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만(당시 24세)
1964년 12월 전북 김제군 출생
19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1983년 재수 당시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 민속 연구회 가입
1984년 서울대 자연대 화학과 입학, 2학기 휴학
1985년 2월 군입대
1985년 12월 구로구청 항쟁시 구류 10일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30분.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에서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
내자’는 구호를 외치고 할복, 투신, 오후 7시 30분 운명
1983년 전주 해성고 졸업
1983년 재수 당시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 민속 연구회 가입
1984년 서울대 자연대 화학과 입학, 2학기 휴학
1985년 2월 군입대
1985년 12월 구로구청 항쟁시 구류 10일
가톨릭 민속연구회 회장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30분. 명동성당내 교육관 옥상에서 ‘양심수 석방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
내자’는 구호를 외치고 할복, 투신, 오후 7시 30분 운명
광주항쟁 8주기를 맞이하는 지난 88년 5월15일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당시 명동 천주교회 청년단체 연합회(명청연) 소속 가톨릭 민속연구회장이었던 조성만 동지가 할복, 투신했다.
조성만 동지는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오후 3시30분 무렵 교육관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분단상황 고착화하는 미제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 개최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5장의 자필 유서를 뿌리고 자신의 배를 찌른 뒤 거꾸로 투신했다. 조성만 동지는 투신 후 즉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투신때 입은 두개골 손상으로 인해 오후 4시30분 뇌사상태에 빠져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가슴에 맺힌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7시30분 끝내 운명하였다. 그의 유서에는 “도대체 누가 반민족적이고 도대체 애국하는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 우리는 우선 아무 거리낌없이 선입견을 버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합니다.”고 적어 이후에 일어난 통일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계기를 자신의 죽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 동지를 생각하며 - ‘故 조성만(요셉)형제의 죽음 앞에서’ 중에서
어느 한구석 성한 곳이 없는 사회,
스물 다섯 살의 푸르디푸른 젊음은 이에 슬퍼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이 땅과 민족을 사랑했기에 그는 온 몸으로 불의를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조성만 형제의 죽음 속에서 아직도 광주는 계속되고 있으며,
그 십자가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봅니다.
그 십자가 행렬에 종지부를 찍지 않고는 결코 민주화되지 못함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다시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고개숙여 반성하면서
수많은 민주영령과 故 조성만(요셉) 형제의 죽음을 헛되이 아니하고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향한 진군에 힘차게 떨쳐 일어날 것을 결의합니다.
다시 한번 故 조성만(요셉) 형제의 가족에게 주님의 평화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1988년 5월 15일, 명동천주교회청년단체연합회,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조성만 동지는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오후 3시30분 무렵 교육관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분단상황 고착화하는 미제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 개최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5장의 자필 유서를 뿌리고 자신의 배를 찌른 뒤 거꾸로 투신했다. 조성만 동지는 투신 후 즉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투신때 입은 두개골 손상으로 인해 오후 4시30분 뇌사상태에 빠져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가슴에 맺힌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 채 7시30분 끝내 운명하였다. 그의 유서에는 “도대체 누가 반민족적이고 도대체 애국하는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현실, 우리는 우선 아무 거리낌없이 선입견을 버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야 합니다.”고 적어 이후에 일어난 통일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계기를 자신의 죽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 동지를 생각하며 - ‘故 조성만(요셉)형제의 죽음 앞에서’ 중에서
어느 한구석 성한 곳이 없는 사회,
스물 다섯 살의 푸르디푸른 젊음은 이에 슬퍼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이 땅과 민족을 사랑했기에 그는 온 몸으로 불의를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조성만 형제의 죽음 속에서 아직도 광주는 계속되고 있으며,
그 십자가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봅니다.
그 십자가 행렬에 종지부를 찍지 않고는 결코 민주화되지 못함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다시금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고개숙여 반성하면서
수많은 민주영령과 故 조성만(요셉) 형제의 죽음을 헛되이 아니하고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을 향한 진군에 힘차게 떨쳐 일어날 것을 결의합니다.
다시 한번 故 조성만(요셉) 형제의 가족에게 주님의 평화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1988년 5월 15일, 명동천주교회청년단체연합회,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