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민주화 운동의 현장 : 김포국제공항
숨겨진 민주화 운동의 현장 : 김포국제공항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김포국제공항. 오랫동안 잘나갔던 일인자 자리를 인천공항에 내주고 ‘추억의 공간’이 된지도 꽤 오래된 곳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내선과 단거리 국제선 공항으로 건재하며, 갑자기 인천 공항에 갑자기 큰 문제가 생기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귀중한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일반 국민들은 거의 느끼고 있지 못하지만 말이다.
사실 김포공항은 1939년 일제가 만든 군용 비행장으로 시작되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일본은 서울 서쪽에 군사시설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여의도 비행장, 부평 조병창 등이 대표적인데, 김포 비행장 역시 이런 전략 하에 일제가 깐 포석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이곳을 별로 써먹지 못했고, 오히려 미군이 요긴하게 쓰게 된다.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이곳은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당연히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1950년 6월에도 국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 직후 미 해병대의 주요 탈환 목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추억 속으로 밀려가 있는 이 공항’을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라고 하면 의아해 할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아시아 주교회의를 마치고 이에 내리자마자 바로 ‘남산’으로 끌려간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찬란한 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탄생했다. 그해 연말,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흑역사’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오글 목사가, 다음 해 1975년 4월 30일에는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이곳을 통해 우리나라를 강제로 떠나야 했다. 덩치야 훨씬 커졌지만 ‘한류 스타’들이 멋을 내는 ‘공항 패션’의 배경, 기껏해야 졸전을 거듭한 국가대표팀에게 분노한 팬들이 엿을 던지는 장소에 ‘불과한’ 인천공항과는 차원이 다른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진짜 역사적인 사건’은 십년 후에 벌어진다.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에게 ‘개인’으로서 최대의 적은 김대중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력욕으로 일으킨 ‘광주사태’를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조작하여 뒤집어 씌우고 사형선고까지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해외 우방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82년 2월에는 20년형으로 감형하였다가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같은 해 12월 16일 서울대 병원 특실로 이송하였다. 그 사이에 외국행을 집요하게 권유하였다. 어차피 국내 활동이 불가능했던 김대중은 고민 끝에 수락했고, 일주일 후 구급차를 타고 공항으로 떠나야 했다. ‘당연하게도’ 그 차는 공항청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활주로로 향했고, 그를 태운 노스웨스트 항공기는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활발한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미국의 정계와 학계 인사. 대중과 교포들을 만나며 한국의 민주화를 호소하던 김대중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1983년 8월 21일, 아키노 필리핀 상원의원의 암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김대중의 귀국 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사이 김포공항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장소들처럼 두 얼굴을 보인다. 전두환은 아예 없다시피 한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서서인지 개인의 이국취미 때문인지 부지런히 해외순방을 다녔고, 그 때마다 김포공항을 이용했다. 청와대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길에는 주변 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장도에 나서는 대통령’을 환송해야만 했다. 당시에 나이 어렸던 필자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 몰상식한 일이 없어진 지도 꽤 되었으니 부족하나마 이 나라가 많이 민주화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1983년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의 단식 투쟁이 시작되고, 학생들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이 다시 일어났고 해외 우방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 역시 정치규제를 푸는 등 일정 부분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5년 2월 12일, 총선이 결정되자 김대중은 조금이라도 선거에 도움을 주기 위해 귀국을 결심한다. 그가 귀국을 결심하자 미국 하원의원 두 명과 미국무부 전직 차관보를 포함한 37명이 ‘인간방패’를 자처하며 동행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가 ‘제2의 아키노’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1985년 2월 8일 오전 11시 40분, 김대중 일행을 태운 노스웨스트 NWA 191편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최소한 수만 명이 넘는 인파가 “김대중 선생 환영!”, “행동하는 양심, 드디어 우리의 품으로”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공항과 주변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고,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와 아들 홍일씨는 공항 청사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전 총재는 상도동 자택에 연금되어 집 밖에 나오지도 못했다. 공항과 주변 도로에 엄청난 경찰병력이 배치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대중 귀국 환영 인파
김대중 일행이 비행기에서 내려 청사에 들어서자 바로 사복경찰 50여 명이 김대중과 이희호 여사를 분리시키려 달려들었다. 그들은 최우방국인 미국의 현직 의원과 전직 고관도 거칠게 다루었고 주먹질과 발길질조차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나서 김대중 부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처넣고 하얀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태워 공항 뒷길로 빠져나갔다. 수 만 명이 그를 보기 위해 나왔지만 한 명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김대중은 준비했던 귀국성명서를 주머니에서 꺼내지도 못했다. 그 대신 같이한 일행들은 공항에 나오자마자 환영인파에 둘러싸여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커튼이 쳐진 버스를 타고 동교동에 도착한 김대중은 다시 자택연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런 엄청난 이야기들이 있었던 장소가 바로 김포공항이다. 그런데 지금의 김포공항에는 역사를 기념하는 어떠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김대중과 지학순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의 거인들을 끌고 가 억류했던 공항 내의 장소들은 당연히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
하기야 한국전쟁 중 가장 중요한 공군기지이자 공군사관학교의 창설지임에도 ‘호국의 흔적’조차 없으니 그런 걸 바라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것이다. 공항 홈페이지의 연혁조차 1978년으로 끝나 있으며, 옛 사진은 한 장도 없다. 국내선 청사는 지금 공항의 청사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앞서 말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지만 이미 여러 번 ‘리모델링’하여 옛 날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 주변에는 대기업의 쇼핑몰이나 영화관 같은 상업시설들만이 즐비할 뿐이다.
이렇게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운 김포공항이지만 어린 시절 필자가 첫 번째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에 갔을 때 인상 깊게 보았던 관제탑만은 여전히 그대로다. 일제의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시작했지만 정치사, 군사사, 항공사, 그리고 민주화운동사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었던 이곳에 저 관제탑을 중심으로 ‘김포공항 현대역사관’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래도 ‘유별난 취향’을 가진 필자의 욕심에 불과할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