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상
- 1959년 2월 20일 경북상주에서 부 박노익 모 고화진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하여 졸업. 서울대 이념서클 후진국경제연구회 일원
- 1980년 봄에 일본어 서적인 유물사관과 자본론의 세계를 배포하고 광주항쟁 직후 여러 차례 서울시내 중심가에 유인물을 살포하여 긴 수배 끝에 투옥되었고 함께한 서클 후배들도 구속
선대로 부터 기독교 집안이어서 일찍이 교회에 입문하였다. 서울제일교회 대학생회 활동시절부터
기독교운동에 뛰어들었고 교파와 종교의 차이를 넘어 양심적 종교인과 더불어 끝까지 의로운 투
쟁을 벌임.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연구홍보부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책임연구원. 한
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기사련) 총무국장, 사무처장 등 기독교민족민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간부
중의 한사람으로서 일평생 헌신했다
- 1990년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실무책임자로 민중운동과 통일운동의 어려운 시기에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 1985년 2.12 총선을 앞둔 시기부터 정치분석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후 중요한 투쟁 시기마다 여러 형태의 발표문을 손수 작성했다
- 19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 시기와 그 1년여 후까지 기사연리포트를 잇달아 제작하고 국내외 정치정시를 분석하는 글을 직접 책임졌다. 또 녹두서평을 발간하고 장문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김영민으로 차명)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1년 6개월 남짓 수배되는 고초를 격었다. 기사련 사무처장으로서 통일전선운동과 정치활동에 참여했는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활동에서 걸출하고 올곧은 민족민주운동의 간부였다.
- 1991년 5월 공안통치분쇄투쟁부터 1992년 말 대통령선거까지 맹활약했다. 이 시기에 작성한 선생의 수많은 문건마다 기독교운동과 전체운동이 나아갈 길을 찾고자 했던 초인적이고 놀라운 열정과 밤잠을 설치며 노심초사했을 고뇌가 배어 있다. 문턱이 없는 통일운동을 만들고자 했다.
1990년대 중반 그 어려운 시기에 기독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 사무처장을 맡았고 동시에 수해를 겪은 북녘동포를 향한 겨레사랑동포돕기범국민운동 실무책임자 였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간사 또한 그의 몫이었다. 이러한 헌신은 힘있는 통일운동에 관한 고민을 안은 채 1997년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정치적 운동영역에서 셈세한 노력도 경주했다. 자율과 연대가 기본원리인 사
회를 지향하는 청년네트워크 21의 사무차장을 맡았다.
- 1997년 말에는 정권교체에 관심을 기울이다 김대중 정부가 등장한 이후 나, 우리, 민족, 인류의 번영과 진보에 동참하는 결사, 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주개혁국민연합, 집행위원 바른정치실현시민연대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 1999년 9월 18일 새벽 사십일세의 젊음으로 먼저 가심
-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하여 졸업. 서울대 이념서클 후진국경제연구회 일원
- 1980년 봄에 일본어 서적인 유물사관과 자본론의 세계를 배포하고 광주항쟁 직후 여러 차례 서울시내 중심가에 유인물을 살포하여 긴 수배 끝에 투옥되었고 함께한 서클 후배들도 구속
선대로 부터 기독교 집안이어서 일찍이 교회에 입문하였다. 서울제일교회 대학생회 활동시절부터
기독교운동에 뛰어들었고 교파와 종교의 차이를 넘어 양심적 종교인과 더불어 끝까지 의로운 투
쟁을 벌임.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연구홍보부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책임연구원. 한
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기사련) 총무국장, 사무처장 등 기독교민족민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간부
중의 한사람으로서 일평생 헌신했다
- 1990년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실무책임자로 민중운동과 통일운동의 어려운 시기에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 1985년 2.12 총선을 앞둔 시기부터 정치분석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후 중요한 투쟁 시기마다 여러 형태의 발표문을 손수 작성했다
- 19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 시기와 그 1년여 후까지 기사연리포트를 잇달아 제작하고 국내외 정치정시를 분석하는 글을 직접 책임졌다. 또 녹두서평을 발간하고 장문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김영민으로 차명)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1년 6개월 남짓 수배되는 고초를 격었다. 기사련 사무처장으로서 통일전선운동과 정치활동에 참여했는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활동에서 걸출하고 올곧은 민족민주운동의 간부였다.
- 1991년 5월 공안통치분쇄투쟁부터 1992년 말 대통령선거까지 맹활약했다. 이 시기에 작성한 선생의 수많은 문건마다 기독교운동과 전체운동이 나아갈 길을 찾고자 했던 초인적이고 놀라운 열정과 밤잠을 설치며 노심초사했을 고뇌가 배어 있다. 문턱이 없는 통일운동을 만들고자 했다.
1990년대 중반 그 어려운 시기에 기독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 사무처장을 맡았고 동시에 수해를 겪은 북녘동포를 향한 겨레사랑동포돕기범국민운동 실무책임자 였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간사 또한 그의 몫이었다. 이러한 헌신은 힘있는 통일운동에 관한 고민을 안은 채 1997년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정치적 운동영역에서 셈세한 노력도 경주했다. 자율과 연대가 기본원리인 사
회를 지향하는 청년네트워크 21의 사무차장을 맡았다.
- 1997년 말에는 정권교체에 관심을 기울이다 김대중 정부가 등장한 이후 나, 우리, 민족, 인류의 번영과 진보에 동참하는 결사, 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주개혁국민연합, 집행위원 바른정치실현시민연대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 1999년 9월 18일 새벽 사십일세의 젊음으로 먼저 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