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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행사

고 박기상동지 11주기 추모제

고 박기상동지 11주기 추모제


○ 일 시 : 2010년 9월 18일(토) 11:00


○ 장 소 :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 담당자 및 연락처: 정재흥 011-9279-1304


○ 동지약력


- 1959년 2월 20일 경북상주에서 부 박노익 모 고화진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 입학하여 졸업. 서울대 이념서클 후진국경제연구회 일원


- 1980년 봄에 일본어 서적인 유물사관과 자본론의 세계를 배포하고 광주항쟁 직후 여러 차례 서울시내 중심가에 유인물을 살포하여 긴 수배 끝에 투옥되었고 함께한 서클 후배들도 구속


선대로 부터 기독교 집안이어서 일찍이 교회에 입문하였다. 서울제일교회 대학생회 활동시절부터 기독교운동에 뛰어들었고 교파와 종교의 차이를 넘어 양심적 종교인과 더불어 끝까지 의로운 투쟁을 벌임.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연구홍보부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기사련) 총무국장, 사무처장 등 기독교민족민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간부 중의 한사람으로서 일평생 헌신했다


- 1990년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실무책임자로 민중운동과 통일운동의 어려운 시기에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앞장섰다


- 1985년 2.12 총선을 앞둔 시기부터 정치분석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후 중요한 투쟁 시기마다 여러 형태의 발표문을 손수 작성했다


- 1987년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 시기와 그 1년여 후까지 기사연리포트를 잇달아 제작하고 국내외 정치정시를 분석하는 글을 직접 책임졌다. 또 녹두서평을 발간하고 장문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김영민으로 차명)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1년 6개월 남짓 수배되는 고초를 격었다. 기사련 사무처장으로서 통일전선운동과 정치활동에 참여했는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활동에서 걸출하고 올곧은 민족민주운동의 간부였다.


- 1991년 5월 공안통치분쇄투쟁부터 1992년 말 대통령선거까지 맹활약했다. 이 시기에 작성한 선생의 수많은 문건마다 기독교운동과 전체운동이 나아갈 길을 찾고자 했던 초인적이고 놀라운 열정과 밤잠을 설치며 노심초사했을 고뇌가 배어 있다. 문턱이 없는 통일운동을 만들고자 했다.


1990년대 중반 그어려운 시기에 기독교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 사무처장을 맡았고 동시에 수해를 겪은 북녘동포를 향한 겨레사랑동포돕기범국민운동 실무책임자 였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협의회 간사 또한 그의 몫이었다. 이러한 헌신은 힘있는 통일운동에 괂란 고민을 안은 채 1997년 말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정치적 운동영역에서 셈세한 노력도 경주했다. 자율과 연대가 기본원리인 사회를 지향하는 청년네트워크 21의 사무차장을 맡았다.


- 1997년 말에는 정권교체에 관심을 기울이다 김대중 정부가 등장한 이후 나, 우리, 민족, 인류의 번영과 진보에 동참하는 결사, 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민주개혁국민연합, 집행위원 바른정치실현시민연대 운영위원 등을 역임했다.


- 1999년 9월 18일 새벽 사십일세의 젊음으로 먼저 가심


 

행사 정보

토요일 2010-09-18
지도보기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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