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복실(당시 35세)
1971년 김제 용지중학교 졸업. 태창 메리야스 입사
1979년 가톨릭 노동청년회 활동
1981년 태창 메리야스 노조위원장으로 당선, 민주노조 활동을 전개
1982년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간부 7명과 함께 해고를 당함
1983년 해고 후 이리 광전자에 입사 했으나 또 해고를 당함
1985년 군산 경성고무 입사, 해고
1987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사목 활등을 시작
19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
1991년 6월 위암수술 받고 8개월간 투병생활
1992년 3월 11일 운명
1979년 가톨릭 노동청년회 활동
1981년 태창 메리야스 노조위원장으로 당선, 민주노조 활동을 전개
1982년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간부 7명과 함께 해고를 당함
1983년 해고 후 이리 광전자에 입사 했으나 또 해고를 당함
1985년 군산 경성고무 입사, 해고
1987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사목 활등을 시작
19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
1991년 6월 위암수술 받고 8개월간 투병생활
1992년 3월 11일 운명
1971년 김제 용지중학교를 졸업하고 태창 메리야스에 입사한 박복실 동지는 가톨릭 노동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억압된 노동자의 삶을 바꾸려 노력하였다. 81년에는 태창 메리야스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되어 전북지역 최초의 민주노조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의 노조탄압이 포악해지면서 갖은 수모와 탄압을 받다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간부 7명과 함께 해고를 당하였다. 이에 맞서 노조탄압 중지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동료들과 함께 9일간의 단식농성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박복실 동지는 해고 후 83년 이리 광전자에 입사했으나, 또다시 해고를 당하였다. 그 당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로 인해 어디를 가도 취직이 되지 않았다. 동지는 아세아스와니에 다니던 김덕순 동지와 함께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취직이 되지않아 동지는 전주 원일택시 운수 노동자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사납금을 채우지 못해 그만두고 지역을 옮기게 되었다.
85년 군산 경성고무에 입사되었으나, 다시 해고가 되었고 87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여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시 전주지역 민주노조 건설을 헌신적으로 지원하였다.
동지는 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으나, 91년 6월 위암수술을 받게 되었고 8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3월 노동자의 새세상을 위해 온몸을 바쳐 살아온 생을 마감하였다.
박복실 동지는 해고 후 83년 이리 광전자에 입사했으나, 또다시 해고를 당하였다. 그 당시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로 인해 어디를 가도 취직이 되지 않았다. 동지는 아세아스와니에 다니던 김덕순 동지와 함께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취직이 되지않아 동지는 전주 원일택시 운수 노동자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사납금을 채우지 못해 그만두고 지역을 옮기게 되었다.
85년 군산 경성고무에 입사되었으나, 다시 해고가 되었고 87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여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시 전주지역 민주노조 건설을 헌신적으로 지원하였다.
동지는 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으나, 91년 6월 위암수술을 받게 되었고 8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3월 노동자의 새세상을 위해 온몸을 바쳐 살아온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