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미경(당시 22세)
1969년 전북 장수 출생
1982년 2월 부산 아미 초등학교 졸업
보세공장 취업으로 노동자 생활 시작함
1985년 공장생활을 하면서 동주여중 야간졸업
1990년 (주)대봉에서 미싱공으로 근무
1991년 12월 6일 (주)대봉 3층 옥상에서 살인적인 노동문제에 항거하여 투신
1982년 2월 부산 아미 초등학교 졸업
보세공장 취업으로 노동자 생활 시작함
1985년 공장생활을 하면서 동주여중 야간졸업
1990년 (주)대봉에서 미싱공으로 근무
1991년 12월 6일 (주)대봉 3층 옥상에서 살인적인 노동문제에 항거하여 투신
지역 노동자들의 독서모임인 ‘도서원 광장’에 나가면서 노동자의 의식에 눈을 떴고, 자랑스런 노동자의 모습을 잃지 않았던 동지는 신발업체인 대봉에서 91년 11월부터 어용노조의 협조 속에서 30분 일 더하기 운동, 구사운동과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노동통제강화에 맞서 공장 옥상에서 투신,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다음은 팔뚝에 쓴 유서 전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땅에 묻지 않고 그대들 가슴 속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말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동지를 생각하며
평소 세심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주위 동료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아온 성실하고 꿋꿋한 권미경 동지는, 나이어린 학생들이 밤이면 공부하고 낮에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애쓰다 불량이라도 하나 내면 거침없이 쏟아지는 관리자들의 폭언을,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가슴여린 스물세살의 여성노동자였다. 그 가슴여린 스물세살의 여성노동자가 이제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우리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권미경 동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공장에 취업하여 생활하면서도 야간중학교까지 다니며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완구공장에 다니시는 홀어머니와 노동일을 하는 오빠, 여동생 둘인 어려운 집안의 장녀로서 꿋꿋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미경이는 절대로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면서 경찰의 자살추정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였다. 죽은 당일 아침에도 평일과 아무 다름없이 밝은 모습으로 출근하였고 죽기 직전에 썼던 12월 5일자의 일기에도 “바로 내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하고자 할 때만이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지 않고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고 쓰여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권미경 동지가 높이 30미터가 되는 작업장 옥상에서 스스로 뛰어내렸건 그렇지 않건간에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이 사회가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모순된 사회를 유지하고 강화하면서 끝내는 이 사회속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현 정부와 자본가 계급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무노동자 권미경 동지의 꽃다운 청춘의 황금기, 그 가장 아름다워야 할 10여년의 세월동안을 피땀흘린 대가가 ‘지금 현재의 경제위기는 모두 노동자 때문’이라며 ‘원가절감’ ‘결근방지’ ‘30분 더 일하기’등으로 되돌려지는 이 모순된 현실이 초래한 명백한 타살이며, 또한 인간답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던 한 여성노동자가 마지막으로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강요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동지가 남긴 글
일 기 1
1991. 10. 11 - 지치고 피곤하고 서러운 금요일 저녁
노동강도가 갈수록 더 심해져 간다.
신발산업 해외 이전까지 들먹여 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내 동료들을 그들은 희롱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할 뚜렷한 설명조차 못해주고있다. 나조차 뭐가 뭔지 잘 알지 못하기에.
요즘은 몸이 정신을 전혀 뒷받침 해주지 못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피로 같은 걸 별로 느끼지 못했었는데, 요새는 몸이 쑤시고 저리고. 하기야 사람이 일을 그렇게 죽어라고 하는데 멀쩡하면 어디 사람인가 기계지.
억울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억눌리며 살아야 하는걸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도대체 내 동료들은 얼마만큼 더 밟혀야 떨치고 일어설 것인가?
세상이 싫고 나 자신이 싫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없을 만큼 미쳐 버렸음 좋겠다. 아니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일 기 2
7. 1. 월 공장 땡땡이
어제 박창수 위원장님의 장례를 지켜보는 내 마음은 놀람, 슬픔, 억울함과 분노가 뒤범벅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똘똘 뭉쳐 단결해서 파업에 들어가 가열찬 투쟁만 한다면 모든 사소한 일까지도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겐 실로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과연 지금의 노동현실은 너무나 당연하고 작은 요구조건 세가지조차 투쟁으로 쟁취하지 못한다는 말인가하는 의문속에서의 이틀......
그 세가지 조건은
1. 유가족에 대해 보상하라
2. 무노동 무임금을 철폐하라
3. 한진중공업 노조간부들 고소고발을 취하 하라는
너무나 당연한, 3살짜리 꼬마들조차 알 수 있는 조건인데 말이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에 나중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본가놈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하고 더러운 인간들인지 분명히 알았다. 개자식들 내 비록 작고 여린 가슴으로 너희들과 맞서려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너희들을 다 태워버릴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 노동자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하게 여기면서 십원짜리 하나라도 더 챙기려 드는 너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돈, 그 더러운 돈도 모두 태워버릴 것이다.
기다려라 이 개자식들아!
박창수위원장은 그 차디찬 땅속에 묻은 것이 아니고 내 뜨거운 가슴 속에 묻었다. 아니 우리 전 노동자 가슴에 깊이 깊이 살아계실 것이다. 자본가놈들 내 아버지의, 내 어머니의 피맺힌 한을 너희 아가리에 처 넣어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아라!
추모시
동지에게 -고무노동자 권미경 동지에게 中에서
광장도서원 송 종 순
먼길 떠나신 동지여
제비꽃빛 한복 새색시마냥 차려입고
꽃신 신고 외로이 떠나신 그 길
그 겨울이 가고 다시
우리는 겨울 앞에 서 있습니다.
대봉 신발 공장 옥상에서
꽃잎처럼 당신 몸을 던졌다는
전선으로 들려오는 캄캄한 소리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까지도 함박이 웃으며
우리는 함께였었는데
“그대들의 더운 가슴에 나를 묻어주오
공순이가 아니라 내 이름은 미경이다“
마지막 유언속에 끓어 넘치는
당신의 분노를 가슴 일렁이며 새깁니다
당신 떠나신 후로도
쉬이 봄은 오지 않고
우리는 쓰러져 울기도 하지만
광폭한 겨울일수록 봄의 꿈을 믿으며
땅속 깊이 꿈을 심어 두겠읍니다
동지를 생각하며
평소 세심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주위 동료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아온 성실하고 꿋꿋한 권미경 동지는, 나이어린 학생들이 밤이면 공부하고 낮에는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애쓰다 불량이라도 하나 내면 거침없이 쏟아지는 관리자들의 폭언을,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가슴여린 스물세살의 여성노동자였다. 그 가슴여린 스물세살의 여성노동자가 이제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우리앞에 누워있는 것이다.
권미경 동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공장에 취업하여 생활하면서도 야간중학교까지 다니며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완구공장에 다니시는 홀어머니와 노동일을 하는 오빠, 여동생 둘인 어려운 집안의 장녀로서 꿋꿋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미경이는 절대로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면서 경찰의 자살추정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였다. 죽은 당일 아침에도 평일과 아무 다름없이 밝은 모습으로 출근하였고 죽기 직전에 썼던 12월 5일자의 일기에도 “바로 내 직장 동료들과 함께 하고자 할 때만이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지 않고 찾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고 쓰여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권미경 동지가 높이 30미터가 되는 작업장 옥상에서 스스로 뛰어내렸건 그렇지 않건간에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이 사회가 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모순된 사회를 유지하고 강화하면서 끝내는 이 사회속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현 정부와 자본가 계급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무노동자 권미경 동지의 꽃다운 청춘의 황금기, 그 가장 아름다워야 할 10여년의 세월동안을 피땀흘린 대가가 ‘지금 현재의 경제위기는 모두 노동자 때문’이라며 ‘원가절감’ ‘결근방지’ ‘30분 더 일하기’등으로 되돌려지는 이 모순된 현실이 초래한 명백한 타살이며, 또한 인간답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던 한 여성노동자가 마지막으로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강요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동지가 남긴 글
일 기 1
1991. 10. 11 - 지치고 피곤하고 서러운 금요일 저녁
노동강도가 갈수록 더 심해져 간다.
신발산업 해외 이전까지 들먹여 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내 동료들을 그들은 희롱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할 뚜렷한 설명조차 못해주고있다. 나조차 뭐가 뭔지 잘 알지 못하기에.
요즘은 몸이 정신을 전혀 뒷받침 해주지 못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피로 같은 걸 별로 느끼지 못했었는데, 요새는 몸이 쑤시고 저리고. 하기야 사람이 일을 그렇게 죽어라고 하는데 멀쩡하면 어디 사람인가 기계지.
억울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억눌리며 살아야 하는걸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도대체 내 동료들은 얼마만큼 더 밟혀야 떨치고 일어설 것인가?
세상이 싫고 나 자신이 싫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없을 만큼 미쳐 버렸음 좋겠다. 아니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일 기 2
7. 1. 월 공장 땡땡이
어제 박창수 위원장님의 장례를 지켜보는 내 마음은 놀람, 슬픔, 억울함과 분노가 뒤범벅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이 똘똘 뭉쳐 단결해서 파업에 들어가 가열찬 투쟁만 한다면 모든 사소한 일까지도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겐 실로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과연 지금의 노동현실은 너무나 당연하고 작은 요구조건 세가지조차 투쟁으로 쟁취하지 못한다는 말인가하는 의문속에서의 이틀......
그 세가지 조건은
1. 유가족에 대해 보상하라
2. 무노동 무임금을 철폐하라
3. 한진중공업 노조간부들 고소고발을 취하 하라는
너무나 당연한, 3살짜리 꼬마들조차 알 수 있는 조건인데 말이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에 나중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자본가놈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하고 더러운 인간들인지 분명히 알았다. 개자식들 내 비록 작고 여린 가슴으로 너희들과 맞서려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너희들을 다 태워버릴 것이다. 너희들이 우리 노동자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하게 여기면서 십원짜리 하나라도 더 챙기려 드는 너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돈, 그 더러운 돈도 모두 태워버릴 것이다.
기다려라 이 개자식들아!
박창수위원장은 그 차디찬 땅속에 묻은 것이 아니고 내 뜨거운 가슴 속에 묻었다. 아니 우리 전 노동자 가슴에 깊이 깊이 살아계실 것이다. 자본가놈들 내 아버지의, 내 어머니의 피맺힌 한을 너희 아가리에 처 넣어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아라!
추모시
동지에게 -고무노동자 권미경 동지에게 中에서
광장도서원 송 종 순
먼길 떠나신 동지여
제비꽃빛 한복 새색시마냥 차려입고
꽃신 신고 외로이 떠나신 그 길
그 겨울이 가고 다시
우리는 겨울 앞에 서 있습니다.
대봉 신발 공장 옥상에서
꽃잎처럼 당신 몸을 던졌다는
전선으로 들려오는 캄캄한 소리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까지도 함박이 웃으며
우리는 함께였었는데
“그대들의 더운 가슴에 나를 묻어주오
공순이가 아니라 내 이름은 미경이다“
마지막 유언속에 끓어 넘치는
당신의 분노를 가슴 일렁이며 새깁니다
당신 떠나신 후로도
쉬이 봄은 오지 않고
우리는 쓰러져 울기도 하지만
광폭한 겨울일수록 봄의 꿈을 믿으며
땅속 깊이 꿈을 심어 두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