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춘(당시 27세)
1960년 2월 7일 부산에서 출생.
1986년 2월 동아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1986년 3월-87년 3월 주식회사 화승 자재과 근무
1987년 3월 2일 태광고무(주) 무역부 입사.
1987년 6월 18일 6월 민중항쟁의 시위 도중 부산시 좌천동 오버브릿지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
1987년 6월 24일 부산시 봉생병원에서 뇌수술하였으나 운명.
1986년 2월 동아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1986년 3월-87년 3월 주식회사 화승 자재과 근무
1987년 3월 2일 태광고무(주) 무역부 입사.
1987년 6월 18일 6월 민중항쟁의 시위 도중 부산시 좌천동 오버브릿지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
1987년 6월 24일 부산시 봉생병원에서 뇌수술하였으나 운명.
이태춘 동지는 1987년 6월 18일 부산 좌천동 오버브릿지 시위에서 전경들이 다연발탄과 직격탄을 쏜 후 오버브릿지 밑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이날 저녁 좌천동 시위는 6월 항쟁 중 부산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시위였었고, 발견 당시 상황은 행진 중 전면에 있던 경찰이 갑자기 다연발 탄과 총류탄을 난사하였기 때문에 그곳에 밀집하여 있던 사람들이 정신없이 윗쪽으로 피하면서 흩어졌고, 사람들이 떠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등 극도로 혼란스런 상태였다.
시위대가 지나간 뒤, 오선숙씨 등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 4명(남2, 여2)이 지나가는 승용차에 태워서 대연동 재희병원으로 후송했다. 그때 후송했던 시민 오선숙씨의 말에 의하면, 이태춘씨는 눈을 갸냘프게 움직였으나,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옷에 하얀 최루가루가 뿌옇게 묻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연락을 받은 어머니가 병원으로 도착, 이태춘 동지를 만나니, 이태춘 동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찡그리는 듯 하면서 어머님 손을 꽉잡고서는 “최 최…”라는 말을 안간힘을 다하여 하려고 애를 썼으며 병원에 있는 사람들 얘기로는 이태춘 동지가 들어오면서 최루탄 가스냄새가 병원에 굉장했다고 한다.
재희병원의 시설미비로 밤 12시경 다시 봉생병원으로 옮겨 신경외과 김호경과장의 집도하에 뇌수술을 하였으나, 1987년 6월 24일 20:40분경 운명하였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태춘 동지의 증세는 최루탄을 맞고 운명한 연세대 이한열 군과 같다고 수술한 의사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병원 원장은 “태춘이는 최루탄을 맞았다는데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어머님의 말에 화를 발칵내면서 “이 아주머니가 정신이 있나 없나. 지금 빨갱이가 쳐내려 올려는 이때 그런 유언비어를 하고 다니면 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하며, 이상하게 생각한 가족, 친구들이 재희병원으로 가 처음 후송한 사람을 찾아 만나 보기 위해 수납일지를 찾아보니 모두 없애버리고 다시 작성해 놓았으며 후송자들 주소 성명도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뒤에 나타난 후송자는 분명히 수납일지에 적었다고 함.)
87년 6월 25일 부산대 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하였다. 부검결과 직접적 사인은 뇌좌상이었고 오른쪽 이마 윗 부분에서 정수리를 거쳐 후두부까지 20.5cm에 이르는 종방향 두개골 골절이었다. 그외 신체 어느 부위에도 일체의 외상이 없었다.
부검후 22:00경 시신을 연산동 시립 부산의료원 영안실로 안치하였다가 1987년 6월 27일 10:00 범일성당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
시위대가 지나간 뒤, 오선숙씨 등 시위에 참여했던 시민 4명(남2, 여2)이 지나가는 승용차에 태워서 대연동 재희병원으로 후송했다. 그때 후송했던 시민 오선숙씨의 말에 의하면, 이태춘씨는 눈을 갸냘프게 움직였으나,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옷에 하얀 최루가루가 뿌옇게 묻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연락을 받은 어머니가 병원으로 도착, 이태춘 동지를 만나니, 이태춘 동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찡그리는 듯 하면서 어머님 손을 꽉잡고서는 “최 최…”라는 말을 안간힘을 다하여 하려고 애를 썼으며 병원에 있는 사람들 얘기로는 이태춘 동지가 들어오면서 최루탄 가스냄새가 병원에 굉장했다고 한다.
재희병원의 시설미비로 밤 12시경 다시 봉생병원으로 옮겨 신경외과 김호경과장의 집도하에 뇌수술을 하였으나, 1987년 6월 24일 20:40분경 운명하였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태춘 동지의 증세는 최루탄을 맞고 운명한 연세대 이한열 군과 같다고 수술한 의사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병원 원장은 “태춘이는 최루탄을 맞았다는데 어떻게 되겠느냐”고 묻는 어머님의 말에 화를 발칵내면서 “이 아주머니가 정신이 있나 없나. 지금 빨갱이가 쳐내려 올려는 이때 그런 유언비어를 하고 다니면 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하며, 이상하게 생각한 가족, 친구들이 재희병원으로 가 처음 후송한 사람을 찾아 만나 보기 위해 수납일지를 찾아보니 모두 없애버리고 다시 작성해 놓았으며 후송자들 주소 성명도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뒤에 나타난 후송자는 분명히 수납일지에 적었다고 함.)
87년 6월 25일 부산대 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하였다. 부검결과 직접적 사인은 뇌좌상이었고 오른쪽 이마 윗 부분에서 정수리를 거쳐 후두부까지 20.5cm에 이르는 종방향 두개골 골절이었다. 그외 신체 어느 부위에도 일체의 외상이 없었다.
부검후 22:00경 시신을 연산동 시립 부산의료원 영안실로 안치하였다가 1987년 6월 27일 10:00 범일성당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부산본부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