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석
- 1938년 8월 24일 광주광역시 출생
- 광주 대성초등학교 졸업
- 광주서중학교 졸업
- 광주고등학교 졸업
- 한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 시작
- 1968년 무안 해제중앙교회 담임목사
- 1975년 목포 연동교회 담임목사
- 1978년 광주무진교회 담임목사
-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 위원장
- 198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장
- 1992년 광주기독교연합회(NCC) 회장
- 1992년 한국실로암선교회 이사장
- 1994년 광주YMCA 이사장
- 1995년 한국교회협의회 평화통일위원장
- 1998년 한빛고 이사장
- 1999년 5.18민중항쟁 제19주년기념행사위원장
- 1999년 민주개혁국민연합전국본부 대표
- 2000년 광주종교인평화회의 상임 공동의장
- 2001년 우리민족서로돕기광주전남 상임공동대표
- 2003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 2004년 조선대학교 이사장
- 2007년 광주무진교회 자원 은퇴
- 2007년 참교육상 수상
- 2019년 한신상 수상
- 2021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 광주 대성초등학교 졸업
- 광주서중학교 졸업
- 광주고등학교 졸업
- 한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 시작
- 1968년 무안 해제중앙교회 담임목사
- 1975년 목포 연동교회 담임목사
- 1978년 광주무진교회 담임목사
-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 위원장
- 198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장
- 1992년 광주기독교연합회(NCC) 회장
- 1992년 한국실로암선교회 이사장
- 1994년 광주YMCA 이사장
- 1995년 한국교회협의회 평화통일위원장
- 1998년 한빛고 이사장
- 1999년 5.18민중항쟁 제19주년기념행사위원장
- 1999년 민주개혁국민연합전국본부 대표
- 2000년 광주종교인평화회의 상임 공동의장
- 2001년 우리민족서로돕기광주전남 상임공동대표
- 2003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 2004년 조선대학교 이사장
- 2007년 광주무진교회 자원 은퇴
- 2007년 참교육상 수상
- 2019년 한신상 수상
- 2021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강신석 목사는 종교, 교육, 통일 등 전반에 걸친 사회 활동에 헌신한 광주지역 원로다.
강 목사는 1938년 8월 24일 아버지 강주원 목사와 어머니 명섬 사이에서 장남으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나는 광주를, 무등산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였고 이를 위해 일했고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사랑하는 무등산 자락에서 살았다.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2007년 본인이 개척했던 광주 무진교회에서 후배들에게 빨리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평소 소신대로 미리 자원하여 은퇴했다.
강 목사는 1976년 목포연동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광주 양림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유신반대 성명서 낭독을 주도하여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아 1년여 수감 뒤 특별사면 됐으며, 이후 긴급조치로 4개월간 수감된 데 이어 1980년 5월 17일 예비검속 수배명단에 포함됐으나 5.18의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서울로 상경,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주한 독일대사 등을 만나 광주의 진실을 설명하였다. 그 결과 신군부로부터 고초를 당하고 보안대에서 독방 신세를 지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5.18특별법 제정 투쟁 등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삶을 살았다. 특히, 김영삼 정권 시절 5.18 특별법 제정 백만 명 서명운동을 벌여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고 그 결과 신군부 핵심을 재판정에 세우고,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중형 선고를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4년 5월 12일에는 독일을 방문, 5.18 민중항쟁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알리기 시작해 1988년 5.18 청문회, 5.18 기념일 지정, 망월동 국립묘지 지정 등 한국민주화운동의 푯대를 세우는 데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데 앞장서왔다.
1980년 12월 30일 제1회 ‘고난 당한 자와 함께 드리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 2001년까지 22년 동안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것은 물론, 옥중에 있는 양심수들에게 옷가지를 전달해 주는 등 옥바라지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한 미전향 장기수들이 옥중에 있을 때에도 그들을 돌봤고 이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미전향 장기수들 중 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당국과 협의하는데 최선을 다하여 남북화해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그리고 교육민주화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1982년 1월 광주 YMCA 중등교사회를 탄생 시키는데 무진교회가 그 산실의 역할을 했으며 교육민주화 활동을 하는데 교회가 정신적 토대가 되도록 힘을 썼다.
이후 전교조의 탄생과 해직교사들의 뒷바라지도 강 목사의 몫이었으며, 전교조 합법화 과정에서 집회, 서명, 연대사업, 인적지원 등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소명에 충실했으며 교육민주화와 전교조합법화에 크게 기여하여 2007년 참교육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와 평화통일 분야에 크게 기여한 점을 인정하여 제 25회 한신상을 수상하였다.
강 목사는 장애인 인권을 위해 일하셨고 특히 한국실로암선교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시각장애인들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각장애인의 인권향상을 위해 애썼다. 또한, 광주 종교인 평화회의 상임공동의장으로서 종교 간의 화해, 종교 간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위해 일했다.
강 목사님 가정은 아버지 강주원 목사의 고향인 나주 방산(다도)까지 선교하러 온 타마자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직접 받아들인 3대 목사 가정으로, 아버지 강주원 목사님, 아들 강의준 목사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기업으로 삼은 가정이다.
강 목사님은 신앙의 힘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치며 생을 마감했다.
신앙을 몸소 삶의 모습으로 보여줘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강 목사는 1938년 8월 24일 아버지 강주원 목사와 어머니 명섬 사이에서 장남으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도 ‘나는 광주를, 무등산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였고 이를 위해 일했고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사랑하는 무등산 자락에서 살았다.
1963년 전남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2007년 본인이 개척했던 광주 무진교회에서 후배들에게 빨리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평소 소신대로 미리 자원하여 은퇴했다.
강 목사는 1976년 목포연동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광주 양림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유신반대 성명서 낭독을 주도하여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아 1년여 수감 뒤 특별사면 됐으며, 이후 긴급조치로 4개월간 수감된 데 이어 1980년 5월 17일 예비검속 수배명단에 포함됐으나 5.18의 진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서울로 상경,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주한 독일대사 등을 만나 광주의 진실을 설명하였다. 그 결과 신군부로부터 고초를 당하고 보안대에서 독방 신세를 지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5.18특별법 제정 투쟁 등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삶을 살았다. 특히, 김영삼 정권 시절 5.18 특별법 제정 백만 명 서명운동을 벌여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백만 명의 서명을 받아냈고 그 결과 신군부 핵심을 재판정에 세우고,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중형 선고를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4년 5월 12일에는 독일을 방문, 5.18 민중항쟁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알리기 시작해 1988년 5.18 청문회, 5.18 기념일 지정, 망월동 국립묘지 지정 등 한국민주화운동의 푯대를 세우는 데 있어서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데 앞장서왔다.
1980년 12월 30일 제1회 ‘고난 당한 자와 함께 드리는 예배’를 드리기 시작, 2001년까지 22년 동안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 온 것은 물론, 옥중에 있는 양심수들에게 옷가지를 전달해 주는 등 옥바라지에도 최선을 다했다.
또한 미전향 장기수들이 옥중에 있을 때에도 그들을 돌봤고 이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미전향 장기수들 중 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당국과 협의하는데 최선을 다하여 남북화해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그리고 교육민주화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1982년 1월 광주 YMCA 중등교사회를 탄생 시키는데 무진교회가 그 산실의 역할을 했으며 교육민주화 활동을 하는데 교회가 정신적 토대가 되도록 힘을 썼다.
이후 전교조의 탄생과 해직교사들의 뒷바라지도 강 목사의 몫이었으며, 전교조 합법화 과정에서 집회, 서명, 연대사업, 인적지원 등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소명에 충실했으며 교육민주화와 전교조합법화에 크게 기여하여 2007년 참교육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민주화와 평화통일 분야에 크게 기여한 점을 인정하여 제 25회 한신상을 수상하였다.
강 목사는 장애인 인권을 위해 일하셨고 특히 한국실로암선교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시각장애인들의 복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각장애인의 인권향상을 위해 애썼다. 또한, 광주 종교인 평화회의 상임공동의장으로서 종교 간의 화해, 종교 간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를 위해 일했다.
강 목사님 가정은 아버지 강주원 목사의 고향인 나주 방산(다도)까지 선교하러 온 타마자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직접 받아들인 3대 목사 가정으로, 아버지 강주원 목사님, 아들 강의준 목사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기업으로 삼은 가정이다.
강 목사님은 신앙의 힘으로 평생을 살았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할렐루야와 아멘을 외치며 생을 마감했다.
신앙을 몸소 삶의 모습으로 보여줘 신앙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