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당시 30세)
1960년 8월 14일 서울 출생
1980년 3월 성균관대 입학
1984년 10월 부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 반제동맹당 사건으로 수배
1989년 9월 4일 인노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구속(인천.부천노동자회 결성의 산파역할). 집행유예로 출소.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괴로워함
1990년 8월 7일 오전 9시 30분경 한양대 사회과학대에서 분신
제 26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1980년 3월 성균관대 입학
1984년 10월 부천에서 노동운동에 투신. 반제동맹당 사건으로 수배
1989년 9월 4일 인노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구속(인천.부천노동자회 결성의 산파역할). 집행유예로 출소.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괴로워함
1990년 8월 7일 오전 9시 30분경 한양대 사회과학대에서 분신
제 26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최동 동지는 민주화열기가 한창이던 ‘80년 서울의 봄’인 1학년 때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하였다. 동지는 대학에 들어간 후 곧바로 성균관대의 대표적인 이념써클의 하나였던 동양사상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와 함께 성균관대 행서문학회에 들어가 문학수업을 하기도 했다.
80년 3월 성균관대에서는 전국 최초로 연일 수천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병영집채거부운동이 벌어졌다. 최동 동지는 이때도 중심적으로 활동하였는데, 3차입소까지 거부하고 마지막 남은 수십명 중에 속했다. 5.17쿠데타 이후 동양사상연구회 등의 진보적인 이념써클은 비공개조직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에 최동 동지는 합법써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심산연구회라는 공개써클 결성을 주도한다. 심산은 성균관대의 설립자이며 반제반독재 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81년 3월 창립한 이 써클에서 동지는 1학년뿐만 아니라 2학년 동기들의 학습까지 지도해냈다. 그 당시 동지는 국문과학회에서 최메니옹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란혁명의 지도자인 호메니의 강렬한 인상과 지도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써클에서는 ‘마동’이라는 애칭도 얻게된다. 중국의 마오쩌뚱에서 따온 마동이라는 칭호는 외모보다는 그의 정치사상이 탁월하고 논리전개가 칼같은 데서 나온 것이라 한다.
최동 동지는 83년 5월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학내의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되어 첫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동지는 매우 엄격하고 차분하면서도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서울 환일고 재학 시절 동지는 친구들 사이에 ‘최동 장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등산, 낚시, 기타는 물론 십팔기까지 배운 동지가 동료들 사이에서 ‘대장노릇’을 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3년 시위주도 혐의로 최동 동지는 실형을 선고받고 9개월간 복역했다.
여동생 최숙희씨는 최동 동지의 최후진술 장면을 회고하며 “법정에 선 오빠는 정말 꿋꿋했어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이 있어요.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적 승리, 도덕적 승리를 해야한다”는 구절입니다. 그순간 나도 꼭 오빠처럼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었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의 유화조치를 맞아 최동 동지는 84년 2월8일 석방된다. 그때 감옥에서 출소한 학생들은 정부의 시혜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동지는 복학허용이 정부의 개량화조치에 말려드는 것이라며 복학을 반대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최동 동지는 89년 구속될 때까지 집을 떠나 부천의 월세방에서 지낸다. 84년 부천의 삼창정밀, 동광정밀 등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최동 동지는 줄곧 부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부천 삼정동의 (주)세일에 재단사로
취업하기도 했으며 동파이프를 제작하는 극동금속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최동 동지는 수형 전력이 있어 대규모 사업장에 취업하지 못하고 소규모공장이나 마찌꼬바를 전전해야했다. 86년경부터는 신원조회가 엄격해져 라이프통상에 입사원서를 냈으나 전력이 발각되어 취업을 못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최동 동지는 그간의 현장활동에 대해 현장에 뿌리박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은 자신이 노동자들보다 가정환경이 유복한 탓이라고 평가하고 이후엔 취업이 늦어지더라도 사상무장을 철저히 한 후에 진짜 노동자생활을 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86년경 동지는 반제동맹당 사건의 여파로 수개월간 도피생활을 했으며, 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인천지역 노동자연맹 준비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대통령 선거투쟁에 참여했다. 88년 3월 창립한 인노회 결성에 최동 동지는 산파 역할을 한다. 인노회 조직활동은 동지의 정치적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동지는 인노회의 “현장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선반공으로 다시 공장에 들어간다. 89년 2월 검찰은 6공 들어 처음으로 이적단체구성죄를 적용하여 인노회 관계자 6명을 구속했다. 인노회가 NLPDR을 이념으로 하는 지하조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관련자들은 공개적인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라며 노동운동 탄압을 위한 용공조작책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백영엽 판사는 “인노회가 이른바 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구성된 단체라기보다 노동운동을 위한 단체임을 인정”하여 검찰의 구속영장신청을 기각하였다. 이에 검찰은 TK출신의 조희대 판사에게 영장을 신청, 발부받았다. 최동 동지는 이 사건으로 89년 4월 28일 부천 심곡동 자취방 앞에서 치안본부 대공 3계 요원들에 의해 연행, 구속되었다. 이 무렵 동지는 도자기 공장인 부천 세라아트의 민주노조 건립을 위해 조합원 교육에 열중하고 있었다. 최동 동지는 연행된 후 묵비권으로 버텼으나
수사관들이 친구 결혼식 사진, 이삿짐 나르는 사진 등 한 달 이상 미행하여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 30여점을 제시하자, 치밀하게 준비된 조직탄압 차원의 수사임을 간파하였다.
이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고문, 조작수사를 익히 알고 있는 최동 동지는 동료들이 탄압에 대처할 시간을 벌게하고, 취조에 불응하기 위해 자해를 기도했다. 취조실 욕조 모서리에 머리를 짓이긴 것이다. 그러나 경찰병원에서 일곱바늘을 꿰매는 응급치료를 한 후 조사를 계속 받아야 했다.
최동 동지는 이후 약 20여일에 걸쳐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동지는 출소 후 동료들에게 조사를 받는 기간에 수사관들이 교대로 취조하면서 잠을 안 재우거나, 안기부에 넘기겠다는 식의 협박으로 잠을 못자게 해 자신의 수면기능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최동 동지는 연행 21일째인 5월 19일, 정신적 압박감이 극에 달하는 수사과정에서 더 이상의 모략에 말려들지 않기위해 또다시 자해를 가했다. 이번에는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칫솔대를 부러뜨려 목 부위를 찔렀는데 기도가 1cm가량 뚫리는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병원 담당의사는 가족들에게 주의깊은 관찰과 치료가 요구된다고 말했으나 최동 동지는 정밀검사를 받아보지 못하고, 경찰병원에서 외상치료 후 5월 20일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구치소로 넘겨진 이후 최동 동지는 수사과정에서부터 계속된 불면에 시달렸다. 그러나 동지는 이를 사소한 증세로 여기고 학생시절의 투옥경험을 살려 운동과 독서로 계획적인 생활을 했다. 한 달 가까이 사회과학 신간서적이나 소설책, 바둑책 등 수십권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7월초에는 심한 발작과 실어 증세로 보름여 동안 고통을 겪었다.
주체할 수 없는 통증과 함께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말을 하는 등 의식과 행동이 유리된 증세가 뒤따랐다. 이같은 증세는 구치소 의무과에서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이후 나타났다고한다. 그 때문에 최동 동지는 자신의 불면증, 실어증이 단순한 심리적 불안상태가 아닌 약물 투여에서 비롯되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약물투여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가족들이 특별면회를 했을 때 동지는 “눈만 껌벅이고 말을 못했으며, 가끔 입을 강제로 벌리고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고 전한다.
책이나 신문을 전혀 못보는 등 증세가 악화됨에 따라 종로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받은 결과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세’라는 진단이 나왔다. 비정상적인 정신상태 하에서도 재판은 진행되었다.
최동 동지는 재판정에서 동료들에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무비 카메라로 감시를 당하고 있다” , “수용 중인 독방에 분말가스가 투여된다” , “내 몸에 AIDS균을 감염시켰다”는 발언을 하는 등 심한 피해의식 상태에 빠져있었다. 동지는 심리과정에서는 거의 한마디도 못했다.
9월 18일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가 결정되자 “이건 음모다. 이들은 또 나를 이용하려 한다”며 극도의 공포에 떨었다. 출소 이후 최동 동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11월부터 1월까지 종로 신경정신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수전증, 기억력 감퇴까지 뒤따랐다. 동지의 모든 사고는 “자기가 탄압받은 것을 알아달라” “적들이 나를 무능력하게 만들었다”는 데 집중되었다.
마침내 4월28일에는 부천 중동에 자취방을 얻어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한다. 최동 동지가 부천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것에 대해 동료들은 자신이 활동했던 노동현장에의 ‘귀소본능’이라고 여긴다.
동지는 적십자 병원에서 퇴원한 후 다소 차분한 상태를 유지했다. 인노회 동료들을 만나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진상을 밝혀줄 것을 호소했다. ‘천인공노할 치안본부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동지는 건강이 좋아져야 자신의 억울함을 폭로할 수 있다며 수영장을 다니거나 인근 뒷산, 한양대로 산책을 다니며 건강회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호전될 기미를 보이던 최동 동지는 분신하기 얼마전부터는 상태가 다시 악화되는 듯 했다. 동지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내가 구속되기 전에는 괜찮았다” “지금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간다” “치본 들어간 이후 내 몸이 망가졌다”며 하소연했다. 동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어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아마도 이 점이 최동 동지가 죽음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최동 동지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누구도 한마디로 단언하지는 못한다. 치안본부는 “구타 등 가혹행위는 절대 없었다”고 강변했다. 최동 동지의 담당 변호사 역시 육체적인 가혹행위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동 동지가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과정에서 병을 얻었다는 사실이며 잠 안재우기 등의 정신적 고문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최동 동지의 어머니는 “아들이 구속 이후 한 달만에 백 팔십도로 바뀐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옛날의 우리 동이가 아니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지 상상을 못하겠어요. 반드시 죽음에 대한 진상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80년부터 10년간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해온 최동 동지. 그의 죽음은 도덕적으로 승리하는 길을 선택한 이 시대의 양심적인 사람에게 가해진 부도덕한 정권의 핍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최동 동지의 죽음이 결코 패배적인 발상이 아님을 박형규 목사는 장례식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며 살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의에 맞설 힘이 없었던 최동 동지는 무릎을 꿇기 보다는 마지막 싸움의 무기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80년 3월 성균관대에서는 전국 최초로 연일 수천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병영집채거부운동이 벌어졌다. 최동 동지는 이때도 중심적으로 활동하였는데, 3차입소까지 거부하고 마지막 남은 수십명 중에 속했다. 5.17쿠데타 이후 동양사상연구회 등의 진보적인 이념써클은 비공개조직으로 움직여야 했다.
이에 최동 동지는 합법써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심산연구회라는 공개써클 결성을 주도한다. 심산은 성균관대의 설립자이며 반제반독재 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81년 3월 창립한 이 써클에서 동지는 1학년뿐만 아니라 2학년 동기들의 학습까지 지도해냈다. 그 당시 동지는 국문과학회에서 최메니옹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란혁명의 지도자인 호메니의 강렬한 인상과 지도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리고 써클에서는 ‘마동’이라는 애칭도 얻게된다. 중국의 마오쩌뚱에서 따온 마동이라는 칭호는 외모보다는 그의 정치사상이 탁월하고 논리전개가 칼같은 데서 나온 것이라 한다.
최동 동지는 83년 5월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학내의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되어 첫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동지는 매우 엄격하고 차분하면서도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서울 환일고 재학 시절 동지는 친구들 사이에 ‘최동 장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등산, 낚시, 기타는 물론 십팔기까지 배운 동지가 동료들 사이에서 ‘대장노릇’을 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3년 시위주도 혐의로 최동 동지는 실형을 선고받고 9개월간 복역했다.
여동생 최숙희씨는 최동 동지의 최후진술 장면을 회고하며 “법정에 선 오빠는 정말 꿋꿋했어요.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이 있어요.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적 승리, 도덕적 승리를 해야한다”는 구절입니다. 그순간 나도 꼭 오빠처럼 살아야지 하고 결심했었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의 유화조치를 맞아 최동 동지는 84년 2월8일 석방된다. 그때 감옥에서 출소한 학생들은 정부의 시혜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동지는 복학허용이 정부의 개량화조치에 말려드는 것이라며 복학을 반대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최동 동지는 89년 구속될 때까지 집을 떠나 부천의 월세방에서 지낸다. 84년 부천의 삼창정밀, 동광정밀 등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최동 동지는 줄곧 부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부천 삼정동의 (주)세일에 재단사로
취업하기도 했으며 동파이프를 제작하는 극동금속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최동 동지는 수형 전력이 있어 대규모 사업장에 취업하지 못하고 소규모공장이나 마찌꼬바를 전전해야했다. 86년경부터는 신원조회가 엄격해져 라이프통상에 입사원서를 냈으나 전력이 발각되어 취업을 못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최동 동지는 그간의 현장활동에 대해 현장에 뿌리박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은 자신이 노동자들보다 가정환경이 유복한 탓이라고 평가하고 이후엔 취업이 늦어지더라도 사상무장을 철저히 한 후에 진짜 노동자생활을 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86년경 동지는 반제동맹당 사건의 여파로 수개월간 도피생활을 했으며, 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인천지역 노동자연맹 준비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대통령 선거투쟁에 참여했다. 88년 3월 창립한 인노회 결성에 최동 동지는 산파 역할을 한다. 인노회 조직활동은 동지의 정치적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동지는 인노회의 “현장에서 활동하지 않으면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 선반공으로 다시 공장에 들어간다. 89년 2월 검찰은 6공 들어 처음으로 이적단체구성죄를 적용하여 인노회 관계자 6명을 구속했다. 인노회가 NLPDR을 이념으로 하는 지하조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관련자들은 공개적인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라며 노동운동 탄압을 위한 용공조작책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 백영엽 판사는 “인노회가 이른바 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구성된 단체라기보다 노동운동을 위한 단체임을 인정”하여 검찰의 구속영장신청을 기각하였다. 이에 검찰은 TK출신의 조희대 판사에게 영장을 신청, 발부받았다. 최동 동지는 이 사건으로 89년 4월 28일 부천 심곡동 자취방 앞에서 치안본부 대공 3계 요원들에 의해 연행, 구속되었다. 이 무렵 동지는 도자기 공장인 부천 세라아트의 민주노조 건립을 위해 조합원 교육에 열중하고 있었다. 최동 동지는 연행된 후 묵비권으로 버텼으나
수사관들이 친구 결혼식 사진, 이삿짐 나르는 사진 등 한 달 이상 미행하여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 30여점을 제시하자, 치밀하게 준비된 조직탄압 차원의 수사임을 간파하였다.
이에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고문, 조작수사를 익히 알고 있는 최동 동지는 동료들이 탄압에 대처할 시간을 벌게하고, 취조에 불응하기 위해 자해를 기도했다. 취조실 욕조 모서리에 머리를 짓이긴 것이다. 그러나 경찰병원에서 일곱바늘을 꿰매는 응급치료를 한 후 조사를 계속 받아야 했다.
최동 동지는 이후 약 20여일에 걸쳐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동지는 출소 후 동료들에게 조사를 받는 기간에 수사관들이 교대로 취조하면서 잠을 안 재우거나, 안기부에 넘기겠다는 식의 협박으로 잠을 못자게 해 자신의 수면기능을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최동 동지는 연행 21일째인 5월 19일, 정신적 압박감이 극에 달하는 수사과정에서 더 이상의 모략에 말려들지 않기위해 또다시 자해를 가했다. 이번에는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칫솔대를 부러뜨려 목 부위를 찔렀는데 기도가 1cm가량 뚫리는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병원 담당의사는 가족들에게 주의깊은 관찰과 치료가 요구된다고 말했으나 최동 동지는 정밀검사를 받아보지 못하고, 경찰병원에서 외상치료 후 5월 20일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구치소로 넘겨진 이후 최동 동지는 수사과정에서부터 계속된 불면에 시달렸다. 그러나 동지는 이를 사소한 증세로 여기고 학생시절의 투옥경험을 살려 운동과 독서로 계획적인 생활을 했다. 한 달 가까이 사회과학 신간서적이나 소설책, 바둑책 등 수십권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그런데 7월초에는 심한 발작과 실어 증세로 보름여 동안 고통을 겪었다.
주체할 수 없는 통증과 함께 자신이 의도하지 않는 말을 하는 등 의식과 행동이 유리된 증세가 뒤따랐다. 이같은 증세는 구치소 의무과에서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이후 나타났다고한다. 그 때문에 최동 동지는 자신의 불면증, 실어증이 단순한 심리적 불안상태가 아닌 약물 투여에서 비롯되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약물투여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가족들이 특별면회를 했을 때 동지는 “눈만 껌벅이고 말을 못했으며, 가끔 입을 강제로 벌리고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고 전한다.
책이나 신문을 전혀 못보는 등 증세가 악화됨에 따라 종로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외래진료를 받은 결과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세’라는 진단이 나왔다. 비정상적인 정신상태 하에서도 재판은 진행되었다.
최동 동지는 재판정에서 동료들에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무비 카메라로 감시를 당하고 있다” , “수용 중인 독방에 분말가스가 투여된다” , “내 몸에 AIDS균을 감염시켰다”는 발언을 하는 등 심한 피해의식 상태에 빠져있었다. 동지는 심리과정에서는 거의 한마디도 못했다.
9월 18일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가 결정되자 “이건 음모다. 이들은 또 나를 이용하려 한다”며 극도의 공포에 떨었다. 출소 이후 최동 동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11월부터 1월까지 종로 신경정신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수전증, 기억력 감퇴까지 뒤따랐다. 동지의 모든 사고는 “자기가 탄압받은 것을 알아달라” “적들이 나를 무능력하게 만들었다”는 데 집중되었다.
마침내 4월28일에는 부천 중동에 자취방을 얻어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한다. 최동 동지가 부천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것에 대해 동료들은 자신이 활동했던 노동현장에의 ‘귀소본능’이라고 여긴다.
동지는 적십자 병원에서 퇴원한 후 다소 차분한 상태를 유지했다. 인노회 동료들을 만나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진상을 밝혀줄 것을 호소했다. ‘천인공노할 치안본부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동지는 건강이 좋아져야 자신의 억울함을 폭로할 수 있다며 수영장을 다니거나 인근 뒷산, 한양대로 산책을 다니며 건강회복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호전될 기미를 보이던 최동 동지는 분신하기 얼마전부터는 상태가 다시 악화되는 듯 했다. 동지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내가 구속되기 전에는 괜찮았다” “지금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간다” “치본 들어간 이후 내 몸이 망가졌다”며 하소연했다. 동지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어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아마도 이 점이 최동 동지가 죽음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최동 동지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누구도 한마디로 단언하지는 못한다. 치안본부는 “구타 등 가혹행위는 절대 없었다”고 강변했다. 최동 동지의 담당 변호사 역시 육체적인 가혹행위에 대해선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최동 동지가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과정에서 병을 얻었다는 사실이며 잠 안재우기 등의 정신적 고문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최동 동지의 어머니는 “아들이 구속 이후 한 달만에 백 팔십도로 바뀐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옛날의 우리 동이가 아니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지 상상을 못하겠어요. 반드시 죽음에 대한 진상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80년부터 10년간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해온 최동 동지. 그의 죽음은 도덕적으로 승리하는 길을 선택한 이 시대의 양심적인 사람에게 가해진 부도덕한 정권의 핍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최동 동지의 죽음이 결코 패배적인 발상이 아님을 박형규 목사는 장례식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지배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굴복하며 살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의에 맞설 힘이 없었던 최동 동지는 무릎을 꿇기 보다는 마지막 싸움의 무기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