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 시: 2024년 4월 11일(목) 오전 11시
○ 장 소: 민주화운동기념공원
행사 정보
인물 정보
곽현정
- 1982년 수유여중 졸업
- 1985년 2월 11일 풍문여자고등학교 졸업
- 1985년 한신대학교 신학과 입학
- 1986년 11월 30일 건국대 ‘애학투련 항쟁’ 참여후 구속. 구속 중 갖은 폭행과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 1987년 가을 학기를 간신히 마치고 휴학. 정신적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 1988년 4월 10일 성지교회 2층 자택에서 운명
- 제44 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동지는 ’86년 건대항쟁에 참여하여 구속된 후, 115일만에 출소(징역1년 6월, 집행유예 2년)하였다. 건대항쟁 진압과정은 마치 전쟁과도 같았으며 경찰은 학생들을 구속하는 중에도 구둣발과 몽둥이로 짐승처럼 폭행하고 폭언을 일삼았다. 동지는 저들의 악랄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87년 봄학기와 가을학기를 간신히 마치고 휴학하였다. 건대 항쟁 이전과 이후에도 수차례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를 사는 등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곽현정 동지는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다 자결했다.
곽현정 동지는 건대항쟁에 참여하여 구속된 후, 115일만에 출소(징역1년6월, 집행유예 2년)하였다. 구속 중 갖은 폭행과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려 1987년 봄학기와 가을학기를 간신히 마치고 휴학하였다. 건대 항쟁 이전과 이후에도 수차례 경찰에 연행되어 구류를 사는 등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곽현정 동지는 정신적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자결했다.
동지의 글
그날의 울분을 되씹으며
“은밀한 침실이 아니어도 그것은(?)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사람을 긴장시킨다. 그날 아침도 역시 그랬다. 새벽에 일어나 병점에서 서울의 건국대학교까지 내내 흥분, 긴장상태였다.
넓은 교정, 그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많은 사람들, 많은 함성 소리, 그것은 차라리 완전히 공개된 자유의 마당이요, 해방의 거리였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끊이지 않는 인해전술과 최루탄 공세는 눈뜨고 지켜볼 수 없는 지옥의 도살장과 같았다. 문 하나만 깨지면 건물안의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개같이 끌려가야 할 판이었다. 모두들 이성을 잃었다. 그 누구도 침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손에 잡히는 것은 모조리 좋은 무기였다.
심지어는 화장실의 세면대와 변기까지 깨서 사용하였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서 숨이 턱턱 막혔다.”
‘타타타..... 타타타.....’
‘크허어억, 켜아악.....’
‘타악, 호억!’
오호! 이것이었구나! 그날 광주의 대울음이, 피바다가!..“
“ ‘잊지 않으마, 내 잊지 않으마, 원수들아,’ 멀리 옥상에서 흰 깃발이, 패배의 몸짓이 발악적으로 꿈틀거렸다. 곧이어 부상자가 속출했다. 검은 연기 속의 본관을 뒤로한 채 기자들과 전경들 사이로 어기적 어기적 끌려나갔다. 결국 살아서 걸어나갔다.”
“동대문서 유치장 이층
만 열아흐레 스무날의 밤낮을 흉칙 포악무도한 형사님 상전에서 폭행, 협박, 폭언, 기만과 회유를 당하며 죽도록 버텼다. “몽둥이질로, 구둣발로, 이 땅 용공, 좌경분자(?)들이 말살 가능하다면 실컷 맞아주마! 그러나 너희들은 더 큰 역사의 심판을 받게될 것이다.” 앞 책상에 앉은 1학년 두 녀석은 맞다 못해 돌이 스무개요, 화염병이 대여섯개요라고 말했고 골고루 나누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고 묻는 형사의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형사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그들을 넘겼다.“
“1987년 2월14일 법정에 섰다. 실형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이 내려졌다. 눈을 감고 이를 물고 서 있다가 이내 큰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오후 5시, 드디어 출소식이다. “소내 계신 애국시민 여러분! 그리고 민주학우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한신대 2학년 만 일백 열닷새만에 출소합니다. 이거 놔요, 인사도 못해요? 진정한 조국의 해방과 이땅 남과 북이 하나되어 어우러지는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
<곽현정동지가 출소 후 가을호인 네 번째 『한신』에 투고한 글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