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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평화뿐이다

평화를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평화뿐이다

김명환 시 <고향의 봄> <병기수입을 하며>

글 최규화 (기자)​/ realdemo@hanmail.net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반가우면서 허무하다. 2018년 새해 들어 남북 사이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 한겨울 찬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훈훈하다. 1월 9일 남북 고위급 회담으로 시작해 21일 남북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참가에 합의하기까지, 불과 열흘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새해 첫날만 해도 ‘책상 위 핵단추’ 같은 단어들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하며 불안감을 고조시켰다는 사실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질 정도다. 남북이 함께 만든 화해의 훈풍이 우선 놀랍고 반갑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이리 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뭣 때문에 못했나’ 하는 원망스러운 생각도 든다.

2월 9일 개막하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은 5개 종목 46명 규모의 선수단을 참가시킬 계획이다. 남북은 ‘코리아(KOREA)’라는 이름으로 개회식에서 공동입장 한다. 남북 두 명의 기수는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입장하며, 남북 대표단은 한반도기가 그려진 단복을 입을 예정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모으는 것은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구성된 남북 단일팀.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팀 23명에 북한 선수 12명을 추가해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된 단일팀 구성은 논란도 낳았다. 올림픽 개막을 불과 20여 일 남기고 결정된 단일팀 구성 소식에 한국 선수들의 출전 기회 박탈과 전력 손실 등을 이유로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런 비판을 감안해 경기 출전 선수 선발권을 가진 감독은 한국 측이 맡고, 감독은 각 경기에 세 명의 북한 선수를 선발하는 것으로 합의는 이뤄졌다. 이로써 모든 논란이 가라앉을 수도 없고, 대회에 임박해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된 합의에 대한 유감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추진해야 할 만큼 ‘올림픽 최초의 남북 단일팀’이라는 대형사건이 가진 의미는 크다.

고향의 봄

비무장지대에서 제초작업을 할 때
고생한다며 너희들이 불러준
고향의 봄에 대한 답례로
우리가 왜 이은하의 밤차를 불렀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만 하지만
군관동무가 뭐라고 한참 지껄이다가
뒤로 돌아서자 팔뚝을 먹이는 너를 보고
기분이 마냥 좋았다

러시아풍의 장엄한 행진곡과
팝송조의 경쾌한 음악은
지뢰밭을 누비며 사십 년을 흐르지만
너나 나나 달빛이 처량하면
고향에 두고온 가난한 식구들을 생각하며
옛노래에 젖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지만
신작로 길을 따라 타들어가는 벼포기와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아픔으로 남아있지만
우리들의 노래로 우리들의 고향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일 수 있다면
이제는 우리도 옛노래로 만나고 싶구나

고성능 확성기를 흐르는
러시아풍의 장엄한 행진곡도
팝송조의 경쾌한 음악도
이제는 저희들의 나라로 돌아가고
남북으로 울긋불긋 꽃대궐 아름다운 산천
우리들의 옛노래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우리들의 봄을 목놓아 부르고 싶구나

김명환 시인의 시집 <젊은 날의 시인에게>(갈무리, 2017년) 맨 마지막(103~104쪽)에 실린 시다. 시집의 구성은 독특하다. 1부에서 5부까지 다섯 토막으로 나눠진 시인의 시력(詩歷). ‘참회록’의 현재에서 ‘고향의 봄’의 과거로, 예순을 눈앞에 둔 시인의 시간은 20대 중반 ‘젊은 날의 시인에게’ 거슬러 간다.

시집을 대표할 만한 시는 현재(2009~2017년)의 시를 담은 1부에서 찾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하지만 1부의 제목은 ‘참회록’. 시인은 무엇을 참회하고 있나. 이순(耳順)의 나이에 참회의 시를 쓰며 시간을 거슬러 ‘젊은 날의 시인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시인. 참회의 마지막에는 ‘고향의 봄’이라는 시가 놓여 있다. 1983년부터 1986년 사이에 쓰인 시들로 구성된 5부. 시인의 군인 시절 경험이 녹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대결의 첨단이자 평화의 보루인 비무장지대. 살의와 연민이 교묘히 공존하는 그 땅에 “지뢰밭을 누비며 사십 년을(이제는 칠십 년을 - 필자 주)” 흘러온 “러시아풍의 장엄한 행진곡과/ 팝송조의 경쾌한 음악”. 그 사이에서 들은 ‘고향의 봄’은 “남북으로 울긋불긋 꽃대궐 아름다운 산천”을 만드는 소망의 노래였다.

평창동계올림픽 남북 단일팀의 여러 가지 상징을 결정하는 데 크고 작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기와 ‘코리아(KOREA)’라는 명칭은 과거 단일팀의 선례에 따라 결정된 것. 문제는 단일팀의 영문 약칭 표기였다. 'KOR'은 이미 대한민국, 남한만을 가리키는 약칭 표기로 사용돼왔다. 고심 끝에 나온 대안은 ‘COR’. 고려 시대 이후 한반도를 부르던 프랑스어 명칭 ‘COREE’에서 온 것이다.

그밖에도 단일팀의 국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아리랑’을 부르는 것으로 무난히 합의됐다고 한다. 한겨울 평창에서 “우리들의 옛노래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고향의 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병기수입을 하며

매복을 서고 돌아온 밤이면
희미한 불빛 아래 쪼그려 앉아
남의 나라 총을 닦으며
그렇게 이 밤에도 나처럼
남의 나라 총을 닦고 있을
너를 생각한다

네 가슴을 겨누던 총구와
내 가슴을 겨누던 총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희미한 불빛 아래 너와 나는
남의 나라 총을 닦고 있는
남의 나라 총이 아닌가

마침 때를 같이하여, 병력 감축에 대한 정부의 계획이 알려졌다. 올해 7월 전역하는 병사부터 2주에 하루씩 복무기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방법으로 2020년까지 군 복무기간을 육군은 18개월, 해군과 공군은 각각 20개월과 21개월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현재 60만 명인 병력은 50만 명으로 줄어들 계획이다. 복무기간 단축과 병력 감축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시집의 100쪽에 실린 시 ‘병기수입을 하며’. ‘고향의 봄’과 마찬가지로 5부에 실려 있다. 매복을 하며 서로의 가슴을 겨누던 병사들. 그들이 들고 있는 것, 그들이 닦고 있는 것은 “남의 나라 총”이다. “나처럼/ 남의 나라 총을 닦고 있을/ 너를 생각”하던 시인은 문득 깨닫는다. “남의 나라 총을 닦고 있는” 그들이 바로 “남의 나라 총” 자체라는 것을, 지금도 남쪽에만 60만의 청년들이 한 자루 ‘총’이 되어 청춘을 보낸다.

병력 감축 계획이 알려지자 예상대로(?) 어느 보수 정당의 인사는 “대한민국을 통째로 북한에 갖다 바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는 말을 했다. 같은 정당의 또 다른 인사는 ‘단일팀에 반대한다’는 서한을 IOC에 보내기도 했단다. 아직도 모르나. 총으로 평화를 살 순 없다. 총으로 총을 막는 것은 끝없는 대결의 쳇바퀴를 더 빠르게 돌릴 뿐이라는 것을 지난 65년 동안 배우지 않았던가.

평화를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평화뿐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새로운 ‘평’화의 ‘창’을 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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