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문
1934년 경북 의성군 옥산면 전흥동 출생.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60년 통일민주청년동맹 맹원, 대구일보 정치부 기자
1961~4년 민족일보,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 겸 대변인, 경북대구협회 선전부장
1974년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도피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1981년 11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
1960년 통일민주청년동맹 맹원, 대구일보 정치부 기자
1961~4년 민족일보,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기자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 겸 대변인, 경북대구협회 선전부장
1974년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도피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1981년 11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
동지는 청년시절, 대구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4월혁명 공간 속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혁신운동, 통일운동을 하였다. 1961년 2월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였으나, 5·16쿠데타로 ‘민족일보’는 폐간되었다. 이후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박정희 유신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의 운영위원과 대변인을 역임하며 민족민주운동에 헌신하였다. 유신 이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수배를 받아 피신생활을 하면서,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서기로서 4년 가까운 기간을 민족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항쟁이 부산과 마산 등에서 솟구쳤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와중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 중 5·18 광주항쟁 소식을 접하고, 학살에 대한 항의단식을 하였으며, 고문과 단식 후유증으로 발병하였으나, 전두환 정권이 치료를 불허하여, 1981년 옥중에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