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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이들의 작은 처소, 이우정 2



역사의 피조물

‘민청학련사건’이니 ‘3·1민주구국선언’ 같은 대형 시국 사건들은 이우정이란 이름 석 자를 재야인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고 기관원들의 감시와 협박에 시달리는 일은 어느덧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여성 노동자들, 철거민들, 동아·조선투위, 원폭 피해자들, 재일동포들, 양심수 가족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담담히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직 손을 내밀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나를 이용하세요.’라고 외쳤다.

1970~80년대의 크고 작은 시국사건에 연루되고, 잡혀갔다 풀려나오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형성된 그의 이미지는 과격하고 격렬한 ‘민주 투사’ 그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가까이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투사’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어딘지 기품이 느껴지는 작고 온화한 여성이었다.

그는 기질적으로도 싸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싸움꾼인 체 하지도 않았다. 보안사나 중앙정보부 밀실로 끌려갈 때면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겁이 난다’고 고백하는 것이 그였다. 위험을 피해 도망가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아이처럼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당신이 내 목숨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한번은 치마를 입고 나오셨다가 잡혀 들어가게 됐어요. 걸핏하면 안기부나 보안사 같은 데 잡혀 들어가시니까. 그래 동대문시장에서 바지를 사서 입혀 들여보내 드리면서 고문 받을 거라고 막 걱정을 했죠. 근데 나중에 나와서는 ‘아니야, 고문 안 받았어. 그냥 잠을 며칠 안 재우더라?’ 그 만년소녀 같은 목소리로 평화롭게 얘기하시는 거야. 이분은 잠 안 재우는 게 고문이라는 개념도 없는 거예요. 전기로 지지고 이런 거 안 했다 이거지. 그렇게 순진한 분이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점점 깨어져갔고 짓눌린 사람들을 보면 분노하고 외치고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웅변가로 바뀐 거예요. 사람이 역사를 만들지만 사람 또한 역사의 피조물이더라고.”(이현숙,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김윤옥(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지도위원)은 이우정을 움직이는 동인을 기독교 정신에서 찾는다. 우는 자와 더불어 울고, 눌린 자와 더불어 슬퍼하면서 그들의 힘이 되어 주려는 노력이 바로 이우정의 ‘신앙이요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우정에게 ‘운동’이란 신앙의 고백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우정 선생님에게 요구되는 자리는 늘 힘든 자리, 아무도 안 가는 자리, 고난의 자리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물론 선생님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죠.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민중에 대해 주목하는 사회 전반의 의식 전환이 일어나거든요. 일부 지식인이나 청년 학생들이 그랬듯이, 양심적인 기독교 지도자들도 ‘아 정말 우리가 눌리고 밟힌 자들을 돌보지 못했구나.’ 하는 대각성의 시간을 맞이합니다.”(이현숙)

가장 짓밟힌 자는가난한 여성

이우정이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많은 일들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원운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70만 명의 피폭자를 발생시켰다. 애꿎은 희생을 당한 사람들의 약 10%가 한국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노역을 하던 이들이거나 배를 곯다 못해 일자리를 구하려고 군수공장이 많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건너간 이들이었다.

1974년,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었던 이우정은 공덕귀와 함께 국제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평화회의의 일정에는 원폭 투하 장소에 설치된 히로시마의 평화공원 답사가 포함돼 있었다. 현장을 둘러보며 원폭의 가공할 파괴력과 비참함에 몸을 떨던 이우정은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탑 앞에 이르러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그의 관심은 당연히 병고와 빈곤 속에서 비참한 삶을 꾸려가고 있던 3만 여 명의 한국인 피폭자들에게 쏠렸다. 이들은 일본과 한국 정부의 외면과 냉대 속에 최소한의 의료혜택과 생활보장도 받지 못했으며, 사회로부터 철저히 방치되어 자신들의 존재조차도 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우정과 공덕귀 그리고 재일동포 여성대표들은 한국원폭피해자 문제를 국제 평화운동의 주요 의제로 이끌어내고 세계 교회여성들의 지원과 연대를 약속받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잊혀진 사람들이었어요. 1970~80년대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모르고 묻혀 있을 때, (이우정이) 원폭 피해자들 문제를 가장 많이 사회문제로 제기하시고 그분들이 무료치료를 받도록 섭외하고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보상을 청구하는 등 원폭 피해자 지원운동을 아주 선구적으로 하셨어요. 그렇게 애쓰셨던 이우정, 공덕귀 선생은 돌아가시고, 3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 결실이 하나씩 맺어지고 있는 거죠.”(이현숙)
1980년대 이후에도 이우정의 활동은 여전히 그 뿌리를 기독교 정신에 두고 있었지만, 그 활동 영역은 교회의 담장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되었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이우정의 활동이 치열해지는 과정에서 얻어진 필연적인 결과였지만, 그간 교회 지도자들의 헌신과 애정을 필요로 했던 밟힌 자들이 뼈아픈 투쟁의 경험 속에서 단련되면서 제 힘으로 자신의 조직을 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쓸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결과이기도 했다.

1980년대 노동운동의 발전과 더불어 산발적으로 투쟁하며 각계의 지원을 호소하던 여성 노동자들을 비롯한 기층의 부문 운동이 자신의 힘을 축적해 감에 따라 여성운동 영역 또한 교회의 틀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자신의 조직을 갖게 된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적인 여성 조직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이우정·공덕귀·박영숙·조화순 등 대표적인 여성 운동가들이 모여 있던 한국교회여성연합이 그 공백을 메우며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의 유화국면 속에서 민중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여성의 전화, 여성평우회를 필두로 진보적인 여성단체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우정 역시 1980년 이래 여성운동·여성신학운동에 두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다. 그는 주류 신학의 남성 중심주의, 강자지배 논리, 서구 중심주의 그리고 추상적 사변주의를 비판하고 거부했으며, 추상적인 ‘민중’이라는 말 대신 체험적인 ‘밟힌 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가난한 여성이야말로 이우정에게는 가장 짓밟힌 자였다.

1986년, 권인숙의 성고문 폭로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연대활동을 펼치던 20여 개의 여성단체들은 마침내 1987년 2월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을 창설하게 된다. 여연의 초대 회장이 된 이우정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후배들을 키우며 사회적으로 여성의 몫을 증대하는 일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여성 그리고 평화

1992년 이우정은 70세의 나이로 제 14대 전국구 의원(민주당)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재야에서 조야로 가는 길에 잡음이 없을 수 없었다. 크게 보아, 이우정 개인을 넘어선 여성의 제도권 진입은 정치세력화를 갈망하는 여성운동계의 오랜 숙원이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의 정치권 진입이 곧 여성운동의 조직적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14대 국회가 시작될 당시 전체 의원 299명 중 여성 의원은 단 3명이었다. 그에게는 자산총액이 1,300만 원인 무공해 정치인이라는 수사가 따랐지만, 돈도 조직도 없이 뛰어든 정치판은 남성들의 독무대였다. 여성문제에 대한 남성 의원들의 무지는 속 터질 노릇이었다. 이우정은 싸워야 할 적이 명백했던 옛날, 탄압 받고 끌려가던 과거가 그리워질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의 고민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가정폭력처벌법을 성폭력특별법 안에 집어넣으려고 여성계와 여성 의원들이 그렇게 노력했는데, 국회 안에서 남자 의원들이 아무도 동의를 안 해 주는 거야. 만약에 그런 법을 만들면 남자들이 아침에 출근 못하고 줄줄이 잡혀간다나. 여편네 두들겨 패는 정도는 흔히 있는 것 아니냐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거야. 법사위원회에 있는 의원들이 모두 남자이니 여자 사정을 어떻게 알아.”(『이야기 여성사』 이우정 편)

개인적으로도 정치는 그에게 많은 갈등과 고뇌를 안겨 주었다. 재야가 대의와 명분 그리고 덕망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면 정치판은 코 앞의 당선과 자리와 이해관계가 철저히 지배하는 힘의 사회였다. 정치판을 움직이는 지배원리는 지금껏 이우정을 이우정답게 살게 했던 신앙의 원리와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주 충돌했다.

“신앙의 원리에 의하면 오른손이 하는 거 왼손이 모르게 하고 높은 자리 앉지 말고 제일 낮은 자리 가라고 하잖아요. 근데 정치권은 막 경합을 해갖고 무조건 차지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원칙들이 자꾸자꾸 충돌을 해요. 그런 것 때문에 고민을 참 많이 하셨죠.”(이현숙)
그러나 이우정은 ‘정치는 호흡하는 공기와 같다. 그 공기를 정화하려면 더 많은 여성이 참여해야 한다.’는 지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 여성의 최대 취약점이 정치적 열세임을 절감하고 여성할당제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1990년대 이우정의 운동을 규정하는 것은 ‘여성’ 그리고 ‘평화’라는 화두였다. 그는 분단이 우리 민족의 삶을 송두리째 옥죄는 원죄이며, 우리 여성들의 멍에 또한 분단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겼다. 1991년 서울에서 남·북 여성모임을 성사시켜 세상을 놀라게 한 그는 특유의 ‘부드러운 외교력’을 발휘하여 이듬해 평양에서의 남·북 여성모임도 성공적으로 치러 낸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북핵파동, 조문파동이 연이어 터지면서 남·북 민간교류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우정은 여성운동의 영역에서 한국 사회의 평화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후배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1997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를 창립하고 수석대표로 일했다.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바람은 노년에 접어든 그가 마지막 불꽃을 사른 일이었다.

2002년 5월 30일 이우정은 ‘남 힘들지 않게 어느 날 훌쩍 가고 싶다’던 평소의 바람대로 훌쩍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세.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가졌던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던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의 과제와 언론에 대한 아쉬움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많은 이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보상’, ‘심의’와 관계된 그 일, 본의 아니게 남들이 맡기 싫어하는 그 일을 어거지로 맡고서 떠나는 날까지 협박전화에 시달리다가 갔다. 그래서일까. 그가 떠나고 나서 신문들은 ‘어리석을 우(愚)’와 ‘곧을 정(貞)’ 자로 조합된 그의 한자 이름을 유난히 들먹였다. 마치 그 이름이 ‘어리석을 만치 곧았던’ 그의 일생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우정

1923년 경기도 포천 출생
1951년 한국신학대학 졸업
1953년 캐나다 토론토 임마누엘대학 졸업
1953 ~ 70년 한국신학대학 교수
1973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1974 ~ 76년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1977 ~ 81년 한국기독교장로회여신도회전국연합회 회장
1984 ~ 86년 여신학자협의회 회장
1985 ~ 91년 WCC세계선교위원회 부위원장
1987 ~ 90년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고문
1989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부회장
1992년 제 14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주당)
1994년 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1997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수석대표
1998년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통일고문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1998년 제 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1999년 아태민주지도자회의 이사
1998 ~ 02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이사장


*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 사진제공 / 경향신문, 박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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