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석
○ 1946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
○ 1984년 이후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상계동, 목동, 양평동, 평화촌, 도화동, 홍은동, 신정동, 전농동, 서초동 꽃마을 등의 강제철거에 맞선 투쟁속에서 1987년7월17일 서울시철거민협의회 결성에 함께 하셨습니다.
○ 1988년 4월 서울시철거민협의회 회장으로 선출 되었습니다.
○ 1989년 11월11일 전국노점상연합회, 서울지역건설일용노동조합 등 도시빈민 대중조직들과 전국빈민연합을 결성 하였습니다.
○ 1991년 12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청년학생, 전교조 등 13개 부문단체와 12개 지역조직이 참여하여 결성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의 공동의장을 역임 하셨습니다.
○ 2019년 4월30일(火) 오랜 병마 끝에 73세의 나이로 영면 하셨습니다.
○ 1984년 이후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상계동, 목동, 양평동, 평화촌, 도화동, 홍은동, 신정동, 전농동, 서초동 꽃마을 등의 강제철거에 맞선 투쟁속에서 1987년7월17일 서울시철거민협의회 결성에 함께 하셨습니다.
○ 1988년 4월 서울시철거민협의회 회장으로 선출 되었습니다.
○ 1989년 11월11일 전국노점상연합회, 서울지역건설일용노동조합 등 도시빈민 대중조직들과 전국빈민연합을 결성 하였습니다.
○ 1991년 12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청년학생, 전교조 등 13개 부문단체와 12개 지역조직이 참여하여 결성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의 공동의장을 역임 하셨습니다.
○ 2019년 4월30일(火) 오랜 병마 끝에 73세의 나이로 영면 하셨습니다.
故 고광석 동지께서는 1946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생계 방편을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 왔습니다. 이러한 이촌향도의 흐름에 편승해 고인의 가족도 서울로 이주해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한편 1980년 광주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벌이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군부독재가 들어섰습니다. 독재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치부를 무마하고자 86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등 국제적인 행사를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당시 거리의 노점상은 단속에 시달렸으며, 재개발지역에서는 철거가 대대적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특히 서울지역 곳곳 상계동, 목동, 양평동, 평화촌, 도화동, 홍은동, 신정동, 전농동, 서초동 꽃마을 등에서 대대적인 강제철거가 전개되자 이에 맞서서 대대적인 철거 반대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과 곧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던 정세 속에서 7월 17일 서울지역 철거민들이 스스로 뭉쳐 ‘서울시철거민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동지께서는 1988년 4월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시기 세입자들과 노점상 등 도시빈민에 대한 강제철거와 생존권 탄압은 군부독재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과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도시빈민은 적극 연대하고 헌신하며 한걸음 성장해 나갔습니다. 특히 1988년 돈암동의 세입자들을 위한 가 이주단지(임시주거시설)와 영구임대주택 쟁취는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1989년 11월 11일 전국노점상연합회, 서울철거민협의회, 서울지역건설 일용노동조합 등 도시빈민 대중조직들이 뭉쳐 ‘전국빈민연합(전빈련)’을 결성 공동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렇게 도시빈민운동 조직을 강화 해 나갔으며, 그 중심에 故 고광석 동지가 계셨습니다.
뿐만아니라 1991년 12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청년 학생, 전교조 등 13개 부문 단체와 12개 지역조직이 참여하여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선두에서 이끌던 ‘상설적 공동운동체’ 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광석 전빈련 의장은 1991년 10월 22일 상설연합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자 ‘지선 전민련 공동의장과 윤정석 대구·경북 추진위원회 대표와 함께 준비위원장’ 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일 연세대학교에서 각 운동 부문, 지역 대의원 및 시민 5천여 명이 창립 대의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전국연합 대의원들은 투쟁방향과 강령 등을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고광석 전빈련 의장, 권종대 전농 의장, 지선 전민련 의장 등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도시빈민 생존권과 나라의 민주주의, 조국 통일을 향한 투쟁의 길에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故고광석의장 동지는 1994년 이후 기나긴 투병 끝에 2019년 4월 30일(火) 73세의 나이로 영면하셨습니다. “故 고광석” 동지는 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헌신적으로 투쟁하셨습니다. 노동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하신 “빈민운동”의 큰 별이 셨습니다.
이에 2019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철거민연합,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전국노점상총연합, 천주교도 시민 민회, 기독교 빈민선교협의회,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 임대주택 국민연합, 한국진보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빈철연, 민중공동행동(52개 단체) 연합단체, (사)더 좋은 정책연구원 등 총 53개가 모여 그 뜻을 기리고자 “故 고광석” 의장 도시빈민장을 치르게 됩니다.
이러한 국제행사를 앞두고 당시 거리의 노점상은 단속에 시달렸으며, 재개발지역에서는 철거가 대대적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특히 서울지역 곳곳 상계동, 목동, 양평동, 평화촌, 도화동, 홍은동, 신정동, 전농동, 서초동 꽃마을 등에서 대대적인 강제철거가 전개되자 이에 맞서서 대대적인 철거 반대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과 곧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던 정세 속에서 7월 17일 서울지역 철거민들이 스스로 뭉쳐 ‘서울시철거민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동지께서는 1988년 4월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시기 세입자들과 노점상 등 도시빈민에 대한 강제철거와 생존권 탄압은 군부독재정권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과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도시빈민은 적극 연대하고 헌신하며 한걸음 성장해 나갔습니다. 특히 1988년 돈암동의 세입자들을 위한 가 이주단지(임시주거시설)와 영구임대주택 쟁취는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과 함께 1989년 11월 11일 전국노점상연합회, 서울철거민협의회, 서울지역건설 일용노동조합 등 도시빈민 대중조직들이 뭉쳐 ‘전국빈민연합(전빈련)’을 결성 공동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렇게 도시빈민운동 조직을 강화 해 나갔으며, 그 중심에 故 고광석 동지가 계셨습니다.
뿐만아니라 1991년 12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중심으로 청년 학생, 전교조 등 13개 부문 단체와 12개 지역조직이 참여하여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선두에서 이끌던 ‘상설적 공동운동체’ 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광석 전빈련 의장은 1991년 10월 22일 상설연합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자 ‘지선 전민련 공동의장과 윤정석 대구·경북 추진위원회 대표와 함께 준비위원장’ 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일 연세대학교에서 각 운동 부문, 지역 대의원 및 시민 5천여 명이 창립 대의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전국연합 대의원들은 투쟁방향과 강령 등을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고광석 전빈련 의장, 권종대 전농 의장, 지선 전민련 의장 등을 공동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도시빈민 생존권과 나라의 민주주의, 조국 통일을 향한 투쟁의 길에서 한치도 타협하지 않았던 故고광석의장 동지는 1994년 이후 기나긴 투병 끝에 2019년 4월 30일(火) 73세의 나이로 영면하셨습니다. “故 고광석” 동지는 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헌신적으로 투쟁하셨습니다. 노동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하신 “빈민운동”의 큰 별이 셨습니다.
이에 2019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철거민연합,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전국노점상총연합, 천주교도 시민 민회, 기독교 빈민선교협의회,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 임대주택 국민연합, 한국진보연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빈철연, 민중공동행동(52개 단체) 연합단체, (사)더 좋은 정책연구원 등 총 53개가 모여 그 뜻을 기리고자 “故 고광석” 의장 도시빈민장을 치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