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황
1960년 6월 23일 서울에서 출생
1980년 고려대학교 정경계열에 입학
1982년 3월말까지 학회활동을 주도
1983년 경제학회 학회장
1983년 6월 8일 학생운동 관련 성북서에 연행되어 3월 18일 강제징집됨
1983년 6월 18일 보안사의 ‘녹화사업’ 도중 6월 18일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함. 당시 진행되었던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음이 확실함.
1980년 고려대학교 정경계열에 입학
1982년 3월말까지 학회활동을 주도
1983년 경제학회 학회장
1983년 6월 8일 학생운동 관련 성북서에 연행되어 3월 18일 강제징집됨
1983년 6월 18일 보안사의 ‘녹화사업’ 도중 6월 18일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함. 당시 진행되었던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음이 확실함.
김두황 동지는 유복한 집안의 3남 3녀중 3남으로 태어나 1980년 고대 정경계열에 입학하여, 항상 명랑하고 매사에 성실하여 주위의 사랑을 받았다.
학내활동은 자신감을 가지고 처리 하였으며, 뛰어난 유머와 기지로써, 또한 세심한 배려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교우 관계도 좋았다.
특히 3학년 때 경제학과 학회를 담당하면서 심포지움 및 강연회 등을 준비하고 학내활동의 활성화, 민주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3학년 말, 82년도 학내활동을 반성, 평가하고 83년도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문과대, 정경대, 사범대, 경영대 등의 당시 뜻을 같이 하던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83년도 축제 및 학도호국단 선거, 4.19행사 등에 관해 토론하고 그 방향성과 대안 등을 계획하던 중, 83년 3월 8일 성북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다른 학생의 일로 조사할 게 있으니, 곧 풀어 주겠다.”는 말과는 달리 7일동안 고초를 당하고 3월 15일 저녁에 석방되었다가, 16일 저녁 부모님과 함께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미시간 호텔에서 18일 아침까지 동료와 함께 3명의 형사들과 동숙하였다.(부모님들은 다른 방에 계셨다.) 18일 아침에 병무청 직원 1명이 와서 간단히 서류를 작성하고 강제징집되어 보충대에 입대했다.
성북 경찰서에서의 그의 모습은 떳떳했으며, 그곳에서 조차도 유머를 잃지 않고 같이 조사를 받던 동료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와 함께 조사를 받았던 양창욱(사회학 80)군도 함께 강제징집을 당하여-자진휴학이라는 형식으로-당시 강원도에서 근무 중이었다.
김동지의 군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왜냐하면 1983년 3월 18일 입대하여 6월 18일 운명일까지 약 100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외출 한 번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가족들이 알고 있는 바는 훈련속에서 훈련성적이 우수 하였으며 사단장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평소 그의 낙관적인 성격과 “어느 곳에 가든지 성실한 생활을 해야한다”는 그의 평소 신념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한편 같은 경우로 강제징집을 당한 모군의 경우를 보면 입대 후 군수사 기관에서 10여일간의 조사를 받고 학내활동의 조직상황 및 각 학생들의 성향에 대해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또 “특별휴가”라는 명목으로, 같이 학내활동을 했던 과나 써클의 친구, 학회의 후배 등의 동정을 조사 보고 할 것을 강요 받았으며, 이러한 사실을 누설치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서울에 주둔하는 학교 담당 요원을 만나거나 연락을 취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며, 위축되고 고뇌에 가득찬 표정으로 말하기도 했다. 입대 후에 계속 반성문과 기타 시대관, 조국관 등
유사한 보고서를 써야만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군수사 요원을 만나는 것이 크나큰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강제징집을 당한 경우 거의 예외없이 강요되는 이런 사정을 볼 때 특히 김동지의 경우, 고대 학생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 한다면 군수사기관의 김동지에 대한 처우가 어떠했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김동지의 운명일시는 6월 18일 오후 11시 30분이라고 한다. 6월 19일 새벽에 동지에서 집으로 연락이 왔으며 사고현장에 가족(형님2분, 매형2분)이 도착한 것은 오후 3시라고 한다. 당시의 현장 정황에 대해서는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군에서는 “김동지가 아침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은 후 저녁에는 밥과 누룽지 빵 등을 먹고 동료 2명과 함께 경계근무를 수행하기 위해 근무지로 갔다. 근무중 동료에게 ‘소변보러 간다’고 한 후 나가서 잠시 있다가 총성과 함께 자살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군수사대는 김두황 동지의 가족에게 사인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와 화장동의서를 받아낸 뒤 부검은 실시하지 않았다. 김동지의 유품으로는 볼펜과 사진 한 장(군에서 찍은 것), 시가 적힌 종이가 주머니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김동지가 운명하기 10-15일 전에 집에 보낸 편지에서 “시계를 보내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가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것 같지 않다.
또한 사고 1주일쯤 전에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이는 그의 신념을 볼 때 ‘자살’이란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낙관적인 사고를 기본적으로 갖춘 그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가 자살이라는 현실 도피를 생각했다는 것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군에서 밝히고 있는 자살동기는 특수학적 변동자로 강제 입대하여 전방에서 B형근무시에 매일 6-7시간, A형근무시는 20:00-익일 05:30 경까지 근무를 하는데 대한 불만과 자신은 항상 감시를 받고 있으며 내성적 성격으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소외감 내지는 열등감으로 인한 복무염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군에서 유서라고 주장한 ‘끝’이라는 시와 필적감정시 사용된 유서 ‘끝’과 내용이 상이하고 군에서 제시한 평은 필적과 유서와의 필적이 서로 다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건 당일, 오후 6~8시경 단발음의 총성이 소속대 인근에서 먼저 발생하였고, 보고지연 지시와 초동 현장출동이 이루어진 후 헌병대 수사기록상의 현장에서 연발음의 총성이 발생한 이유와 보안사령부로 보고된 「사망사건보고서」를 기무사를 통해 공개를 요구하였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
학내활동은 자신감을 가지고 처리 하였으며, 뛰어난 유머와 기지로써, 또한 세심한 배려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교우 관계도 좋았다.
특히 3학년 때 경제학과 학회를 담당하면서 심포지움 및 강연회 등을 준비하고 학내활동의 활성화, 민주화를 위해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3학년 말, 82년도 학내활동을 반성, 평가하고 83년도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문과대, 정경대, 사범대, 경영대 등의 당시 뜻을 같이 하던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83년도 축제 및 학도호국단 선거, 4.19행사 등에 관해 토론하고 그 방향성과 대안 등을 계획하던 중, 83년 3월 8일 성북경찰서에 연행되었다.
“다른 학생의 일로 조사할 게 있으니, 곧 풀어 주겠다.”는 말과는 달리 7일동안 고초를 당하고 3월 15일 저녁에 석방되었다가, 16일 저녁 부모님과 함께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미시간 호텔에서 18일 아침까지 동료와 함께 3명의 형사들과 동숙하였다.(부모님들은 다른 방에 계셨다.) 18일 아침에 병무청 직원 1명이 와서 간단히 서류를 작성하고 강제징집되어 보충대에 입대했다.
성북 경찰서에서의 그의 모습은 떳떳했으며, 그곳에서 조차도 유머를 잃지 않고 같이 조사를 받던 동료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와 함께 조사를 받았던 양창욱(사회학 80)군도 함께 강제징집을 당하여-자진휴학이라는 형식으로-당시 강원도에서 근무 중이었다.
김동지의 군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왜냐하면 1983년 3월 18일 입대하여 6월 18일 운명일까지 약 100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외출 한 번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가족들이 알고 있는 바는 훈련속에서 훈련성적이 우수 하였으며 사단장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평소 그의 낙관적인 성격과 “어느 곳에 가든지 성실한 생활을 해야한다”는 그의 평소 신념의 소산이 아닌가 한다.
한편 같은 경우로 강제징집을 당한 모군의 경우를 보면 입대 후 군수사 기관에서 10여일간의 조사를 받고 학내활동의 조직상황 및 각 학생들의 성향에 대해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또 “특별휴가”라는 명목으로, 같이 학내활동을 했던 과나 써클의 친구, 학회의 후배 등의 동정을 조사 보고 할 것을 강요 받았으며, 이러한 사실을 누설치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서울에 주둔하는 학교 담당 요원을 만나거나 연락을 취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며, 위축되고 고뇌에 가득찬 표정으로 말하기도 했다. 입대 후에 계속 반성문과 기타 시대관, 조국관 등
유사한 보고서를 써야만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군수사 요원을 만나는 것이 크나큰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강제징집을 당한 경우 거의 예외없이 강요되는 이런 사정을 볼 때 특히 김동지의 경우, 고대 학생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 한다면 군수사기관의 김동지에 대한 처우가 어떠했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 밝히는 바에 따르면 김동지의 운명일시는 6월 18일 오후 11시 30분이라고 한다. 6월 19일 새벽에 동지에서 집으로 연락이 왔으며 사고현장에 가족(형님2분, 매형2분)이 도착한 것은 오후 3시라고 한다. 당시의 현장 정황에 대해서는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군에서는 “김동지가 아침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은 후 저녁에는 밥과 누룽지 빵 등을 먹고 동료 2명과 함께 경계근무를 수행하기 위해 근무지로 갔다. 근무중 동료에게 ‘소변보러 간다’고 한 후 나가서 잠시 있다가 총성과 함께 자살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군수사대는 김두황 동지의 가족에게 사인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와 화장동의서를 받아낸 뒤 부검은 실시하지 않았다. 김동지의 유품으로는 볼펜과 사진 한 장(군에서 찍은 것), 시가 적힌 종이가 주머니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김동지가 운명하기 10-15일 전에 집에 보낸 편지에서 “시계를 보내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가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것 같지 않다.
또한 사고 1주일쯤 전에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이는 그의 신념을 볼 때 ‘자살’이란 것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철저한 믿음과 낙관적인 사고를 기본적으로 갖춘 그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가 자살이라는 현실 도피를 생각했다는 것은 잘 납득되지 않는다, 군에서 밝히고 있는 자살동기는 특수학적 변동자로 강제 입대하여 전방에서 B형근무시에 매일 6-7시간, A형근무시는 20:00-익일 05:30 경까지 근무를 하는데 대한 불만과 자신은 항상 감시를 받고 있으며 내성적 성격으로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소외감 내지는 열등감으로 인한 복무염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군에서 유서라고 주장한 ‘끝’이라는 시와 필적감정시 사용된 유서 ‘끝’과 내용이 상이하고 군에서 제시한 평은 필적과 유서와의 필적이 서로 다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사건 당일, 오후 6~8시경 단발음의 총성이 소속대 인근에서 먼저 발생하였고, 보고지연 지시와 초동 현장출동이 이루어진 후 헌병대 수사기록상의 현장에서 연발음의 총성이 발생한 이유와 보안사령부로 보고된 「사망사건보고서」를 기무사를 통해 공개를 요구하였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