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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행사

고 김용갑동지 28주기 추모제

고 김용갑동지 28주기 추모제

○ 일 시: 2018년 3월 25일(일) 11:00

○ 장 소: 마석 민족민주역사묘역 

행사 정보

일요일 2018-03-25
지도보기 마석 민족민주역사묘역 지도에서 보기

인물 정보

김용갑

- 1966년 1월 29일 출생
- 1979년 3월 동보중학교 입학
- 1981년 3월 대명고등학교 입학
- 1982년 8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명고등학교 2년 중퇴
- 1985년 10월 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검정고시 합격
- 1989년 3월 속초 동우전문대 양식학과 입학
- 1989년 4월 동우대학 신문사 기자 합격, 곧이어 신문편집 자율권을 요구하며 기자 사퇴 9월 비합법 단체 “동우학원 민주실천위원회” 가입, 제2차 전교조 합법화 쟁취 범국민대회 참가
- 1989년 11월 동우전문대학 제5대 총학생회 정·부회장 선거출마 자주 총학생회 기치를 내걸고 압도적 표차로 승리
- 1989년 12월~1990년 3월 6일 동계방학 기간중 학교와의 투쟁으로 10여가지(우체국, 휴게실, 장학금인상) 부분을 승리로 이끔
- 1990년 3월 6일~27일 학생과 직원의 직접사주로 7차례에 걸친 납치, 폭력, 사퇴 협박당함
- 1990년 3월 28일 새벽 2시경 강원도 속초시 노학동 소재 도로공사 근처에서 의문의 사고로 운명. 단순 교통 사고로 위장다는 의문을 남김

동지는 동우전문대 입학해, 대학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도서관문제 등 학내문제에 관심을 갖고 취재 활동을 했고, 편집자율권을 요구했으며, ‘동우학원민주실천위원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동우전문대학(이하 동우대)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 가입을 추진하였다. 동지는 ’89년 11월경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후, 장학금 및 부동산투기 등 재단비리를 밝히기 위하여 학내집회를 여는 등 재단비리문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동지는 ’90년 3월 27일 오후 3시부터 오후 11시 25분까지 학생들과 술자리 후 속초시 도로공사연수원 앞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90년 3월 29일 학교 폭력배 문종석은 자승용차로 치어 사망했다고 자수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대학교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폭력학생들로 하여금 민주화운동권 학생들에게 학내비리와 부실한 교육여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폭력을 행사하고, 협박을 가하도록 했으며, 대가로 폭력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사망 당일 학교 측이 골치 아파하는 총학생회 발대식 예정일이서 사망의 원인이 된 교통사고에 학교 측이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아직도 동지의 ’90년 3월 28일 새벽 1시경부터 새벽 2시경까지의 행적은 전혀 밝혀내지 못하였다.

속초 동우전문대는 80년 11월 3일, 학교법인 ‘동우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으나, 80년 지역 주민들의 땅을 강제로 수탈하고, 그 땅값조차 제대로 주지 않아 설립자체가 석연치 않은 학교였다.

“전재욱 전문대”라고 할 정도로 동우 전문대는 전재욱 학장의 비민주적인 학사운영이 판을 치는 곳이었으며, 안하무인인 전재욱 학장이 재단 이사장에서 학장으로 취임한 89년 2월 이후의 동우전문대는 폭력과 비리가 이중주를 이루는 가운데 학원의 순수성과 진리의 순결이 유린당하는 시련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모순 속에서 89년 4월 12일 동우전문대 역사상 초유의 학원민주화의 깃발이 날리게 되고 자생적인 비합법단체인 “동우학원 민주실천위원회 (이하 동민회)”를 설립하게 이른다.

재단측의 폭력배 개입, 어용총학으로 인해 잠시 주춤했던 동민회는, 이후 증폭해가는 학원민주화 열기 속에서 학생들이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고 89년 9월 김용갑 동지가 동민회에 가입하게 된다.

그 가운데, 김용갑 동지가 총학생회장에 출마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동우전문대의 제 민주단체는 내부의 설득반 걱정 반으로 출마의사를 재고하자고 하였다. 과거 춘천 출신 학생이 출마했다가 갖은 폭력과 납치 끝에 자퇴서를 내고 군대를 간 일, 그리고 인근 대학의 선거 관련 폭력 등이 비일비재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지는 “나는 선거를 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출마하겠다. 어차피 이 일은 언젠가 해야 할 일이며 출마 후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출마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다른 모든 의견을 불식시키고 동우전문대 제 민주단체 회원의 압도적인 찬성 속에서 출마를 하게 된다.

개표 직후에 재단 측 폭력배의 난동 속에서 올려진 자주 총학생회는 가슴 벅찬 기쁨이었다. 속초 동우전문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김용갑 동지는 동계 방학중에 동우전문대 최초의 등록금 동결 투쟁 등의 각종 학원의 민주화와 권익을 위한 투쟁을 해나갔고 학원내 비리를 척결하고 학원의 자주화를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재단 측에 의해 고용된 폭력배들에게 수시로 협박과 구타를 당하고 회장 사퇴를 강요당해 왔다.

학생과 직원인 김진(33세)으로부터 “나는 나를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차로 갈아서 죽여버리겠다. 차로 받아도 과실치사로 6개월 밖에 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남을 시켜서 하겠다”는 협박을 하고 (학생들은 우연히 이 내용을 녹음하게 되었다고 한다) 3월 6일에는 설악 유스호스텔에서 있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재단 측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신입생들을 만나자 학생과는 그날밤 10여명의 폭력배들을 김용갑 동지의 숙소로 난입시켜 감금한 채 집단폭행까지 했다. 사건 며칠 전부터는 학교측의 갖은 협박과 폭력때문에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칼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사건 직전인 3월 27일 김용갑 동지는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약간 취기가 있는 상태에서 밤 11시 25분경 친구들과 헤어진 뒤 다음날 새벽 2시경 좌측 다리골절, 턱부위 외상, 양사타구니 안쪽에 응혈, 왼쪽 정강이 부위에 눌린 자욱 등의 외상이 있는 주검으로 발견되었으며, 교통사고로 발표되었다.








동지를 기억하며





“지금 우리는 승리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서용원 (당시 사인진상규명 대책위 위원장)


(중략)...


칼을 품고 죽다니... 무엇이 두려워서, 무엇을 그토록 증오하였기에 왜 스물 여섯의 젊은 날 사랑 가득한 가슴에 칼을 품고 죽었나. 죽어도 잊지 못할 한을 안고 사는 사람사는 세상을 애타하며 학원 민주화의 꿈을 두고 어디로 가는가?


곤히 자는 듯 누운 그의 모습은 서럽게 평화로왔다.


“더러운 세상, 어서 일어나라.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여기에 누우면 어찌한단 말인가?”


울지 못하는 가슴으로 우리는 싸움을 준비하였다. 억울하게 숨진 용갑이형의 한을 우리가 이루어 내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우리는 검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학교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용갑이형을 괴롭히고 죽일 거라고 미친 듯 날뛰던 자들은 어디로 갔나. 학장실은 텅비어 있었다. 사람도 없고 학원문서도 없이 빈 책상만 덩그러니 있었다. 모든걸 다 부수고 싶었다. 모든 더러운 것을 싹 쓸어버리고 싶었다. 허나 꾹꾹 참았다. 우린 저들처럼 짐승이 아니기에….


학장실을 점거하고 우린 용갑이형의 죽음이 밝혀질 때까지 투쟁하기로 결의하였다. 허나 저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용갑이형의 죽음 앞에 백배 사죄하고 인간된 도리로 총학생회장의 의문의 주검을 밝히는데 협조는 커녕 오히려 용갑이형을 또다시 죽이고,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지성과 인격을 고루 갖추었다는 우리들의 교수님들은 비열하고도 파렴치한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우리들의 부모님들께 전화를 하여 “제적을 시키겠다”, “지금 댁의 자녀가 불순분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구속될 상태이다”, 또는 아예 “댁의 자녀가 자살했다”라고까지 거짓말을 해댔다.


어머님의 눈물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학생이기 전에 인간입니다. 사람된 도리를 가지고 어찌 이 엄청난 살인극을 지켜만 보시라는 겁니까?”


모두가 끌려가면서 울었다. 돌아오리라. 다시 돌아와 함께 싸우리라. 우린 끌려가는 동지의 뒷모습을 보며 다짐을 했다.


그래 꼭 돌아오리라. 믿는다. 결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리라.


---- 중략 -------


이목리 화장터에 실려간 용갑이형은 한줌의 재가되어 우리에게 돌아왔다. 생전 학원의 민주화 투쟁 속에서 힘겨울 때 즐겨 찾아온 영금정에 형은 하얀 가루가 되어 뿌려졌다. 그날 바다에는 파도가 일지 않고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우리는 분노속에, 눈물속에 형을 떠나보냈지만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는 떠나보내지도, 묻어버리지도 않았다. 지금 이시간에도 힘차게 타오를 뿐이다. 동지들이여! 조금만더 힘을 내자. 동지가 품고 돌아가신 한을 기필코 우리의 단결된 투쟁의 힘으로 낱낱이 풀어드리도록 지칠 줄 모르는 신념으로 힘차게 달려나가자.





민주정부 수립 원년의 해 조국해방 48년 7월 28일


투쟁으로 함께 했던 동지가 순수한 삶을 살았던 동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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