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동(당시 21세)
1966년 4월 전남 광주 출생
1985년 2월 숭일고 졸업
1985년 3월 전남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
1987년 1월 휴학, 입대, 육군 군수사령부 제9탄약창 경비중대 배치
1987년 6월 15일 총격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5년 2월 숭일고 졸업
1985년 3월 전남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입학, 학생운동에 헌신
1987년 1월 휴학, 입대, 육군 군수사령부 제9탄약창 경비중대 배치
1987년 6월 15일 총격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7년 6월18일 수사관 정친화 상사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당일 일정이 09:00-10:00까지 5분 대기조, 11:30분까지 휴식 후 점심을 먹고, 오후에 충정교육이 있어 집합을 시켜보니 이이동이 없었고 이이동의 개인화기가 없는 걸 확인하고 부대앞을 수색했고, 다시 뒷산으로 수색대가 나가다가 방위병 봉금점이 부대 후문앞 묘에서 “이이동”하고 부르자 500미터 떨어진 산속에서 총성이 들리고 7-8분 후에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숨을 거두었다고 했는데, 먼저 중대원 32명이 같이 식사를 하는 곳에서 점심시간내 이이동이 없는 것을 못보았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다. 더구나 총까지 들고 나갔는데...
특히 놀라운 것은 권영고 소령과 방호윤 군의관의 진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권소령은 87년 6월15일 밤(사건당일) 가족이 도착한 마산 육군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때 현장에 가보니 이이동이 숨을 헐떡이고 있더라. 그래서 부둥켜 안고 ‘이동아’하고 불렀다”라고 했다. 방호윤은 현장검증이 있고나서 영안실에 갔을 때 “그때 가보니 시체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봉금점이 현장에 도착한 이후에 권영교와 방효윤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고 분명히 진술해 놓고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다른 얘기를 했다. 이러한 군수사 당국의 발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의문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88년 2월 2일 24:00 노용인(동향인 전남장흥, 87년 3월 29사단 상사로 정년 퇴임. 부대근처 마을 통장)을 만나 노용인과 동료였던 이계수(현 보안대 근무)를 통해 그가 알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용인의 말에 따르면, 이군의 부친이 이계수에게 알아본 결과 이계수의 사정상 직접 나서서 조사하지는 못하고 최초 목격자 봉금점 방위병과 이이동과 가장 친한 동기동료 이인택 일등병을 보안대로 불러 심중을 떠보니 “자살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12시와 1시 사이에 산에 올라 간 적이 없다”(즉 점심시간에 같이 있었다는 말이 됨)고 했다(이에 대한 내용은 녹음되어 있다)
김상원(당시 병장) 말에 따르면 당일(87년 6월 15일) 오전에 10:30까지 5분대기조를 마치고 1시간 휴식 후 점심을 먹고 14:00부터 충정교육을 실시했는데 조금제 대위(경비 2중대 중대장)가 강연을 하고 나서 “대학생이 데모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사람 나와라”했는데 아무도 나가지 않자 이이동 동지를 지목하여 이야기하라고 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 조금제 대위가 분개해서 주먹으로 우측 눈두덩이를 구타, 안경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고 다시 부동자세로 서있는 이이동 동지의 낭심을 군화발로 구타 실신하자 중대원 중 1인이 이이동 동지를 업어 내무반으로 옮겨 한참 후 의식이 회복되고 아프다고 소리치며 고통스럽게 내무반에서 뒹구니까 조금제 대위가 이윤일(행정병, 병장)을 시켜 업고 중대장이 뒤를 따라 나갔고 그후 28분 정도 지나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가족이 알아낸 사고경위
군수사당국이 밝힌 사고 경위에 따르면 이이동은 불행한 가정환경을 비관, 자살키로 마음먹었다 하나 이는 얼토당토 않는 일이다. 그것은 첫째로, 이이동 동지는 설혹 가정 환경이 불행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비관하고 혐오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인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이동 동지의 대학 친구들의 진술과 그의 편지 등에서 잘 알 수 있다.
둘째로, 이이동 동지가 가정환경을 비관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가정환경은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므로 자살을 마음 먹으려면 직접적인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계기가 없다. 이는 사고 전 마지막 접견 때 보여준 이이동 동지의 활기찬 모습과 누나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잘 나타나고 특히 군수사당국이 마땅한 계기를 찾지 못하자 애인관계 운운했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의문점
① 이이동 동지의 사망원인이 되었던 미지의 총상에 관한 의문.
당국의 발표는 ‘사입구 직경 3센티, 길이 5,7,12센티, 사출구 직경 4센티’라 했다. 그러나, 사진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이이동 동지의 총상은 사입구가 사출구보다 눈에 띄게 크다. 사입구는 상처부위보다 총길이 12센티, 사입구 직경 8센티이고 사출구는 상처부위가 총길이 5센티, 사출구 직경 3센티이다.
이는 상식에 어긋난 총상이다. 사입구와 사출구가 바뀌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총기 엠16의 경우는 총알이 회전하면서 전진하기 때문에 항상 사출구가 사입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군당국의 발표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맞추는 인상이 짙다.
② 이이동 동지의 사망 현장에서 엠16 총기의 위치에 관한 의문.
최초의 증인 봉금점에 따르면 총기는 상자의 바깥쪽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총기가 처음에는 상자의 바깥쪽에 놓여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사체에 가까운 안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총기가 상자의 바깥쪽에 있으면 사망자가 총으로 자살을 한 후에 거리가 떨어진 상자의 바깥쪽에 총을 놓을 수가 도저히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중에 의도적으로 위치를 변화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나중에 옮겨진 총기의 위치도 사망자가 총기로 머리를 쏘고 총기를 두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③ 이이동 동지의 앞에 놓여 있는 상자(앞서 말한 총기가 놓여 있는 상자)의 상태가 사진의 경우 서로 다르다는 것.
첫번째 사진의 경우에는 상자가 뚜껑이 덮여 있고 총기도 상자와 직각으로 놓여 있다. 그러나, 두번째 사진의 경우에는 상자의 뚜껑이 열려 있고 내용물이 나와 있으며 총구가 이이동 동지의 머리 부분을 향하고 있다. 두 가지 사진중에 어느것 하나는 사실이 아니다.
④ 군당국에서 주장하는 ‘자살 가능한 방법’의 경우에 관한 의문.
군당국에서 ‘총구를 우측 두부에 밀착시켜 격발 발사되므로’라고 하였다. 그리고 ‘엠16소총의 길이와 총구에서 방아쇠까지의 길이 등을 볼 때 이이동 이병의 신장이 172센티미터, 팔길이가 92센티미터 정도이며 총기를 상자위에 놓고 총구를 머리에 밀착시킨 후 우측 엄지 손가락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군당국의 발표중에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은 신장 172센티에 팔길이 92센티이다. 이이동 동지의 신장은 172센티가 맞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사람의 팔길이는 신장의 반에 해당한다. 이이동 동지의 경우는 가슴몸통을 포함하여 86센티가 정상이다. 팔길이 6센티 차이는 매우 크다. 이것은 사망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자세를 가지고 자살한 경우를 만들어 내다보니 그만 팔이 6센티나 커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⑤ 사진에 나오는 총기를 보면 총이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서 이 상태로는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정장치의 ‘안전, 반자동, 자동’ 중에 ‘안전’에 가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당국에서 사고 후 안전으로 옮겼다해도 증거 보존을 위해 찍어둔 사진에는 사실대로 나와 있었어야 한다. 이는 총기의 안전장치에 관한 증거조작의 의심을 살 수 밖에 없다.
⑥ 이이동 동지의 낭심에 붉은 타박상과 우측 주변의 파란 멍, 두정부의 상처에 관한 의문. 가족이 군당국에 제출한 탄원서에 관한 민원 회신에서는 ‘최신 법의학’까지 인용하면서 “음낭은 사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피부 표면이 변하며 타박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군당국이 최신 법의학까지 인용하면서 설명한 것은 겨우 그럴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고 ‘사람이 사망하면 사망이전에 타박상 등 충격을 받은 부위가 가장 먼저 변색한다’는 가장 상식적인 문제에 관하여는 왜 언급이 없는가?
⑦ 다음으로 평소 이이동 동지는 시력이 나빠 안경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였을 정도인데 사건현장에는 안경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이동 동지가 500미터나 되는 산길을 안경없이 갔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⑧ 이이동의 사망 사진은 그 원인이 머리의 관통상이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M16소총으로 쏘았을 때의 총상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2가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 그 첫번째가 파열상이 너무나 적다는 것이며, 그 두번째가 총상 출구가 두개로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권영고 소령과 방호윤 군의관의 진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권소령은 87년 6월15일 밤(사건당일) 가족이 도착한 마산 육군 통합병원 영안실에서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때 현장에 가보니 이이동이 숨을 헐떡이고 있더라. 그래서 부둥켜 안고 ‘이동아’하고 불렀다”라고 했다. 방호윤은 현장검증이 있고나서 영안실에 갔을 때 “그때 가보니 시체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봉금점이 현장에 도착한 이후에 권영교와 방효윤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고 분명히 진술해 놓고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다른 얘기를 했다. 이러한 군수사 당국의 발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의문점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88년 2월 2일 24:00 노용인(동향인 전남장흥, 87년 3월 29사단 상사로 정년 퇴임. 부대근처 마을 통장)을 만나 노용인과 동료였던 이계수(현 보안대 근무)를 통해 그가 알고 있는 사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용인의 말에 따르면, 이군의 부친이 이계수에게 알아본 결과 이계수의 사정상 직접 나서서 조사하지는 못하고 최초 목격자 봉금점 방위병과 이이동과 가장 친한 동기동료 이인택 일등병을 보안대로 불러 심중을 떠보니 “자살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12시와 1시 사이에 산에 올라 간 적이 없다”(즉 점심시간에 같이 있었다는 말이 됨)고 했다(이에 대한 내용은 녹음되어 있다)
김상원(당시 병장) 말에 따르면 당일(87년 6월 15일) 오전에 10:30까지 5분대기조를 마치고 1시간 휴식 후 점심을 먹고 14:00부터 충정교육을 실시했는데 조금제 대위(경비 2중대 중대장)가 강연을 하고 나서 “대학생이 데모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사람 나와라”했는데 아무도 나가지 않자 이이동 동지를 지목하여 이야기하라고 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 조금제 대위가 분개해서 주먹으로 우측 눈두덩이를 구타, 안경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고 다시 부동자세로 서있는 이이동 동지의 낭심을 군화발로 구타 실신하자 중대원 중 1인이 이이동 동지를 업어 내무반으로 옮겨 한참 후 의식이 회복되고 아프다고 소리치며 고통스럽게 내무반에서 뒹구니까 조금제 대위가 이윤일(행정병, 병장)을 시켜 업고 중대장이 뒤를 따라 나갔고 그후 28분 정도 지나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가족이 알아낸 사고경위
군수사당국이 밝힌 사고 경위에 따르면 이이동은 불행한 가정환경을 비관, 자살키로 마음먹었다 하나 이는 얼토당토 않는 일이다. 그것은 첫째로, 이이동 동지는 설혹 가정 환경이 불행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비관하고 혐오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해 나가는 진취적인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이동 동지의 대학 친구들의 진술과 그의 편지 등에서 잘 알 수 있다.
둘째로, 이이동 동지가 가정환경을 비관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가정환경은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므로 자살을 마음 먹으려면 직접적인 계기가 있어야 하는데 계기가 없다. 이는 사고 전 마지막 접견 때 보여준 이이동 동지의 활기찬 모습과 누나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잘 나타나고 특히 군수사당국이 마땅한 계기를 찾지 못하자 애인관계 운운했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의문점
① 이이동 동지의 사망원인이 되었던 미지의 총상에 관한 의문.
당국의 발표는 ‘사입구 직경 3센티, 길이 5,7,12센티, 사출구 직경 4센티’라 했다. 그러나, 사진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이이동 동지의 총상은 사입구가 사출구보다 눈에 띄게 크다. 사입구는 상처부위보다 총길이 12센티, 사입구 직경 8센티이고 사출구는 상처부위가 총길이 5센티, 사출구 직경 3센티이다.
이는 상식에 어긋난 총상이다. 사입구와 사출구가 바뀌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총기 엠16의 경우는 총알이 회전하면서 전진하기 때문에 항상 사출구가 사입구보다 크기 때문이다. 군당국의 발표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맞추는 인상이 짙다.
② 이이동 동지의 사망 현장에서 엠16 총기의 위치에 관한 의문.
최초의 증인 봉금점에 따르면 총기는 상자의 바깥쪽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총기가 처음에는 상자의 바깥쪽에 놓여 있다가 누군가에 의해 사체에 가까운 안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총기가 상자의 바깥쪽에 있으면 사망자가 총으로 자살을 한 후에 거리가 떨어진 상자의 바깥쪽에 총을 놓을 수가 도저히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중에 의도적으로 위치를 변화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여기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나중에 옮겨진 총기의 위치도 사망자가 총기로 머리를 쏘고 총기를 두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③ 이이동 동지의 앞에 놓여 있는 상자(앞서 말한 총기가 놓여 있는 상자)의 상태가 사진의 경우 서로 다르다는 것.
첫번째 사진의 경우에는 상자가 뚜껑이 덮여 있고 총기도 상자와 직각으로 놓여 있다. 그러나, 두번째 사진의 경우에는 상자의 뚜껑이 열려 있고 내용물이 나와 있으며 총구가 이이동 동지의 머리 부분을 향하고 있다. 두 가지 사진중에 어느것 하나는 사실이 아니다.
④ 군당국에서 주장하는 ‘자살 가능한 방법’의 경우에 관한 의문.
군당국에서 ‘총구를 우측 두부에 밀착시켜 격발 발사되므로’라고 하였다. 그리고 ‘엠16소총의 길이와 총구에서 방아쇠까지의 길이 등을 볼 때 이이동 이병의 신장이 172센티미터, 팔길이가 92센티미터 정도이며 총기를 상자위에 놓고 총구를 머리에 밀착시킨 후 우측 엄지 손가락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군당국의 발표중에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은 신장 172센티에 팔길이 92센티이다. 이이동 동지의 신장은 172센티가 맞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사람의 팔길이는 신장의 반에 해당한다. 이이동 동지의 경우는 가슴몸통을 포함하여 86센티가 정상이다. 팔길이 6센티 차이는 매우 크다. 이것은 사망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자세를 가지고 자살한 경우를 만들어 내다보니 그만 팔이 6센티나 커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⑤ 사진에 나오는 총기를 보면 총이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서 이 상태로는 총알이 발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정장치의 ‘안전, 반자동, 자동’ 중에 ‘안전’에 가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당국에서 사고 후 안전으로 옮겼다해도 증거 보존을 위해 찍어둔 사진에는 사실대로 나와 있었어야 한다. 이는 총기의 안전장치에 관한 증거조작의 의심을 살 수 밖에 없다.
⑥ 이이동 동지의 낭심에 붉은 타박상과 우측 주변의 파란 멍, 두정부의 상처에 관한 의문. 가족이 군당국에 제출한 탄원서에 관한 민원 회신에서는 ‘최신 법의학’까지 인용하면서 “음낭은 사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피부 표면이 변하며 타박상을 입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군당국이 최신 법의학까지 인용하면서 설명한 것은 겨우 그럴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고 ‘사람이 사망하면 사망이전에 타박상 등 충격을 받은 부위가 가장 먼저 변색한다’는 가장 상식적인 문제에 관하여는 왜 언급이 없는가?
⑦ 다음으로 평소 이이동 동지는 시력이 나빠 안경 없이는 거동이 불편하였을 정도인데 사건현장에는 안경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이동 동지가 500미터나 되는 산길을 안경없이 갔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⑧ 이이동의 사망 사진은 그 원인이 머리의 관통상이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M16소총으로 쏘았을 때의 총상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2가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있다 그 첫번째가 파열상이 너무나 적다는 것이며, 그 두번째가 총상 출구가 두개로 겹쳐져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