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섭(당시 29세)
1958년 충남 아산 출생
1975년 천안 농고 축산과 졸업
아산군 인주면 청년회장 영농후계자 회장역임
1986년 3월 10일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정부의 영농정책에 항의하여 음독
1986년 3월 13일 운명
1975년 천안 농고 축산과 졸업
아산군 인주면 청년회장 영농후계자 회장역임
1986년 3월 10일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정부의 영농정책에 항의하여 음독
1986년 3월 13일 운명
오한섭 동지는 81년 새마을 청소년 경진대회 낙농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축산기술이 뛰어났고, 잘 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던 중 81년 영농후계자 자금 200만원을 받아 한우 9마리를 구입하여 기르다가 83년 겨울, 한우 29마리로 늘려 길렀다. 그러나 당시 전경환 새마을 운동본부에서 외국소와 쇠고기 수입을 하자, 소값이 폭락하였다. 밀리는 사료값을 갚기 위해 큰소 팔아 중소 넣고, 중소 팔아 송아지로, 나중에는 송아지 숫자를 줄여오다가 급기야는 85년 11월에 송아지 14마리를 팔아 밀린 사료값 500만원을 갚자 5마리의 송아지 밖에 남지 않았다. 오한섭 동지는 논밭 한뙤기 없는 처지에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농협 빚 420만원도 갚아야 하고 많은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하는 동지는 영농 후계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다. 농민의 생산결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분개하여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420만원’이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86년 3월 10일 음독하여 3일만에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은 살농정책으로 인한 농촌파탄에 대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대한 항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영농 후계자 오한섭 형제의 죽음은 전 영농후계자의 죽음!
빚더미에 허덕이는 천만 농민의 죽음!
농민형제여 모이자! 고 오한섭 형제 추모식에!
농업희생 정책에 죽음으로써 항거한 오한섭 형제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
유서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빚! 420만원
농협 빚 420만원도 갚아야 하고 많은 가족의 생계도 책임져야하는 동지는 영농 후계자가 된 것을 후회하였다. 농민의 생산결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분개하여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420만원’이라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86년 3월 10일 음독하여 3일만에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은 살농정책으로 인한 농촌파탄에 대한 정부의 영농정책에 대한 항의였다.
동지를 생각하며
영농 후계자 오한섭 형제의 죽음은 전 영농후계자의 죽음!
빚더미에 허덕이는 천만 농민의 죽음!
농민형제여 모이자! 고 오한섭 형제 추모식에!
농업희생 정책에 죽음으로써 항거한 오한섭 형제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
유서
용기, 패기, 사기!
빚! 빚! 빚! 42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