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남(당시 30세)
1959년 전남 신안군 비금면에서 출생
1984년 10월 1일 현대 엔진 공업에 입사, 상기철구 공장 기능직 사원으로 근무
1987년 9월 12일 현대중공업 구사대 차량에 깔려 중상
1989년 5월 16일 612일간의 사투끝에 운명
1984년 10월 1일 현대 엔진 공업에 입사, 상기철구 공장 기능직 사원으로 근무
1987년 9월 12일 현대중공업 구사대 차량에 깔려 중상
1989년 5월 16일 612일간의 사투끝에 운명
87년 9월12일 현대 중공업 노조 임원 개선 명령 움직임에 대하여 그룹 노조 협의회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현대 중공업 민주노조 총무부장 김형권씨가 노동자들에게 발표한 성명서를 복사하기 위해 엔진 노조사무실에 왔다.
이때 백색 승용차 3대와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온 정체 불명의 괴한 30여명이 현대 중공업 경비대장 조남길을 선두로 엔진 노조 사무실에 무력으로 집단 난입하여 김형권씨를 무차별 폭행하며 봉고차에 밀어 넣자 노조 사무실에 있던 임원들이 봉고차를 막고 저지시키려 했다. 휴식시간을 갖고 있던 이상남 동지와 다수가 이에 합세하였다. 여러 사람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봉고차는 그냥 전진했으며 이 와중에 동지는 차 앞바퀴에 머리와 대퇴부가 5m를 질질 끌려가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년 8개월의 긴 투병기간 중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동지를 생각하며
결코 잊지못한 그 날의 분노 뇌새기며 - 이상남 동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감싸안고
(현대 중공업 노동조합 사보에서 97년 5월호)
이상남 동지여! 당신이 구사대 폭력(차량 테러)에 의해 온 몸이 으스러지던 때가 엊그제인 듯 기역에 생생한데 손으로 꼽아보니 햇수로 10년이 되었구려. 온 몸이 으스러져 612일 동안 기나긴 투병생활한 보람도 없이 끝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언 8년의 세월이 흘렀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누군가 말했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잊혀져가는 당신의 그림자가 아쉬워 동지의 이름 불러 본다오.
사고 당시 스물아홉의 총각으로 결혼을 앞둔 당신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일곱 형제들과 지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잘 살아보려 했지요. 악몽같은 그날 못 본 척 지나칠수도 있었을 일을 당신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여 살인 무기가 되어버린 봉고차를 가로막았지요.
87년 9월12일, 이상남 동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은 현대엔진 노조사무실 앞에서 일어났다.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에 앞장섰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기대한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그 힘으로 현대그룹과 그룹노조 협의회는 9월 1일까지 임금협상을 끝내기로 합의했으나, 협상시한을 넘기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2만여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20여Km를 걸어 시청앞까지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뜻모를 시청 방화사건에 휘말려 공권력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노조 상집간부가 구속되고, 다행히 피해있던 현중노조 총무부장 김형권씨가 조합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항의집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회사와 경찰은 현중노조 총무부장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었다. 뜨거운 동지애로 구속자 석방을 외치는 중공업 노동자들의 쟁의를 지원하기 위해 87년 9월 12일 오후 3시 현대엔진 노조 사무실에서 노조 협의회 모임이 있었다. (현중노조 임원개선명령에 대한 대책회의)
이때 성명서 발표를 위해 복사하러 온 현중노조 총무부장을 잡기 위해 정체불명의 괴한 25~30명이 흰색 승용차 3대와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나타났다.
엔진 노조 사무실로 들이닥쳐 현중노조 총무부장을 무차별 폭행하여 실신케 한 뒤 끌고나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밀어넣고 팔을 비튼채 집단 폭행하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이에 엔진노조 임원들이 봉고차의 앞을 가로막고 있자, 15시에 쉬고있던 산기철구 이상남 조합원과 여러명의 조합원이 합세했다.
여러사람의 저지에도 봉고차는 미친 듯 계속 앞으로 나가려 하였고, 이상남 동지가 봉고차 앞면에 들이받치면서 쓰러졌다.
“사람이 깔렸다. 세워라.”고 여러사람이 외쳤으나 “밀어부쳐”라는 구사대 지휘자의 명령에 이상남 동지의 대퇴부가 앞바퀴에 낀채 5m가량 끌려가 온 몸이 으스러졌다.
실로 생각하기조차 몸서리치는 순간이었다.
이때 200여명의 엔진 조합원이 몰려오자 괴한들은 봉고차를 버리고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도망쳤고, 분노한 조합원들은 조남길을 포함한 7명의 구사대를 붙잡아 조합사무실에 넘겼다.
괴한들의 정체를 추궁한 결과, 7명 모두 중공업 총무부소속으로 상부의 명령을 받고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엔진 노조쪽은 곧바로 이상남 동지를 해성병원으로 옮겨 긴급 치료를 받게 했으나 6주의 진단을 내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금이가도 6주 진단이 나오는데 온 몸이 으깨어진 중환자 진단이 겨우 6주라니.......
가진자의 편에 빌붙어 인간의 기본 양심마저 펄아 처먹는 썩은 사회의 한 단면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노동자는 없었다.
그러자 가족쪽에서 “이런 해성병원은 믿을 수 없다”며 9월14일 동강병원 1002호에 입원을 시켰으나, 그곳역시 처음 내려진 진단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6주의 진단을 내렸다.
사람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고 올바른 의술을 펼쳐야 할 병원이 가진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이 사회의 모순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다.
차량테러 구사대는 활개치고 엔진 조합원들에게 붙잡힌 7명의 구사대는 곧 경찰에 넘겨졌으나, 다음날 모두 풀려났고, 진두 지휘자 조남길은 20일 후 ‘경찰의 날’에 모범 시민상을 받았다.
환한 대낮에 죄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차로 사람을 깔아뭉개 죽이려 한 인간이 모범 시민이라니......
또한 겸찰은 봉고차 운전사 배무한씨에 대해 단순 교통사고로써 고의가 없다고하여 불기소 처분했다. 이에 불복한 이상남 동지는 형법 254조의 ‘살인 미수죄’나 ‘폭력행위에 관한 법률위반죄’를 적용하여 처벌해 달라는 항고를 냈으나 기각됐다.
또 배후조종자로 짐작되었던 회사쪽 총무과장은 뒷날 2. 21 식칼 테러를 앞장서 지휘하면서 각목을 들고 파업 노동자를 쫓아가는 모습이 포스터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때 백색 승용차 3대와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온 정체 불명의 괴한 30여명이 현대 중공업 경비대장 조남길을 선두로 엔진 노조 사무실에 무력으로 집단 난입하여 김형권씨를 무차별 폭행하며 봉고차에 밀어 넣자 노조 사무실에 있던 임원들이 봉고차를 막고 저지시키려 했다. 휴식시간을 갖고 있던 이상남 동지와 다수가 이에 합세하였다. 여러 사람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봉고차는 그냥 전진했으며 이 와중에 동지는 차 앞바퀴에 머리와 대퇴부가 5m를 질질 끌려가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년 8개월의 긴 투병기간 중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동지를 생각하며
결코 잊지못한 그 날의 분노 뇌새기며 - 이상남 동지를 뜨거운 가슴으로 감싸안고
(현대 중공업 노동조합 사보에서 97년 5월호)
이상남 동지여! 당신이 구사대 폭력(차량 테러)에 의해 온 몸이 으스러지던 때가 엊그제인 듯 기역에 생생한데 손으로 꼽아보니 햇수로 10년이 되었구려. 온 몸이 으스러져 612일 동안 기나긴 투병생활한 보람도 없이 끝내 우리 곁을 떠난 지 어언 8년의 세월이 흘렀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누군가 말했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잊혀져가는 당신의 그림자가 아쉬워 동지의 이름 불러 본다오.
사고 당시 스물아홉의 총각으로 결혼을 앞둔 당신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일곱 형제들과 지내면서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여 잘 살아보려 했지요. 악몽같은 그날 못 본 척 지나칠수도 있었을 일을 당신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여 살인 무기가 되어버린 봉고차를 가로막았지요.
87년 9월12일, 이상남 동지를 죽음으로 몰고간 사건은 현대엔진 노조사무실 앞에서 일어났다.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에 앞장섰던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기대한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그 힘으로 현대그룹과 그룹노조 협의회는 9월 1일까지 임금협상을 끝내기로 합의했으나, 협상시한을 넘기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2만여명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20여Km를 걸어 시청앞까지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뜻모를 시청 방화사건에 휘말려 공권력의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노조 상집간부가 구속되고, 다행히 피해있던 현중노조 총무부장 김형권씨가 조합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항의집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당연히 회사와 경찰은 현중노조 총무부장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었다. 뜨거운 동지애로 구속자 석방을 외치는 중공업 노동자들의 쟁의를 지원하기 위해 87년 9월 12일 오후 3시 현대엔진 노조 사무실에서 노조 협의회 모임이 있었다. (현중노조 임원개선명령에 대한 대책회의)
이때 성명서 발표를 위해 복사하러 온 현중노조 총무부장을 잡기 위해 정체불명의 괴한 25~30명이 흰색 승용차 3대와 12인승 봉고차를 타고 나타났다.
엔진 노조 사무실로 들이닥쳐 현중노조 총무부장을 무차별 폭행하여 실신케 한 뒤 끌고나가 기다리고 있던 봉고차에 밀어넣고 팔을 비튼채 집단 폭행하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이에 엔진노조 임원들이 봉고차의 앞을 가로막고 있자, 15시에 쉬고있던 산기철구 이상남 조합원과 여러명의 조합원이 합세했다.
여러사람의 저지에도 봉고차는 미친 듯 계속 앞으로 나가려 하였고, 이상남 동지가 봉고차 앞면에 들이받치면서 쓰러졌다.
“사람이 깔렸다. 세워라.”고 여러사람이 외쳤으나 “밀어부쳐”라는 구사대 지휘자의 명령에 이상남 동지의 대퇴부가 앞바퀴에 낀채 5m가량 끌려가 온 몸이 으스러졌다.
실로 생각하기조차 몸서리치는 순간이었다.
이때 200여명의 엔진 조합원이 몰려오자 괴한들은 봉고차를 버리고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도망쳤고, 분노한 조합원들은 조남길을 포함한 7명의 구사대를 붙잡아 조합사무실에 넘겼다.
괴한들의 정체를 추궁한 결과, 7명 모두 중공업 총무부소속으로 상부의 명령을 받고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엔진 노조쪽은 곧바로 이상남 동지를 해성병원으로 옮겨 긴급 치료를 받게 했으나 6주의 진단을 내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금이가도 6주 진단이 나오는데 온 몸이 으깨어진 중환자 진단이 겨우 6주라니.......
가진자의 편에 빌붙어 인간의 기본 양심마저 펄아 처먹는 썩은 사회의 한 단면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노동자는 없었다.
그러자 가족쪽에서 “이런 해성병원은 믿을 수 없다”며 9월14일 동강병원 1002호에 입원을 시켰으나, 그곳역시 처음 내려진 진단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이유로 6주의 진단을 내렸다.
사람의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고 올바른 의술을 펼쳐야 할 병원이 가진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이 사회의 모순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다.
차량테러 구사대는 활개치고 엔진 조합원들에게 붙잡힌 7명의 구사대는 곧 경찰에 넘겨졌으나, 다음날 모두 풀려났고, 진두 지휘자 조남길은 20일 후 ‘경찰의 날’에 모범 시민상을 받았다.
환한 대낮에 죄없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그것도 모자라 차로 사람을 깔아뭉개 죽이려 한 인간이 모범 시민이라니......
또한 겸찰은 봉고차 운전사 배무한씨에 대해 단순 교통사고로써 고의가 없다고하여 불기소 처분했다. 이에 불복한 이상남 동지는 형법 254조의 ‘살인 미수죄’나 ‘폭력행위에 관한 법률위반죄’를 적용하여 처벌해 달라는 항고를 냈으나 기각됐다.
또 배후조종자로 짐작되었던 회사쪽 총무과장은 뒷날 2. 21 식칼 테러를 앞장서 지휘하면서 각목을 들고 파업 노동자를 쫓아가는 모습이 포스터로 전국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