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으로 바로가기

d-letter

한국 민중운동사의 거대한 뿌리, 박현채2


1961년 5월 16일,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남한 내 진보세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과 자유당 정권을 거치면서 교살 직전에 이른 진보적 논의들은 4·19혁명의 열린 공간 속에서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활로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세력들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사회당 외곽조직),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 등의 연합조직인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를 구성하고 진보적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통민청과 민민청은‘현 단계에서 민족 문제는 전략적으로 상위에 놓인 과제’라는 데 합의하고 통합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양대 조직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민민청의 서도원·도예종·하재완, 통민청의 이재문·우동읍(우홍선)·김배영 등이었다. 이들은 1·2차 인혁당, 남민전으로 이어지는 1960~70년대 반독재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나, 대부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법살(法殺)되고 만다. 

한번 변절한 놈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

이 무렵, 박현채는 우동읍·이재문 같은 사회당·통민청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다. 몸은 비록 ‘하산’했지만 심리적·이념적으로는 아직 ‘하산’하지 않았을 박현채로서는,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내건 이들 그룹에 거의 본능적인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통민청에 한 다리를 넣게 된 데는 한국농업문제연구회(농문연)의 동료 연구원 김낙중(75, 통일운동가)의 역할이 컸다.

“통민청에 끌어들인 게 나야. 내가 통민청 간사인데다 우리 사무실이 을지로에 있어 모임하기가 좋았어요. 통합 논의 과정에서 통민청 민민청 멤버들이 계속 들락날락했죠. 자연스럽게 박현채를 소개했고, 다들 아는 사이가 됐죠. 하지만 그때만 해도 가입은 안 한 상태였어요. 관심은 굉장히 높았지만 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냥 지켜보는 입장이었죠. 그러다가 5·16이 터지면서 통민청에 한 다리를 넣게 된 거지.”

5·16이라는 긴급 상황에 놀란 멤버들은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 을지로 농문연 사무실에 속속 모여들었다. 5월 17일이었다. ‘5·16을 어떻게 볼 거냐’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런데 당시 진보세력 내부에는 5·16 세력에 대한 묘한 기대감이 있었다. 5·16을 이집트의 나세르 등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제 3세계 군부쿠데타와 연관 짓는 시도도 있었고, 남로당 활동 전력이 있는 박정희를 좋게 보는 이도 많았다. 을지로 대책회의의 분위기도 이와 무관지 않았다.

“그래서 민자통 사람들은 김종필 씨도 옛날에 민청을 했다더라, 박정희 씨도 -후에 전향했지만- 옛날에 남로당을 했다더라, 좀 더 지켜보자 하면서 기대를 가진 거예요. 그때 박현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어. ‘아니다. 한번 변절한 놈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게 박현채의 강력한 주장이었어요. 그러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박현채 얘기가 맞다. 한번 변절한 놈은 믿을 수 없다. 튀자.’”(김낙중)

 


그들은 일단 잠복하여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별 생각 없이 어슬렁어슬렁 민자통 사무실에 나갔던 사람들은 모조리 잡혀가고,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잠적했던 사람들은 살아남은 것이다. 김낙중은 이 같은 박현채의 예지력을 지난날 유격투쟁의 과정에서 얻은 ‘체험의 결과’로 봤다. 한 달 후, 모 다방에서 만난 멤버들은 ‘언제까지 개별적으로 이렇게 도망만 다닐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 쿠데타 세력에 저항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낙중은 반쿠데타 조직 결성을 결의한 이 날의 모임이 바로 1차 인혁당의 뿌리라고 말했다.

박현채, 두 개의 심장

이렇게 해서 박현채는 합법적으로는 농경연 활동을 하면서 통민청 비밀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그의 활동은 조직 활동에 직접 가담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농업문제를 전공한 석사학위 소지자로서 한국 사회운동의 성격 규정과 관련한 이론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합법적인 활동을 하면서 비밀리에 당대 운동 주도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그의 이런 방식은 죽을 때까지 지속됐다. 『민족경제론』은 조직의 외부에서 학술과 운동·이론과 실천을 결합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과 고뇌의 산물이었다.
류동민(충남대 경제학과 교수)은 『민족경제론』이 ‘박현채라는 탁월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며,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민족주의 흐름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에서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 그대로 계승된 결과’라 했다. 실제로 1960년대 초 도예종·김영춘·김봉춘이 『영남일보』에 발표한 논문에는 『민족경제론』의 기본골자를 이루는 다양한 논의의 싹들이 포함되어 있다.

박현채가 비록 십대에 총을 들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숙지한 인물이라고 하나, 도예종·서도원은 연배로나 운동경력에서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선배였다. 또 1차 인혁당 사건에서 박현채가 1년 징역을 선고 받은 것은 바로 도예종을 은닉한 혐의 때문이었으니, 어떤 식으로든 이들은 피차간에 이론적인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1964년 8월, 무자비한 고문과 조작 시비로 파문을 던진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박현채가 보여준 늠름함과 의연함은 실로 빨치산 출신다운 것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에 함께 연루된 김금수(노사정위원회 위원장)는 인터넷 신문 코리아포커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취조과정이나 감옥에서조차, 당황하거나 주눅 든 기색을 그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처럼 행동했다. 이를테면, ‘담배도 음식인데 피의자들에게 음식을 굶겨서는 안 될 일이니 하루 담배 한 갑씩은 꼭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참에도 취조 과정에서 모두가 담배는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 하루는 담당 검사가 피의자들의 인품 얘기를 늘어놓는 여유를 보였다. 그때 그 검사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박현채 그 사람이 수상될 거야.’라고.”

1년 후 출소한 박현채는 농림부 차관을 지낸 주석균의 배려로 국민경제연구회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농업 문제 전문가로서 당대 일급 경제학자들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인혁당의 수난이 그를 지치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던 것일까. 박중기(민족민주열사추모연대 의장)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전혀! 서울대 강사 자리도 떨어지고 어디 갈 데가 없잖아. 그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없었어요. 민족경제론은 한참 후의 이야기야. 먹고살라고 간 거지. 거기 가면 연구도 할 수 있고, 자료도 뒤질 수 있고, 논문을 쓰면 원고료라 해서 주 선생이 얼마씩 집어주거든. 누가 논문 필요하다고 하면 대신 써주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살은 거지.”

『민족경제론』이 출간되는 1978년 이전까지, 박현채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조용범의 『후진국경제론』 등 수많은 책과 논문들을 차명(借名)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현채에게 학문이란 단순한 아카데미즘이 아니었고, 글(이론)이라는 무기를 든 또 다른 전장이었다. 그는 자칫 매문(賣文)으로 전락할 수 있는 논문 대필·차명 저서 집필에 혼신의 힘을 불어넣는다. 누구의 이름이라도 좋았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고작 중산층 논쟁 따위에 머물러 있던 경제학계에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를 제기하였고, 이를 민족주의의 과제와 결합시켜 정치경제학의 논리 속에 짜 넣었다. 과거의 추억을 먹고사는 전 세대 혁명가들과 달리 박현채는 급변하는 현실을 냉엄하게 지켜보며 소년시절부터 체화된 혁명이론을 구체적 현실과 조건에 적용하려 몸부림쳤다. 박현채의 이런 몸부림을 이병천(강원대 교수)은 ‘길 없는 길 속의 모험’이라 했고, 황광우(전 민주노동당중앙연수원장)는 ‘두 개의 심장을 지니고 살았다.’고 했다.

혼신의 힘으로 일궈낸 삶

중앙정보부는 서울 상대 출신의 경제학자, 빨치산 출신이라는 박현채의 상품성을 활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박현채는 얄미울 정도로 틈을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지도, 노골적으로 조직 활동에 뛰어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박현채 사전에 휴식은 없었다. 그는 늘 ‘쉬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1차 인혁당 후에 상황이 너무 안 좋았지만 그 양반은 그냥 가만히 있었던 적이 없어. 쉬어선 안 된다, 방관해선 안 된다. 구체적인 조직에 끼지 않아서 그렇지 항상 뒤에서 전략 짜는 데 조언하고 영향을 주고 그랬거든. 


 

이건 그 사람들도 뻔히 다 아는 사실이지. 2차 인혁당 때도, 남민전 때도 마찬가지였어. 그 사람들이 끌려가서 ‘현채 형한테 들었습니다.’ 소리를 안 했다는 거뿐이야. 박현채 소리가 한마디만 나왔어 봐. 저쪽에선 언제라도 끌고 가서 완전히 매장을 하고 싶은 사람 아냐.”(박중기)

박현채와 이들 리더 그룹은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했으나 유신 이후부터는 조직 문제, 현실대응 문제를 둘러싸고 종종 이견이 발생했다. 특히 2차 인혁당 8인의 희생자 중 하나인 이수병은 조직을 갖춰 당장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박현채는 객관적 조건과 변혁주체의 능력을 냉철하게 평가하지 않고 조직부터 만드는 것은 오히려 큰 상처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박중기)

박현채의 이러한 생각은 소년 시절 능선에서의 뼈저린 체험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견은 이견일 뿐 그들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통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던 1979년, 임동규에게서 남민전의 이재문·신향식·안재구 등이 사형 선고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박현채는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가! 나도 개입할까 했지만 너무 알려져 버려서 그만두었지.”라며 어린애처럼 팍팍 울었다.
그들이 지하 조직을 꾸리고 분투하는 동안 박현채는 합법공간에서 민족경제를 외치며 ‘역사적 분업’(임동규)을 수행했다. 각 부문의 운동에 개입하면서도 현실의 몽둥이를 피하기 위한 박현채의 노력은 점점 더 집요해지고 치열해졌다. 꼭 한번 자제력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자라면 누구도 자제하기 힘들었을, 그것은 5·18민중항쟁이었다. 광주가 본격적으로 피를 흘리기 직전인 5월 16일, 그는 광주에 있었다. 그는 광주에서 뼈를 묻을 작정이었다. ‘한판 칠려는’ 그를 기어이 끄집어낸 것은 박중기였다.

“논리가 아니에요. 직감이었어요. 절대 성공 못한다. 자기 조직도 없는 현채가 거기 껴가지고 야전사령관 할 수도 없어요. 사람을 막 도륙을 내는데 몇 사람 통해 지휘한다고 되나요? 덮어놓고 나오라고 했어요.”

1980년대 변혁운동의 세찬 물살 속에서 그는 구체적인 민중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정치적 민주화가 진전되자 사회구성체논쟁에 불을 지폈고,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는 가운데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로의 지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로 나뉘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구국의 소리’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받아들이는 후배 운동가들의 모습은 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박 선생의 논리는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고뇌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현장의 논리요. 단적으로 ‘구국의 소리’ 방송이나 마르크스레닌 원전에 매달리는 학생들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워했지.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니야.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는 아니라는 거지. 현장에서는 현장의 논리가 있는 거다…….”(임동규)

박현채는 흔들림 없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현장의 논리를 중시하는 실사구시의 자세로 해방 이후 남한의 변혁운동에 거대한 뿌리를 내렸다. ‘과거 39년간의 중요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치고 그가 관여하지 않았던 경우는 매우 적었다.’는 안병직의 표현(박현채 회갑기념논문집, 1995)은 다소 낯간지러운 수사에 불과한 것이지만, ‘혼신을 다해 쓰고 혼신을 다해 살았다.’는 박현채 자신의 고백에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울림이 있다.

서기 2006년, 사람들은 이제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사회구성체론의 시대는 이제 지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박현채의 삶과 그의 이론 속에 담긴 ‘역사의 현장성과 열정’마저 지우려 하는 것이다. 서관모(충북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좌익 진보 인텔리를 꼽는다면 박현채 선생 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이론적으로나, 살아온 계정이나 그만한 업적을 남긴 분이 없어요. 제자가 없어서 그렇지. 공식적으로 교수 하신 거는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에 조선대 몇 년 계셨던 게 전부잖아요. 그 분이 하신 일은 반드시 제대로 평가되고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글 /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대의 불꽃> 중
『전태일』·『김진수』·『최종길』 편 발표.
현재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의 기획위원으로 활동.

* 사진제공 / 경향신문, 박현채 전집·추모문집 발간위원회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