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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정보

김귀정-당시 26세

김귀정-당시 26세

김귀정(당시 26세)

1966년 서울출생
1985년 무학여고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입학하였으나 집안사정으로 중퇴
1988년 3월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입학, 심산연구회 가입 활동
1989년 심산연구회 회장 역임
1990년 동아리 연합회 총무부장 역임
1990년 11월 동아리 연합회 부회장 출마
19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하여 시위 도중 대한극장 부근에서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의해 운명.
1993년 2월 25일 성균관 대학교 명예졸업
김귀정 동지는 노점상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는 가족의 현실 속에서 악착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대학 입학 후 「심산연구회」 활동을 통해 조국과 민중을 고민하는 책임있는 운동가로 삶을 실천하던 중 아버님을 여의게 됐다. 그렇지만 “운동은 이름만 변하면 그 삶까지 단숨에 변하는 논리가 아니라 끝까지 변하지 않는 신념”이라며 후배 및 동료들의 생활에 건강함을 불어 넣었다. 
항상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미제와 파쇼에 대한 적개심이 부족한 점을 경계하면서 투쟁하던 중 25일 제 4차 국민대회에서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작전에 포위되어 질식할 듯한 최루탄과 백골단의 폭력에 의해 운명하였다. 
1991년 5월 25일, 전국적으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주최:공안통치분쇄 및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에 참여하기 위한 시민 학생등이 대한극장 주변에 약 1만 여명이 집결하였다.
이날 서울에서는 오후 5시경 퇴계로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후 시위대는 시민, 학생, 노동자 등 3만여명으로 늘어나 매일경제신문사앞 3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였다. 5시 20분경 전경과 백골단이 명동방면과 퇴계로 6가, 스카라극장 3방면에서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몰아 부쳤다.
시위대는 처음 “질서”, “질서”를 연호하며 물러서다 3방향에서 포위공격-이 당시 상황은 ‘진압’이라기 보다는 ‘공격’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을 받고 있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이날 동원된 경찰은 각 방향 5개 중대씩 15개 중대 1천8백여명이었고 이후 계속 인원이 증가되어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이 때 10분동안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의 양은 다연발 1백60발 사과탄 1백14발 KP탄 6백72발 등 모두 9백46발로 대한극장 일대는 최루가스로 자욱하였다. 처음에는 경찰이 시위대를 포위하면서 김귀정 동지가 발견된 골목앞으로 시위대를 떠밀었다. 시위대의 절반 정도가 골목을 통해 빠져나가던 중 중간에 백골단이 골목의 입구를 차단, 시위대를 U자로 포위하고 최루탄과 사과탄을 시위대의 머리위로 까 던지면서 방패와 곤봉으로 구타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우들이 부상당했으며 채수지(서강대)양은 목부위에서 최루탄이 터져 목이 5cm가량 찢어지고 T셔츠에 피가 흐르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 골목 앞에는 승용차와 봉고차가 주차 중이었고 골목의 폭은 4m정도였다. 최루탄은 쉬지않고 터졌고 골목은 자욱한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토하기 시작했다. 백골단은 그 쓰러져 있는 사람들 위를 뛰어다니며 진압봉을 휘둘렀다.
“그만…”,“사람죽겠어요”,“살려줘요. 숨막혀요”등등의 비명을 질러댔다. 증언에 의하면 한 여학생이 (김귀정동지로 추정) “아저씨, 때리지 말아요. 저 죽어요”라고 울부짖었으나 백골단이 “이 년아, 집에서 공부나 하지 데모는 왜해”하고 몰아부치며 구타하였다고 한다. 한편 당시 현장에 있던 한 학우의 증언에 의하면 골목 입구로 이동하던 중 김귀정양으로 보이는 학생이 반듯이 누워있었다고 한다. 이후 정황과 복장차림으로 보아 김귀정양으로 추정된다. 골목입구 지점에 김귀정 동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김지훈군(공주사대 국민윤리4)이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백골단은 이에도 몽둥이질을 서슴치 않았고 하는 수 없이 김지훈군은 골목을 빠져나갔다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전경이 물러간 후 함께 구출하여 한겨레신문사 취재차량으로 백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때 김귀정양의 모습은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동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운명한 다음이었다.

<동지가 남긴 글 - 동지의 일기 중에서>

어제 저녁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의 쪼그만 친구 수배중인 친구를 생각했다. 주근깨투성인 얼굴, 야위고 초췌해진 모습으로 슬리퍼를 끌고 내 앞에 나타났다. 벌써 두 달째 접어든 그 아이의 방황, 친구이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못 해보고 어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만 글썽거렸다. 주머니사정 때문에 음료수 한 잔 사주고, 굳세게 살아라 말한마디 던져주고 등을 돌렸다.
목이 콱콱 메어옴을 느끼며 나는 아르바이트하러 발길을 돌렸고 난 남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왔는가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성대생이 된 지 벌써 2달이 넘어 석달째다.

그나마 그래도 말하고 싶은건 아니 말할 수 있는 건 내 주위의 사람들 불의에 항거하며 자신들의 모든 것까지 버려가며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들 곁에서 작은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내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88년 5월 2일)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슬픈 것은 나는 아니,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화내고 분노하는 만큼 노태우와 미제에 대한 적개심이나 분노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일에 흥분을 잘한다. 그렇지만 6공 최대의 비리가 폭로되고 그것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기만적인 지자제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눈한번 크게 뜨고는 그만이었다. 산동네 오두막에 방한칸 빌려 살던 우리의 민중들이 강제 철거를 당해 거리로 나앉을 때 우리는 불쌍하다 동정의 눈길 한번 주고는 그만이었다. 우리의 주먹과 힘들을 너무 헤프게 낭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좀더 중요하고 의로운 일에 우리의 정력을 발휘해야 할 것 같다.
심산 동우회가 있을 날 저녁에, 나는 혁명성이나 투철한 사고방식, 해박한 지식도 없었고, 그냥 심산이 좋아서, 선배가 좋아서 올라오기 시작했고, 마칠 때까지 그래왔다. 그렇게 생활하다보니까 나의 동아리 생활은 시한부를 내 머리속에 그어놓고, 그 선을 넘을까봐 가슴조여하며, 불안해하며 보냈다.
그렇게 생활해서인지 지금까지 있을때만이라도 열심히 할 것, 만약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의 난…, 하고 스스로 자문해 본다. 후배, 동료, 선배 모두에게 이야기하고 싶다.(자신은 없지만) 열심히 살아라. 나도 지금의 내 생활영역속에는 지난 날의 과오를 다시 한번 저지르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함을, 계속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91년 4월 2일 )

이천민주화운동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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