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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박종철 열사 49재 20년 천도재 및 추모문화제

박종철 열사 49재 20년 천도재 및 추모문화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뉴스레터


오는 3월 3일(토) 오후 1시부터 종로 조계사에서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 불교추진위원회(상임고문 : 지선, 청화, 진관 / 상임대표 : 명진, 여익구)가 박종철 열사 49재 20년 천도재 및 추모제를 거행한다.

행사는 풍물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1부 박종철 열사 49재 20년 천도재 및 추모제와 2부 추모문화제로 진행되며, 그 외에도 87년 6월 민주항쟁 사진전 등도 함께 준비된다. 행사 1부는 열사 천도재, 각 종교 지도자, 주요 인사 추모사, 추모 기도, 가족인사 등으로 진행되며, 2부는 안치환, 야단법석, 꽃다지, 대한불교 소년소녀합창단, 노래극단 희망새 등 다수의 문화예술인이 참가하는 공연과 문화행사로 구성된다.

불교추진위원회는 6월 민주항쟁 20년을 맞이하여 당시 참여했던 지선·청화·진관·학담·명진스님 등과 고은·신경림·한상범·여익구 등 재가불자들이 올해 초 결성했다.

87년 당시 친정권적이고 정권에 예속적인 분위기로 일관했던 불교계가 종단 차원에서 박종철 열사의 49재를 치르게 된 내막은 아이러니컬한 면이 있었다. 당시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이 1월 20일 어떤 내막에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박종철 군 49재를 조계사에서 치르겠다는 발표를 했다. 미루어 짐작해볼 때 국민적 분노를 무마하고 열사 가족을 위무하는 차원이란 정권의 의도가 전달되어 이루어진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박종철 군 49재를 서울 조계사에서 치르면 사회 불순세력(?)에 의해 불순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논리로 2월 23일 돌연 부산 사리암(주지 백우 스님)에서 치른다고 장소를 변경하였다. 3월3일 박열사의 초혼장으로 치러진 49재는 오히려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아이러니컬하게 당시 친정부 성향의 불교 종단에서 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을 제공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부산 사리암에는 수많은 전경이 배치되어 스님들과 신분이 확인된 신도들을 제외하고는 출입이 차단되었다. 물론 조계사 주변도 원천봉쇄되었다. 박종철 군 죽음과 당시 시대상황을 계기로 깨어난 불교내의 민주화 세력은 지선스님을 선두로 조계사 진입을 시도했고, 결국엔 49재를 치르고야 말았다. 당시 지선스님은 ‘수많은 49재를 지내 봤지만 그렇게 짧은 49재는 처음이었다’며 ‘요령 몇 번 흔들고, 열사 이름 몇 차례 되뇌는 것으로 끝내고야 말았다’고 회상했다. 사실 참석했던 스님과 불제자들 중에서 열사 이름 외는 걸 들었던 사람도 드물었지만.

엄청난 봉쇄와 탄압 속에 거행된 20년 전의 49재였기에 제대로 된 49재는 아니었다. 이제 20년이란 시간 속에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렸고, 민주세력의 이름으로 불교 종단이 앞장서 제대로 된 49재를 지내야 한다는 마음과 기타 종교계(6대 종단 초청, 기독교, 대종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와 함께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수많은 열사들을 위로하고 천도하는 화해와 상생의 기회로 기획한 것이다.

이번 불교추진위 행사에 이어 6월 민주항쟁 20년사업은 당시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교수, 교사, 학생들을 비롯하여 의료계, 여성계, 언론계, 노동계 등의 각 부문과 부산, 광주, 인천 등지의 지역으로 확산되어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을 온 국민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저항으로 이끌었고, 온 국민을 하나 되게 만들었던 통합의 정신이 이어져 20년을 맞이한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꽃으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