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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행사

고 박현채 추모제

 ○ 일 시 : 2009년 8월 15일(일) 11:00


 ○ 장 소 : 천안공원묘지 백조4열88


 ○ 담당자 및 연락처: 김희숙(부인) 010-2531-4713


 ○ 동지약력


  -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 출생


  - 1947년 광주수창국민학교 졸업. 당시 독서회활동 시작,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실천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임.


     광주서중에 입학, 전쟁발발까지 민애청 활동에 참가


  - 1950년 전쟁 발발후 광주서중 학내조직활동에 전념하다가 같은 해 10월 입산 1952년 8월까지


    빨치산 활동


  - 155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과 입학


  - 1963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강사 시작, 인혁당사건으로 중단.


  - 1964년 인혁당사건에 연루, 1965년 2심에서 징역 1년 선고


  - 1979년 「임동규간첩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복역함


  - 1980년 「134인 지식인선언」에 참가, 5.18 이후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았으나 풀려남


  - 1985년 「창작과 비평」 제57호에 「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를 발표,


    이른바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의 단서를 제공함


  - 19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 출판


  - 1995년 8월 16일 93년 뇌줄증으로 쓰러져 약 2년간 투병하다 운명


 


동지는 외세를 배제하고 민족자립 경제를 주창한 남한의 대표적 민족경제학자였으며, `70~&rsquo80년대 가혹한 민주화운동 탄압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가로, 빼어난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고난을 겪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동지는 `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6살의 나이에 빨치산으로 입산했다가 `52년 8월 복부 관통상을 입고 하산, `55년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한국농업문제연구회` 간사로 있으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에서 한국 국민경제의 독자적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하였다. `64년 동지는 소위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어 도예종 은닉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이후 두차례 복역과 구금을 당하였다. 동지의 민족경제론은 한국 자본주의가 종속의 길로 치닫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해 `70~`80년대 민중운동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제공하였다.


 

행사 정보

토요일 2009-08-15
지도보기 천안공원묘지 백조4열88 지도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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