아들 전태일 - 안녕, 엄마
<어머니> 이소선의 아들 전태일 - 안녕, 엄마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2012년의 전국노동자대회는 11월 11일이었다. 전국 노동자대회는 매년 전태일 열사의 기일인 11월 13일에 즈음해 열리는 노동계 최대 규모의 행사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모여든 광장의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스피커를 통해 퍼지는 연단위의 결기어린 말들은 사실 수만의 사람들이 저마다 떠들어대는 소음에 묻히고 주변의 자동차 소리에 치인다. 적당히 길고 결의 넘치고 적당히 지루하고 뻔한 말의 상찬이 지나가면 또 적당한 박수와 환호가 울려 퍼진다.
노동자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폭력은 전태일이 제 몸에 불을 붙인지 40년이 지나는 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동’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는 더욱 냉랭해졌다. 모두가 노동자이면서 모두가 저는 노동자이기를 거부하는 이 웃기지도 않는 세상. 세상이 변함없고 지루하다보니 아무래도 노동자 대회마저 적당하고 지루해졌나보다. 피폭과 피착취가 자연스럽고 저항과 슬픔마저 익숙해진 시대.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첫 번째 노동자대회입니다.”
누구의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소선, 그녀가 이제 곁에 없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사뭇 숙연해졌다. 그때 광장이 정말로 숙연해졌는지 정말 잡담과 소음이 사라진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았다. 시대의 한 단락이 지나갔고 이제는 익숙해진 슬픔을 위로해줄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것을.
#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2009년 11월, 이소선은 도쿄대학교 와다 하루키 교수를 만난다. 하루키 교수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인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이소선은 전태일과 헤어지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매우 힘들어했다. 40년이 넘도록 그녀에게 전태일은 여전히 아픈 기억이다.
이소선은 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분신했던 아들 전태일이 남긴 “저희 뜻을 이어가 달라”는 유언을 지키고자 40년간을 노동자를 위해 살았다. 아들의 뜻에 따라 우리나라 첫 민주노조로 불리는 청계피복노조를 설립했다. 삶의 마지막까지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농성하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걱정했다. 한국사회 어디서든 핍박받는 노동자, 홀대받는 노동의 자리에 이소선이 있었다. 기륭전자에서 부당하게 해고당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 옥상에 올라 밥을 굶어가며 싸울 때 이소선은 득달같이 달려가 “위험한 물건을 빨리 내놓으라며, 내놓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눌러앉았다. 2009년 만해대상 시민운동가상을 받는 자리에서는 문화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을 앞에 두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을 분노 어린 목소리로 질타했다. 그녀는 단 한순간도 아들 전태일의 유지,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한국사회 노동운동의 시작이었던 전태일의 신화는 이소선을 통해 완성되고 이어졌다. 이소선은 이미 상징이 됐다. 반세기를 함께한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그녀는 자식을 가슴에 묻은 슬픈 어머니였고, 아들의 부탁을 끝까지 지켜낸 강한 어머니였으며, 민주화 투쟁의 가시밭길을 걷는 모두를 위로하고 보듬었던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그러나 이소선은 단지 전태일의 어머니로서 노동운동 현장을 지키지 않았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노동운동 활동가 이소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으로 확장됐다.
# 이소선의 아들 전태일
영화는 이소선을 전태일의 어머니로 기록하지 않는다. 투사, 내지는 투사의 어머니로서의 이소선을 기억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이소선은 수시로 낮잠을 자고, 낮잠을 잘 땐 입을 벌리고 코를 드르렁 곤다. 고스톱을 치고, 고스톱 치려고 모아둔 동전묶음을 자랑하고 카메라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이내 부끄러워 등을 돌린다. 영화 속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 보다는 창신동 작은 골목에 사는 할머니 이소선이다.
집안 곳곳에 걸려있는 사진들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다. 70년대의 어린 여공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주노조를 만들어내고 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의 한복판을 견뎌내고, 노동과 사람이 소외된 시대에 여전히 사람을 위로하고 함께 분노하고 슬퍼했던 기록들, 사람들. 어쩌면 이소선이 전태일의 어머니인 것이 아니라 창신동 좁은 골목에 사는 고스톱 좋아하는 이소선 할머니의 아들이 청계천에서 산화한 노동자 전태일인 것. 태준식 감독이 “어머니한테 의지하는 분들이 참 많다”고 말하자 이소선은 답했다. “나한테 의지하는 것은 바보야. 나는 여사라는 말도, 태일이를 열사라고 부르는 말도 싫어. 태일이는 노동자였고 나는 노동자의 어머니였어.”
이소선은 전태일이 신화가 돼 박제당하는 것도 자신이 그 신화화를 조장하게 되는 것도 거부했다. 그래서 영화 역시 그녀의 삶을 우상화하고 미화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녀의 삶, 절룩거리는 걸음을 그저 뒤따른다. 영화가 이소선을 바라보는 시각이 명확히 드러나는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감독이 이소선의 손톱을 깎아주는 장면. 쇠약한 몸을 추스르고 전태일 40주기 행사를 치러낸 후 며칠간을 후유증으로 고생한 이소선은 자기 힘으로 손톱도 깎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다. 결국 촬영을 하고 있던 태준식 감독이 카메라를 내려놓고 이소선의 손톱을 깎아주는데 감독은 카메라를 내려놓으면서도 녹화를 멈추지 않았다. 화면 밖에선 이소선과 감독의 말소리가 들리지만 화면 안에선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 씨의 뒷모습만 보인다. 의도되지 않은 화면이다. 촬영 중에 종종 일어나는 B컷이고 이런 장면은 편집 때 걷어 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이 장면은 <어머니>에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신화화된 이소선이 아니라 늙고 지쳐있는 노인의 일상, 그리고 그 일상의 축적이 자연스레 신화의 근간이 된 삶의 냄새들이 포착되는 순간. 대단하지 않아서 더욱 대단한 그녀의 삶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태일 40주기 때 열사 묘역을 중심에 두고 남녀노소 수많은 이가 도시락을 먹던 모습을 이소선의 등 뒤에서 찍은 장면이다. 자식 같은 것들 밥먹이고 지켜보던 이소선의 삶이 함축된 그 장면.
영화 속에서 감독은 전태일의 이름을 꺼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이야기가 아니다.
# 안녕 엄마
영화는 이소선이 소천하는 날에서 시작해 시간을 돌려 진행된다. 이는 위대한 인물의 일대기를 반추하는 플래시백의 효과라기보다는 그녀가 없는 세계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을 통해 다시 이소선이 살아있는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영화의 시간이 흐를수록 화면 속 이소선은 생기를 더해간다. 그렇게 건강한 이소선에게 돌아가고 싶은 욕망은 감독에게서 관객들로 전염된다.
감독은 카메라를 핑계로 그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한 시절, 언제나 위기일 뿐인 삶. 모두에게 어머니로 불리는 이소선을 찾아가면 차라리 목 놓아 울 수라도 있을 것 같았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가 그렇듯 그녀는 늙었고 지쳤고 그래서 사실 대단치 않다. 그러나 우리의 어머니가 그렇듯 그 늙고 지친 몸으로 우리를 대단치 않게 위로했다. 그녀에게 우리는 전태일이었을까. 이소선은 우리에게 엄마였을까.
어머니의 일상은 우리의 신화가 됐다. 아니 그보다 신화와 일상은 다르지 않다. 매 순간, 모든 일상을 치열하게 투쟁하듯 살아내고 모든 투쟁을 일상으로 받아들인 삶. 지금 한국에서 땀 흘려 일해 밥 벌어 먹는 어느 누구도 전태일이 아닌 이 없고, 청계천의 어린 시다이지 않은 이가 없다. 그래서 우리 중 이소선의 자식이지 않은 이는 없다. 그래서 영화의 말미, 이소선이 언제나처럼 말하던 이야기가 깊이 마음에 남는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당부하던 이야기는 ‘자기를 낮추고’, ‘하나가 돼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