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진(당시 21세)
1967년 3월 16일 경남 함양 출생
1986년 2월 부산 동래고등학교 졸업
1986년 3월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88년 국문과 학술부장 역임
전방 입소거부 투쟁
1988년 8월 10일 방위병 입대
1988년 10월 10일 재료관 5층 난간에서 투신, 운명
- 제 24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1986년 2월 부산 동래고등학교 졸업
1986년 3월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88년 국문과 학술부장 역임
전방 입소거부 투쟁
1988년 8월 10일 방위병 입대
1988년 10월 10일 재료관 5층 난간에서 투신, 운명
- 제 24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양영진 동지는 88년 10월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이땅의 올바른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고민하며, 8월15일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지역 선전부 활동을 가열차게 전개하였고, 갑작스런 군입대로 인해 군의 폭력적 지배 방법, 법적 표현에 미제국주의의 복종, 예속의 한반도 수탈 구조를 실감하고 인간의 뜨거운 피와 순수한 생존 원동력인 열정으로 민족 통일을 조국산하에 뿌리 박기 위해 88년 10월10일 부산대 재료관 옥상에서 “이제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 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고 절규한 후 투신하였다.
추모글
승리의 계절 영진은 <부대문학>을 통해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문학과 운동의 문제를 풀어낸 것 같았다. 5월 대동제 기간에 우리는 전남대의 용봉문학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혁혁한 투쟁 실적을 자랑하던 용봉문학회와 마련한 자리에서 우리는 대중적 문예조직으로 갖는 <부대문학>의 위상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영진은 용봉문학회의 장점과 한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돌아오는 길에 제시하기도 하면서 <부대문학의 조직강화>에 남다른 의욕을 보였다.
5월이 지나간 뒤 우리에게는 조국통일의 6월이 다가왔다. <부대문학>은 조국통일에 조직적으로 임하기 위해 ‘통일시 공동창작’을 중심사업으로 결정한다.
그 때 부산대는 조국통일의 절박성과 사활적 성격을 대중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행한 전 직선 간부들의 단식투쟁과 그에 호응하는 뜻있는 학우들의 동조단식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영진은 해방 정국에 대한 형상화를 통해 학우들에게 분단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의 해결 방도는 무엇인가를 밝혀내자고 역설했다.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을 마치고 난 뒤 <부대문학>은 그 동안의 사업들을 평가하면서 조직강화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다.
그 하나의 방편으로 기관지 발간이 제안되었으며 영진이가 주축이 되었던 <부대문학> 기획팀이 이 사업을 떠맡기로 했다. 영진과 기획팀은 기관지 창간호의 특집으로 한국사회와 문예운동의 역할에 대한 공동논문을 준비하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그 때 구도서관 뒤쪽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영진은 푹푹찌는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수많은 시들을 써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는 항상 피곤에 절은 얼굴이지만 유난히 눈빛만은 생기가 돌았던 게 인상적이다.
집에 계시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칠까봐 쌀이 떨어져 밥을 굶고 있음에도 일언반구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장난스럽게 친구들에게 밥 사달라고 조르는 그의 모습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깊은 상처자국과 같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의 그런 속내를 깊이 짐작해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창고를 개량해서 만든 그의 자취방에는 장마가 들자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었다. 집이 썩어 넘어지든 몸에 곰팡이가 피든 아침 나절 내가 찾아갈 적마다 피곤에 지쳐 곤히 잠든 그의 머리맡에는 밤새 꼬박 적어 갔을 시와 산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기가 일쑤였다.
그의 이처럼 사업을 위해서라면 자기 신상에 관한 문제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4월 개나리가 한창 교정을 물들이던 때 있었던 전방입소 거부투쟁에서 영진은 44명의 퇴소자와 함께 학교로 돌아왔다. 곧바로 총장실을 점거한 그들은 애초에 약속했던 8개항의 불이행에 대한 항의로 농성을 시작한다.
영진은 그 때 선전을 맡았고 바쁘게 일정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거의 잠을 못자고 지쳐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강구된 단식 투쟁에까지 참가한다.
다음의 투쟁을 위하여 단식에는 참가를 하지 말라고 우리들은 권고했지만 영진은 막무가내였다. 어떻게 후배들이 싸우는데 팔짱끼고 나 앉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일관된 열정으로 투쟁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져갔다. <양영진을 생각한다> 中에서
유 서
사랑하는 내 사람들에게 내 나이 올해 스물 둘, 참으로 팔팔한 나이지요. 사랑이 무엇이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사랑이며 사는 것인지, 건강하게사는 것인지 알 만한 나이지요.
양키 미제국주의에 의해 분단된 땅, 고통받고 있는 땅, 창백한 식민지 조국에서 가장 아름답게 살려고 했지요. 투쟁하며 살려 했지요.
그러다가 투쟁 속에서 죽으리라 다집했습니다.
우리 인간됨을 파괴하는 것들과 맞서서 가장 처절히 투쟁하는 모습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마른 버짐꽃이 허옇게 핀 가난의 땅에 고통과 눈물로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자란 저는 한 때, 부와 명성의 유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의 고통과 가난을 해결하기 우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 알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구체적 민중들에게 아픔을 안겨주는 모순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삶, 이 땅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삶, 자주·민주·통일을 내어 오는 데 이바지하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저는 문학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한 때는 가난에서 비롯된 도피와 자족을 저에게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마저 현체제를 유지시키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제가 문학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이 땅 변혁운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 저에게 가장 알맞은 무기이며,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상에 입각한 조직적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여러 동지들과 고민하고, 8·15 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지역선전대 활동에 바쁘던 중 8월9일 다음날까지 입대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때 조국순례대행진에 참가신청서를 내 놓고 있었습니다.
군부독재가 나의 의지와는 무괂게 아니, 상반되게 던져 온 한장의 소집통지서, 기껏 폭력적 지배방법, 법적 표현에 불과한 소집통지서와 이 조국산천의 검은 얼굴, 돌멩이 하나하나에도 서린 통일의지를 안고 달려갈 조국순례대행진 참가신청서 사이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감동의 차이를 다만 감내하며 저는 그져 폭력통지서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 동포를 상대로 한 찔러, 베어, 때려, 돌려쳐를 배우고 사격수을 배우고 난 뒤, 저는 해운대의 어느 부대에서 방위병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스비낟. 제게 떠맡겨진 임무는 방위병으로 M16소총을 들고 탄약창고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M16을 들고 밤을 세워 지키는 적은 오로지 현 노태우 파쇼집단의 지배체제였으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로 미제국주의의 한반도 수탈구조였습니다.
저의 총구는 언제나 북한동포, 그리고 남한 민중 구체적으로는 어머니, 형제, 동지들에게 겨냥되어져야만 했습니다.
아 반역의 총구, 패륜의 총구에 의해 저는 가슴에 무수한 총알을 맞으면서 어머니의 편안한 미소같은 아침햇살이 퍼져오길 발길 돋우어 기다렸습니다. 매일 새벽은 찾아오지만 허한 얼굴로 쓰러지는 그리움만 M16소총의 섬뜩한 느낌에 몸을 떨어야만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자주 인내심을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도 참고 견디는 능력을 길러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인내심의 보질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일방적 복종심의 습성을 배양하여 기계적인 현실체념주의 형으로 만들고,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고 억압하는 현 노태우 파쇼집단에 가장 잘 순응하는 인간형으로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된 입장에서의 주체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노력으로써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깨치고 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역사를 진보시켜 왔고, 인간성의 고양을 담보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 남한 사회내에서 민중의 자주성이 유린당하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군대는 가장 구조적으로 인간의 자주성을 억압하는 곳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주성이 그 생명인 바 자주성이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현 노태우 파쇼집단과 미제국주의 놈들은 가장 뜨거운 피와 순수한 열정을 가진 수많은 젊은이들을 합법적(?)으로 대량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땅 민중의 고통과 신음소리로써만 그 놈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주의 투쟁으로 신음소리가 피터지는 구호로 전화한다면 그 놈들은 이땅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이 산천 골짜기마다 붉게 피워 피울음 우는 진달래 만큼이나 많은 양의 피가 이땅에 뿌려졌고 이름도 없이 하얗게 그리움으로 피고진 꽃넋들이 지천이었습니다.
이제 저도 이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박은 진달래가 되려고 합니다.
울컥 울컥 솟는 눈물 해방의 땅에 흘리려 합니다.
인간의 자주성을 말살하는 군대조직 해체하라!!
통일벽 가로막는 군대조직 해체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물러가라!!
미국놈들 몰아내고 사람사는 세상 건설하자!!
미국놈들 몰아내고 해방의 꽃잔치 벌여보자!!
통일염원 44년 10월9일 양 영 진 드림
추모글
승리의 계절 영진은 <부대문학>을 통해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문학과 운동의 문제를 풀어낸 것 같았다. 5월 대동제 기간에 우리는 전남대의 용봉문학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혁혁한 투쟁 실적을 자랑하던 용봉문학회와 마련한 자리에서 우리는 대중적 문예조직으로 갖는 <부대문학>의 위상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영진은 용봉문학회의 장점과 한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돌아오는 길에 제시하기도 하면서 <부대문학의 조직강화>에 남다른 의욕을 보였다.
5월이 지나간 뒤 우리에게는 조국통일의 6월이 다가왔다. <부대문학>은 조국통일에 조직적으로 임하기 위해 ‘통일시 공동창작’을 중심사업으로 결정한다.
그 때 부산대는 조국통일의 절박성과 사활적 성격을 대중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행한 전 직선 간부들의 단식투쟁과 그에 호응하는 뜻있는 학우들의 동조단식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영진은 해방 정국에 대한 형상화를 통해 학우들에게 분단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의 해결 방도는 무엇인가를 밝혀내자고 역설했다.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을 마치고 난 뒤 <부대문학>은 그 동안의 사업들을 평가하면서 조직강화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다.
그 하나의 방편으로 기관지 발간이 제안되었으며 영진이가 주축이 되었던 <부대문학> 기획팀이 이 사업을 떠맡기로 했다. 영진과 기획팀은 기관지 창간호의 특집으로 한국사회와 문예운동의 역할에 대한 공동논문을 준비하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그 때 구도서관 뒤쪽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영진은 푹푹찌는 한 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수많은 시들을 써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는 항상 피곤에 절은 얼굴이지만 유난히 눈빛만은 생기가 돌았던 게 인상적이다.
집에 계시는 어머니께 걱정을 끼칠까봐 쌀이 떨어져 밥을 굶고 있음에도 일언반구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장난스럽게 친구들에게 밥 사달라고 조르는 그의 모습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깊은 상처자국과 같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그의 그런 속내를 깊이 짐작해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창고를 개량해서 만든 그의 자취방에는 장마가 들자 비가 새고 곰팡이가 피는 등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었다. 집이 썩어 넘어지든 몸에 곰팡이가 피든 아침 나절 내가 찾아갈 적마다 피곤에 지쳐 곤히 잠든 그의 머리맡에는 밤새 꼬박 적어 갔을 시와 산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기가 일쑤였다.
그의 이처럼 사업을 위해서라면 자기 신상에 관한 문제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4월 개나리가 한창 교정을 물들이던 때 있었던 전방입소 거부투쟁에서 영진은 44명의 퇴소자와 함께 학교로 돌아왔다. 곧바로 총장실을 점거한 그들은 애초에 약속했던 8개항의 불이행에 대한 항의로 농성을 시작한다.
영진은 그 때 선전을 맡았고 바쁘게 일정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거의 잠을 못자고 지쳐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강구된 단식 투쟁에까지 참가한다.
다음의 투쟁을 위하여 단식에는 참가를 하지 말라고 우리들은 권고했지만 영진은 막무가내였다. 어떻게 후배들이 싸우는데 팔짱끼고 나 앉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일관된 열정으로 투쟁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져갔다. <양영진을 생각한다> 中에서
유 서
사랑하는 내 사람들에게 내 나이 올해 스물 둘, 참으로 팔팔한 나이지요. 사랑이 무엇이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사랑이며 사는 것인지, 건강하게사는 것인지 알 만한 나이지요.
양키 미제국주의에 의해 분단된 땅, 고통받고 있는 땅, 창백한 식민지 조국에서 가장 아름답게 살려고 했지요. 투쟁하며 살려 했지요.
그러다가 투쟁 속에서 죽으리라 다집했습니다.
우리 인간됨을 파괴하는 것들과 맞서서 가장 처절히 투쟁하는 모습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마른 버짐꽃이 허옇게 핀 가난의 땅에 고통과 눈물로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자란 저는 한 때, 부와 명성의 유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의 고통과 가난을 해결하기 우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 알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구체적 민중들에게 아픔을 안겨주는 모순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삶, 이 땅 변혁운동에 복무하는 삶, 자주·민주·통일을 내어 오는 데 이바지하는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저는 문학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한 때는 가난에서 비롯된 도피와 자족을 저에게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마저 현체제를 유지시키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제가 문학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이 땅 변혁운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 저에게 가장 알맞은 무기이며,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상에 입각한 조직적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여러 동지들과 고민하고, 8·15 남북청년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지역선전대 활동에 바쁘던 중 8월9일 다음날까지 입대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때 조국순례대행진에 참가신청서를 내 놓고 있었습니다.
군부독재가 나의 의지와는 무괂게 아니, 상반되게 던져 온 한장의 소집통지서, 기껏 폭력적 지배방법, 법적 표현에 불과한 소집통지서와 이 조국산천의 검은 얼굴, 돌멩이 하나하나에도 서린 통일의지를 안고 달려갈 조국순례대행진 참가신청서 사이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감동의 차이를 다만 감내하며 저는 그져 폭력통지서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 동포를 상대로 한 찔러, 베어, 때려, 돌려쳐를 배우고 사격수을 배우고 난 뒤, 저는 해운대의 어느 부대에서 방위병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스비낟. 제게 떠맡겨진 임무는 방위병으로 M16소총을 들고 탄약창고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M16을 들고 밤을 세워 지키는 적은 오로지 현 노태우 파쇼집단의 지배체제였으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로 미제국주의의 한반도 수탈구조였습니다.
저의 총구는 언제나 북한동포, 그리고 남한 민중 구체적으로는 어머니, 형제, 동지들에게 겨냥되어져야만 했습니다.
아 반역의 총구, 패륜의 총구에 의해 저는 가슴에 무수한 총알을 맞으면서 어머니의 편안한 미소같은 아침햇살이 퍼져오길 발길 돋우어 기다렸습니다. 매일 새벽은 찾아오지만 허한 얼굴로 쓰러지는 그리움만 M16소총의 섬뜩한 느낌에 몸을 떨어야만 했습니다.
군대에서는 자주 인내심을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도 참고 견디는 능력을 길러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인내심의 보질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일방적 복종심의 습성을 배양하여 기계적인 현실체념주의 형으로 만들고,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고 억압하는 현 노태우 파쇼집단에 가장 잘 순응하는 인간형으로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주인된 입장에서의 주체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노력으로써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깨치고 나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역사를 진보시켜 왔고, 인간성의 고양을 담보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 남한 사회내에서 민중의 자주성이 유린당하지 않는 곳이 없겠지만 군대는 가장 구조적으로 인간의 자주성을 억압하는 곳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주성이 그 생명인 바 자주성이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현 노태우 파쇼집단과 미제국주의 놈들은 가장 뜨거운 피와 순수한 열정을 가진 수많은 젊은이들을 합법적(?)으로 대량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땅 민중의 고통과 신음소리로써만 그 놈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주의 투쟁으로 신음소리가 피터지는 구호로 전화한다면 그 놈들은 이땅에서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이 산천 골짜기마다 붉게 피워 피울음 우는 진달래 만큼이나 많은 양의 피가 이땅에 뿌려졌고 이름도 없이 하얗게 그리움으로 피고진 꽃넋들이 지천이었습니다.
이제 저도 이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박은 진달래가 되려고 합니다.
울컥 울컥 솟는 눈물 해방의 땅에 흘리려 합니다.
인간의 자주성을 말살하는 군대조직 해체하라!!
통일벽 가로막는 군대조직 해체하라!!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물러가라!!
미국놈들 몰아내고 사람사는 세상 건설하자!!
미국놈들 몰아내고 해방의 꽃잔치 벌여보자!!
통일염원 44년 10월9일 양 영 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