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삼(당시 21세)
1966년 부산 당감동에서 출생
1986년 3월 부산전문대 전기과 입학
1986년 12월 16일 논산훈련소 입소입대
1987년 2월 2일 36사단 공병대에 배속
1987년 3월 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6년 3월 부산전문대 전기과 입학
1986년 12월 16일 논산훈련소 입소입대
1987년 2월 2일 36사단 공병대에 배속
1987년 3월 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이승삼 동지는 1986년 12월16일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1987년 2월2일에 강원도 원주에 있는 36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부대배치 연락을 받은 그의 어머니는 2월 16일 잠깐 면회를 하였고, 다시 3월 1일에는 외박을 허락받아 같이 밤을 보냈다. 그런데 헤어진지 이틀후인 3월 3일 저녁 부산에 있는 가족들에게 이승삼 동지의 사망소식이 전해졌다.
헌병대의 조사에 따르면 3월 3일 오후 4시 30분경 부대 잔류병 2명과 저녁 5시에 하기식을 해야 하는데 그가 보이지 않아 다른 사병의 협조로 하기식을 마치고 그를 찾아다녔는데 문이 잠겨있던 중대장실에서 그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발견 당시에 중대장실에서 난로옆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는데 머리를 젖히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으며, 머리와 바닥에는 피가 흔건하였고 이미 죽은 상태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헌병대는 그가 자살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 근거로 이승삼 동지의 묵주반지가 난로위에 있었고, 담배꽁초 3개가 있었으며, 총은 난로 옆에 놓여 있었고, 반항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삼 동지의 아버지 이두형씨는 사람이 자살하기 위해서는 긴박한 강박감이나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자살로 단정한 헌병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헌병대는 애인 관계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침 구보시 동료의 부축을 받은 것이 심리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총알에 대해서는 2월 23일 주간 사격과 야간 사격시 실탄을 숨겨가지고 있다가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두형씨는 탄피가 한 개라도 없어지면 부대원 전원이 동원되어 그것을 찾아내곤 하는 부대관행을 알고 있었고, 헌병대가 말하는 자살 동기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두형씨는 말단 수사관의 수사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고 대통령,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헌병감, 여야당수 등 에게 계속하여 탄원서를 보냈다. 답장이 오면 부족한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보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몇가지 사실이 더 드러났다.
특히 이승삼 동지가 부대생활에서 선배 사병으로부터 많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돈을 빌려달라기도 하고 매점에서 무엇을 사달라고 하기도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적인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던 3월 3일에는 종일 밥도 주지않고 세탁하라, 총기반납하라고 괴롭혔으며 초소 근무도 4시간이나 시켰다. 특히 최규권 일병은 그가 군가를 암기하지 못한다고 기합을 주었으며, 안면을 구타하여 안경알이 박살나고 안경 유리가 눈알에 박혔으며 앞니가 4개나 부러진 사실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가 자살했다는 수사결과는 변동이 없었다. 그래서 이두형씨는 계속하여 탄원서를 발송하여 해명을 요구하였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두형씨가 여전히 자살사실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살동기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눈에 안경알이 깨어져 박혀 있고 앞니가 4개나 부러진 정도의 상처를 입었는데도 의무실에 가지 않고 중대장실에 혼자 찾아가 따뜻한 난로옆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으면 기지개를 펴듯 사지를 펴고 죽는 것이 일반적이고, 앉아서 죽는 것은 극소수 수도승이나 동사자 등에서나 발견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마지막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눈에는 안경알이 깨어져 박혀있고 앞니가 4개나 부러져 나간 사람이 실탄을 사격장에서 주워다가 자기목에 쏘았다면 폭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총은 난로 옆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승삼 동지는 M16소총으로 자기 목에 두발을 쏜 뒤 총을 난로 옆에 세워두고 난로가에 앉아 사망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외 사격장에서 실탄을 몰래 주워두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승삼 동지는 누군가에 의해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아들의 타살이 자살로 조작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헌병대의 조사에 따르면 3월 3일 오후 4시 30분경 부대 잔류병 2명과 저녁 5시에 하기식을 해야 하는데 그가 보이지 않아 다른 사병의 협조로 하기식을 마치고 그를 찾아다녔는데 문이 잠겨있던 중대장실에서 그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발견 당시에 중대장실에서 난로옆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는데 머리를 젖히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으며, 머리와 바닥에는 피가 흔건하였고 이미 죽은 상태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헌병대는 그가 자살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 근거로 이승삼 동지의 묵주반지가 난로위에 있었고, 담배꽁초 3개가 있었으며, 총은 난로 옆에 놓여 있었고, 반항의 흔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삼 동지의 아버지 이두형씨는 사람이 자살하기 위해서는 긴박한 강박감이나 감당키 어려운 고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자살로 단정한 헌병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헌병대는 애인 관계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침 구보시 동료의 부축을 받은 것이 심리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총알에 대해서는 2월 23일 주간 사격과 야간 사격시 실탄을 숨겨가지고 있다가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두형씨는 탄피가 한 개라도 없어지면 부대원 전원이 동원되어 그것을 찾아내곤 하는 부대관행을 알고 있었고, 헌병대가 말하는 자살 동기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두형씨는 말단 수사관의 수사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고 대통령, 국방부장관, 육군참모총장, 헌병감, 여야당수 등 에게 계속하여 탄원서를 보냈다. 답장이 오면 부족한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보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몇가지 사실이 더 드러났다.
특히 이승삼 동지가 부대생활에서 선배 사병으로부터 많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돈을 빌려달라기도 하고 매점에서 무엇을 사달라고 하기도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단적인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던 3월 3일에는 종일 밥도 주지않고 세탁하라, 총기반납하라고 괴롭혔으며 초소 근무도 4시간이나 시켰다. 특히 최규권 일병은 그가 군가를 암기하지 못한다고 기합을 주었으며, 안면을 구타하여 안경알이 박살나고 안경 유리가 눈알에 박혔으며 앞니가 4개나 부러진 사실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가 자살했다는 수사결과는 변동이 없었다. 그래서 이두형씨는 계속하여 탄원서를 발송하여 해명을 요구하였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이두형씨가 여전히 자살사실을 납득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살동기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눈에 안경알이 깨어져 박혀 있고 앞니가 4개나 부러진 정도의 상처를 입었는데도 의무실에 가지 않고 중대장실에 혼자 찾아가 따뜻한 난로옆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으면 기지개를 펴듯 사지를 펴고 죽는 것이 일반적이고, 앉아서 죽는 것은 극소수 수도승이나 동사자 등에서나 발견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마지막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눈에는 안경알이 깨어져 박혀있고 앞니가 4개나 부러져 나간 사람이 실탄을 사격장에서 주워다가 자기목에 쏘았다면 폭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총은 난로 옆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승삼 동지는 M16소총으로 자기 목에 두발을 쏜 뒤 총을 난로 옆에 세워두고 난로가에 앉아 사망하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외 사격장에서 실탄을 몰래 주워두었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이승삼 동지는 누군가에 의해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아들의 타살이 자살로 조작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