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희(당시 55세)
1938년 9월 부산 영도 출생
1955년 부산여중, 남성여중, 새한중학교 졸업
1958년 부산 남여상 졸업
1959년 3월 1일 손병선씨와 결혼
1960년 4월혁명때 앞장선 남편이 5·16 쿠테타 이후 투옥되자 생선장사를 하며 남편 옥바라지를 함
1989년 10월 큰딸 민옥이 해직되자 전교조 교사가족회 서울지역회장, 전국 부회장 맡음
1992년 9월 26일 남편이 안기부에 연행후 기나긴 수배생활을 시작
1993년 7월 7일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1993년 8월 15일 운 명
1955년 부산여중, 남성여중, 새한중학교 졸업
1958년 부산 남여상 졸업
1959년 3월 1일 손병선씨와 결혼
1960년 4월혁명때 앞장선 남편이 5·16 쿠테타 이후 투옥되자 생선장사를 하며 남편 옥바라지를 함
1989년 10월 큰딸 민옥이 해직되자 전교조 교사가족회 서울지역회장, 전국 부회장 맡음
1992년 9월 26일 남편이 안기부에 연행후 기나긴 수배생활을 시작
1993년 7월 7일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1993년 8월 15일 운 명
성순희 동지의 삶과 죽음은 그 가족의 역사이기도 하다. 4·19때부터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쳐온 손병선 선생과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 헌신하고 있는 세 딸의 뒷바라지로 한평생을 살아온 동지의 고난과 역경의 삶은 이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어머니상이 아닐까.
<동지를 생각하며>
<통일가족 손병선 일가의 비극 - 93년 9월 말지 기사>
감옥의 딸, 사경의 어머니
이른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통일운동가 손병선씨의 아내 성순희씨(54)가 15일 오후 8시 담도암으로 끝내 운명했다. 92년 10월 아버지를 도왔다는 이유로 구속된 둘째 딸 손민영씨(33)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남편의 활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수배령이 떨어져 위독한 몸임에도 치료시기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선 7월 17일 서울 세브란스병원. 닭백숙에 인삼달인 영지차, 김밥, 불고기, 멍게 등이 입원실 엘리베이터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보도록 구치소 측으로부터 만 하루의 외출을 허가받은 민영씨를 위해 부랴부랴 친지들이 싸들고 온 것들이었다. 어머니 성순희씨에게 가장 절박했던 것은 죽기 전에 가족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일이었고, 상황을 전해 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으로 7월 17일 저녁 모녀상봉이 이뤄진 것이다.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은 연신 초초하게 민영씨의 남은 시간을 재고 있었다.
어머니 성순희씨.
남편 손병선씨와 딸을 감옥에 두고 그녀는 아홉 여달의 도피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미 혈기에 찬 나이도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더욱이 남편이 연행되기 전날, 남편과 함께 당한 교통사고로 입원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의사뇌진탕을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해에 받은 췌장염 수술 후유증까지 남아 있었다.
안기부에서 그녀를 찾기 하루 전날 그녀는 가까스로 도피의 길에 올랐다. 물론 가족들과도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4·19때 아버님을 감옥에 보내면서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없이 끌려가 불구의 몸이 되어 나오는 걸 숱하게 보셨지요. 수사기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은 그때부터 시작됐을 거에요. 이번에도 그런 공포감 때문에 어머니는 끈질기게 도피생활을 계속 하셨던 것 같아요.”
막내딸 민아씨의 말이다.
불가피하게 그녀의 도피생활이 끝난 것은 지난 7월 7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였다. 이미 온몸은 심한 황달상태, 병명은 패혈증이 겹친 담도암이었다.
“너무 늦게 찾아오셨습니다. 온몸 황달도 40여일은 지난 것 같군요. 암세포도 일년 내에 생긴 듯합니다.”
담당의사의 말이었다. 바람을 불어넣은 듯 누렇게 퉁퉁 부어오른 채, 혼수상태를 오가는 성순희씨는 누가 보더라도 낙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모습으로 너희들 앞에 나타나서 미안하다”
가까스로 이어가는 그 한마디. 죽음이 눈앞까지 와 있는데도 질기게 버티다 그 끝에 이르러서야 응급실을 찾은 성순희씨의 첫마디였다. 그런 몸을 한 그녀가 근 열달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붇고 대답할 건강상태조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옥 안의 남편과 자식생각에 모질고 지독스럽게 버티고 견뎌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엔 별 도리가 없다.
손씨 일가의 비극
손병선씨는 학생 시절인 4·19 때부터 오로지 통일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삶이었고, 부인 성순희씨 역시 그런 남편을 둔 덕분에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통일운동의 대열에서 벗어나보지 않았다.
성장한 그들의 세 딸 역시 “이제는 우리가 나설 때다. 두 분은 우리를 지켜만 봐 달라”며 각자의 역할을 찾았고 그들은 그래서 한 덩어리의 ‘통일가족’이 되었다. 큰 딸 민옥(35)은 교육현장에서, 둘째 민영은 민중당 등을 오가며 셋째 딸 민아는 노동현장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일해왔다.
93년 아버지 손병선씨는 대남방송을 듣고 간첩 이선실과 회합했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민영씨는 아버지를 도와 대남방송을 청취 기록했다는 이유로 7년형 선고, 그리고 어머니 역시 남편을 도왔다는 이유로 수배령이 떨어졌다.
9개월여의 수배생활 끝에 사경의 몸으로 성순희씨가 세브란스 응급실을 찾았을 때 상황을 보도한 한 일간지의 작은 박스기사는 「손씨 일가의 비극」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네들의 가정이 단란한 행복으로부터 비켜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손씨 가족이, 아니 어쩌면 가장인 손병선씨가 30여년 전 ‘통일’을 머리 속에 넣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통일운동이란 개인의 행복과는 평행선을 그리면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현실은 언제까지 우리 앞에 괴이하게 버티고 서 있을 것인가.
무기수 남편을 끝내 보지 못하고
8월 11일. 다시 찾은 세브란스 병동.
이날 성순희씨는 보다 밝아졌다. 계속되는 악몽에, 냉찜질로라도 잠을 쫓아달라며 채근하다 오랜만에 곤히 한 잠 잔 덕택이다.
“지금 과일이 얼마나 있나?”
“사과 두 개랑 포도 한 송이가 있어예.”
“사과는 먹지 말고 어데 잘 숨켜두그래이. 니 아빠 드려야 한다.”
힘든 한마디 한마디하면서도 옥 안의 남편을 챙긴다. 꿈에 서울구치소를 다녀왔노라고....
병원 창밖에선 학생들의 함성과 노랫소리가 이어진다. 범민족대회를 준비하느라 지방서 올라온 학생들이다. 마치 어머니를 격려하기라도 하려는 듯.
손씨 부녀의 담당변호사는 손병선씨와 성순희씨의 특별접견을 신청했다. 그래서 성순희씨는 남편을 만날 그 어느날 그 시간을 위해 사과 두 개를 챙 기며 창 밖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창 밖의 노랫소리는 정말 힘이 되어줄 것인가.
내내 병원을 지키던 이 가정의 막내딸 민아씨는 8월 또 사당의원에 입원치료중. 지난 6일 아직도 영어의 몸인 양심수 3백여명을 내놓으라며 대전교도소 앞에서 결의대회를 하다가 전경의 방패에 머리를 맞아 15cm가 찢겨나갔다고 한다. 사당의원에서 만난 그녀는 의외로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밝은 낙관으로 이겨내려는 듯한 웃음이었다.
“덕분에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쉬고 있어요.”
문병객의 위문에 대한 민아씨의 대답이었다. 도대체 그들 가족 앞에 벌어진 이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곧 깨어날 꿈이라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7월 18일 어머니를 뒤로 하고 만 하루만에 다시 교도소로 향하던 민영씨의 눈빛 또한 그러했다. 아무런 슬픔도 내색하지 않으며 입원실에 와준 이 사람 저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어머니의 병상을 떠나던 민영씨. 돌아가 독방에 앉은 그녀는 지금 만 하루 동안의 그 꿈을 어떻게 되새기고 있을까.
그러나 되새길 꿈이라도 있는 민영씨는 행복하다. 사경을 헤매는 아내의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고 끝내 아내를 떠나보낸 그녀의 아버지보다는.
<동지를 생각하며>
<통일가족 손병선 일가의 비극 - 93년 9월 말지 기사>
감옥의 딸, 사경의 어머니
이른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통일운동가 손병선씨의 아내 성순희씨(54)가 15일 오후 8시 담도암으로 끝내 운명했다. 92년 10월 아버지를 도왔다는 이유로 구속된 둘째 딸 손민영씨(33)와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남편의 활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수배령이 떨어져 위독한 몸임에도 치료시기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이에 앞선 7월 17일 서울 세브란스병원. 닭백숙에 인삼달인 영지차, 김밥, 불고기, 멍게 등이 입원실 엘리베이터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보도록 구치소 측으로부터 만 하루의 외출을 허가받은 민영씨를 위해 부랴부랴 친지들이 싸들고 온 것들이었다. 어머니 성순희씨에게 가장 절박했던 것은 죽기 전에 가족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는 일이었고, 상황을 전해 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노력으로 7월 17일 저녁 모녀상봉이 이뤄진 것이다.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은 연신 초초하게 민영씨의 남은 시간을 재고 있었다.
어머니 성순희씨.
남편 손병선씨와 딸을 감옥에 두고 그녀는 아홉 여달의 도피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미 혈기에 찬 나이도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더욱이 남편이 연행되기 전날, 남편과 함께 당한 교통사고로 입원치료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의사뇌진탕을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전해에 받은 췌장염 수술 후유증까지 남아 있었다.
안기부에서 그녀를 찾기 하루 전날 그녀는 가까스로 도피의 길에 올랐다. 물론 가족들과도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4·19때 아버님을 감옥에 보내면서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죄없이 끌려가 불구의 몸이 되어 나오는 걸 숱하게 보셨지요. 수사기관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감은 그때부터 시작됐을 거에요. 이번에도 그런 공포감 때문에 어머니는 끈질기게 도피생활을 계속 하셨던 것 같아요.”
막내딸 민아씨의 말이다.
불가피하게 그녀의 도피생활이 끝난 것은 지난 7월 7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였다. 이미 온몸은 심한 황달상태, 병명은 패혈증이 겹친 담도암이었다.
“너무 늦게 찾아오셨습니다. 온몸 황달도 40여일은 지난 것 같군요. 암세포도 일년 내에 생긴 듯합니다.”
담당의사의 말이었다. 바람을 불어넣은 듯 누렇게 퉁퉁 부어오른 채, 혼수상태를 오가는 성순희씨는 누가 보더라도 낙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모습으로 너희들 앞에 나타나서 미안하다”
가까스로 이어가는 그 한마디. 죽음이 눈앞까지 와 있는데도 질기게 버티다 그 끝에 이르러서야 응급실을 찾은 성순희씨의 첫마디였다. 그런 몸을 한 그녀가 근 열달을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붇고 대답할 건강상태조차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옥 안의 남편과 자식생각에 모질고 지독스럽게 버티고 견뎌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엔 별 도리가 없다.
손씨 일가의 비극
손병선씨는 학생 시절인 4·19 때부터 오로지 통일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삶이었고, 부인 성순희씨 역시 그런 남편을 둔 덕분에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통일운동의 대열에서 벗어나보지 않았다.
성장한 그들의 세 딸 역시 “이제는 우리가 나설 때다. 두 분은 우리를 지켜만 봐 달라”며 각자의 역할을 찾았고 그들은 그래서 한 덩어리의 ‘통일가족’이 되었다. 큰 딸 민옥(35)은 교육현장에서, 둘째 민영은 민중당 등을 오가며 셋째 딸 민아는 노동현장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일해왔다.
93년 아버지 손병선씨는 대남방송을 듣고 간첩 이선실과 회합했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민영씨는 아버지를 도와 대남방송을 청취 기록했다는 이유로 7년형 선고, 그리고 어머니 역시 남편을 도왔다는 이유로 수배령이 떨어졌다.
9개월여의 수배생활 끝에 사경의 몸으로 성순희씨가 세브란스 응급실을 찾았을 때 상황을 보도한 한 일간지의 작은 박스기사는 「손씨 일가의 비극」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네들의 가정이 단란한 행복으로부터 비켜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손씨 가족이, 아니 어쩌면 가장인 손병선씨가 30여년 전 ‘통일’을 머리 속에 넣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통일운동이란 개인의 행복과는 평행선을 그리면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현실은 언제까지 우리 앞에 괴이하게 버티고 서 있을 것인가.
무기수 남편을 끝내 보지 못하고
8월 11일. 다시 찾은 세브란스 병동.
이날 성순희씨는 보다 밝아졌다. 계속되는 악몽에, 냉찜질로라도 잠을 쫓아달라며 채근하다 오랜만에 곤히 한 잠 잔 덕택이다.
“지금 과일이 얼마나 있나?”
“사과 두 개랑 포도 한 송이가 있어예.”
“사과는 먹지 말고 어데 잘 숨켜두그래이. 니 아빠 드려야 한다.”
힘든 한마디 한마디하면서도 옥 안의 남편을 챙긴다. 꿈에 서울구치소를 다녀왔노라고....
병원 창밖에선 학생들의 함성과 노랫소리가 이어진다. 범민족대회를 준비하느라 지방서 올라온 학생들이다. 마치 어머니를 격려하기라도 하려는 듯.
손씨 부녀의 담당변호사는 손병선씨와 성순희씨의 특별접견을 신청했다. 그래서 성순희씨는 남편을 만날 그 어느날 그 시간을 위해 사과 두 개를 챙 기며 창 밖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창 밖의 노랫소리는 정말 힘이 되어줄 것인가.
내내 병원을 지키던 이 가정의 막내딸 민아씨는 8월 또 사당의원에 입원치료중. 지난 6일 아직도 영어의 몸인 양심수 3백여명을 내놓으라며 대전교도소 앞에서 결의대회를 하다가 전경의 방패에 머리를 맞아 15cm가 찢겨나갔다고 한다. 사당의원에서 만난 그녀는 의외로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밝은 낙관으로 이겨내려는 듯한 웃음이었다.
“덕분에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쉬고 있어요.”
문병객의 위문에 대한 민아씨의 대답이었다. 도대체 그들 가족 앞에 벌어진 이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곧 깨어날 꿈이라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7월 18일 어머니를 뒤로 하고 만 하루만에 다시 교도소로 향하던 민영씨의 눈빛 또한 그러했다. 아무런 슬픔도 내색하지 않으며 입원실에 와준 이 사람 저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어머니의 병상을 떠나던 민영씨. 돌아가 독방에 앉은 그녀는 지금 만 하루 동안의 그 꿈을 어떻게 되새기고 있을까.
그러나 되새길 꿈이라도 있는 민영씨는 행복하다. 사경을 헤매는 아내의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고 끝내 아내를 떠나보낸 그녀의 아버지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