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수(당시 28세)
1959년 12월 1일 박대웅씨의 7남매중 넷째로 출생
대전 계룡공고 졸업.
경북 왜관에서 카츄사로 군복무
1982년 6월 투라가구(주)에 입사하여 성실한 노동자로 생활함
1987년 12월 5일 대전역 앞에서 분신
대전 계룡공고 졸업.
경북 왜관에서 카츄사로 군복무
1982년 6월 투라가구(주)에 입사하여 성실한 노동자로 생활함
1987년 12월 5일 대전역 앞에서 분신
박응수 동지는 대통령선거가 종반전에 접어들면서 야권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의 시위와 야당 당사내 농성, 서명운동이 잇따르고 있던 1987년 12월5일 오전 10시경 충남 대전시 중동 홍명상가 앞 광장에서 민주당 청중동원용 버스에 올라타 사람들을 내리게 한 뒤 대전역 광장으로 버스를 몰고가 경찰과 대치중 “후보단일화 하라”고 절규하며, 버스와 몸에 신나를 뿌리고 스스로 불을 붙혀 민주의 제단앞에 산화하였다. 분신직후 경찰에 의해 대전 을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정권의 재집권에 광분한 살인군부독재는 영안실 주위를 전경들로 에워싸 동지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조문객들에게 위협적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창졸지간에 자신들의 자식형제가 유명을 달리한 비통과 오열속에서도 동지의 명복을 온 국민과 더불어 빌고자 민주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룰 것을 결정하고 준비하던 유가족 장례위원회에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룰 것을 종용하고, 이를 거부하자 거액의 금품으로 회유코자 했으며 이것도 여의치 않자 유가족들에게 ‘고인의 평소 정신이 이상했다. 나라 망하게 지랄했다.’는 등의 악의에 찬 비방과 헛소문을 퍼뜨리며, 향후 보복한다는 등의 협박을 하면서 온갖 추악한 범죄짓을 일삼았으며, 결국은 동지의 의로운 죽음을 지키겠다고 몰려든 학생과 시민을 향해 전경을 동원,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신을 강제로 탈취하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자행했다. 놈들은 많은 애국시민, 학생들을 강제 연행하는 등 동지의 유가족들과 강제분리시켜 12월8일 밤 10시 30분경 충남 대덕군 산내면 하소리에 삼엄한 경비 속에서 야밤도둑 매장을 감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