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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교육이 걸어갈 길

Special Theme 3 시민교육

민주시민교육이 걸어갈 길

일상 속에서 견지되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조철민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 chochulmin@gmail.com

간헐과 일상의 균형을 향해

2007년 한 기업 소유의 유조선 사고로 인해 유출된 기름으로 심각하게 오염된 태안 해안의 복구 작업에 기업과 정부의 대처가 더딜 때,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방재복을 입고 해안가에 앉아 걸레를 들고 돌멩이 하나하나를 닦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 2016년과 2017년에 걸쳐 일어난 촛불시위에서는 시민들이 왜곡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들고 구름처럼 모였고, 외신들은 이 경이로운 사건을 앞다퉈 보도했다. 촛불시위에 모인 시민들은 질서를 지키고, 집회가 끝난 후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시민사회의 전통적인 두 가지 기능인 어려움에 처한 동료 이웃을 돕고, 사회가 잘못됐을 때 그것을 바로잡는 활동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사건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돕기 위한 활동으로는 멀리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 88올림픽을 치르기 위한 대규모 자원봉사단 활동, 1997년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금모으기운동, 그리고 최근 세월호사건 수습을 위한 자원봉사 활동이 있었다. 바로잡기 위한 활동은 멀리 독립운동으로부터 민주화운동, 1980년 5월과 1987년 6월, 2008년 촛불과 2016~17년 촛불로 이어졌다.

이 사건들의 특징은 전 국민적인 대규모의 참여라는 점, 그리고 10여 년 주기로 분출되는 간헐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최근 들어 자원봉사 참여율이 하락하는 것을, 그리고 촛불민심이 표출한 변화를 향한 열망이 촛불 이후 현실정치의 과정 속에서 왜소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태안’과 ‘촛불’이 이제 일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한국 시민사회의 ‘성숙’은 아직 간헐적인 사건 속에서 주로 나타나고, 일상에는 아직 그 영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마을에도, 지역사회에도 작은 ‘태안’과 ‘촛불’들은 존재해 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일상에서의 영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됐을까. 그것은 정치나 사회가 우리의 일상과 괴리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나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도, 일상을 살아가는 것도 같은 시민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사람의 시민이 술자리에서 정치나 사회에 관해 토하는 열변과 그가 가정과 마을로 돌아가서 하는 행동 사이의 괴리에 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접하곤 한다. 간헐적인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던 성숙한 시민사회는 이제 일상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사회가 일상에서 존재할 자리가 마련돼야 하고, 다시 이를 위해서는 정치와 사회에 관한 우리의 인식과 일상에 관한 우리의 인식 간의 괴리를 줄여야 할 것이다. 즉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우리의 일상으로도 향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괴리된 정치·사회와 일상이 만나는 지점은 시민의 삶이다. 베버리지의 말처럼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정부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시민들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기에 시민의 삶을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성숙한 시민사회는 ‘시민’과 ‘사회’가, 즉 일상적 삶과 정치적·사회적 삶이 괴리되지 않고 서로 연결돼야 한다. 그런데 토크빌의 말을 빌리자면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즉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에는 다양한 갈래가 있을 터이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민주시민교육을 들 수 있다.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는 희망은 오래되고도 새로운 것”이라는 프레이리의 말처럼 민주시민교육의 출발은 멀리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애국계몽운동이나 이 시기 창립된 YMCA, 흥사단, YWCA의 교육활동과 같이 시민사회 주체들의 노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정부 수립 후 제도로서의 민주시민교육은 주로 반공교육에 기반을 둔 체제유지와 국민훈육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고, 이런 흐름은 꽤 오래 지속됐다. 이런 사정은 민주주의를 일상과 괴리된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지난한 과정을 거쳐 1980년대 민주화가 진전을 이루면서, 한국의 교육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제도로서의 민주시민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흔적을 1997년 제정된 교육기본법에서 찾을 수 있다 .

“교육기본법 제2조(교육이념):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2017년은 민주화의 결정적인 진전을 가져온 계기인 6월 민주항쟁 30주년이자 교육기본법이 제정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하지만 교육기본법의 이념은 아직 잘 구현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입시위주의 교육과 무한경쟁의 사회체계 속에서 인격의 도야와 자주적 생활능력 함양, 그리고 민주적 시민성의 육성은 법조문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또한 인격과 생활능력, 그리고 민주시민성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지만, 아직 이 세 가지는 별개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민사회의 성숙과 미성숙이 공존하고, 민주주의와 일상이 괴리되는 상황은 교육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도 교육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최근 많은 지방자치단체들이 민주시민교육 조례를 제정해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많이 제공하려 하고 있고,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에 민주시민교육의 활성화를 지원하는 제도의 도입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만 금기시되거나 소홀히 다뤄지는 경우가 많았던 한국의 민주시민교육이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계기가 다시 무위로 돌아가는 일을 막기 위해 우리는 어떤 민주시민교육을 만들어가야 할까. 그 답의 단초들을 찾기 위해 민주시민교육의 정체성을 이루는 세 가지 측면, 즉 민주시민교육의 내용으로서 ‘민주’, 학습주체로서 ‘시민’, 그리고 시민이 민주를 학습하는 통로인 ‘교육’에 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삶의 수단으로서 ‘민주’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민주주의를 마치 집안의 높은 곳에 모셔져 있는 ‘신주단지’처럼 생각하는 듯이 느껴질 때가 많다. 민주주의는 흔히 일상과 괴리된 별스러운 것, 도덕적 당위, 지켜져야 할 숭고한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민주주의가 지켜지기 위해 많은 노력과 헌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노력과 헌신을 왜 하는지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샤츠슈나이더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인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만들어졌지, 민주주의를 위해 인민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성취해야 할 목적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수단이다. 그 수단이 기여하는 목적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다. 대한민국 헌법이 천명하듯 시민들이 국가와 사회라는 틀 안에서 주인이 되고(民主), 함께 더불어 살며(共和), 존엄의 가치를 지니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만들어 가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신주단지’가 아니라 집집마다 있는 ‘도구’ 같은 것이어야 한다. 시민들이 민주적 삶을 일구기 위해 필요한 도구 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며 살아간다. 현대인에게 가장 친숙한 도구로 스마트폰을 떠올릴 수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스마트폰과 함께 지내고, 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자곤 한다. 반면 수도배관을 조이는 스패너와 같은 도구도 있다. 집집마다 하나쯤 있는 도구인데, 수도관에 물이 새는 경우처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찾게 된다. 민주주의가 도구라면 스패너와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매일 민주주의에 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무언가 잘못 됐을 때, 나의 권익을 지켜야 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민주주의라는 도구를 써야 할 순간이 왔는데, 이 도구를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려 찾지 못하거나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모른다면 쓸모가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살아가는 데 즐겨 사용돼 손때가 묻어 있는 도구여야 한다. 그리고 그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평소에 익혀둘 필요가 있는데, 민주시민교육은 민주주의를 익히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회를 만들어 가는 ‘시민’

우리 사회에는 교육에 관해 ‘개별화’라는 고정관념이 존재하는 듯하다. 교육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개별화된 사람들이 좋은 강사를 찾아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면 각자의 삶으로 흩어지는 모습이다. 민주시민교육 역시 마찬가지인데, 주로 개별화된 시민들이 교육을 듣고 관용, 정의감, 공동체 정신, 참여의식 등을 각자 함양해야 한다는 식의 이해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교육은 개별화된 채 이루어질지라도,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친구, 회사의 직원, 자원봉사 모임의 회원, 인터넷 카페지기 등. 시민들이 주인으로서 자신의 고유성을 형성하고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료 시민들과 더불어 사는 일의 의미도 중요하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民)들은 그 관계 속에서 정체성과 신념을 형성하고 지켜나간다. 가끔 민주시민교육에 참여한 학습자들이 ‘교육을 통해 배운 내용은 너무 좋은데,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자신뿐이라 힘들다’고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관계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다. 따라서 민주시민교육에서는 이런 점들이 고려돼야 할 것이다. 민주시민교육에 참여할 대부분의 시민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다가 교육장에 온 것이며,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을 품고 다시 그 관계 속으로 돌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일은 시민 개개인의 도덕과 성실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의 민주주의를 접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기 위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민주시민교육은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들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와 관계가 모여 가정이 되고, 마을이 되고, 궁극적으로 사회가 된다. 민주시민교육은 도덕적인 개인을 키우는 과정이기보다는, 관계를 통해 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를 키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인문에 기반을 둔 ‘교육’

듀이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모든 세대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며 교육은 이를 위한 산파”다. 민주주의가 사건과 일상 간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은 아마도 시민들이 직면하는 삶의 문제와 관련해 민주주의를 재해석하는 일이며, 이런 과정은 민주시민교육을 통해 시작될 것이다. 한때 인문학 교육의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인문학은 열풍으로 지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꾸준히 다뤄져야 할 주제다. 그리고 교육기본법에서 천명된 교육의 핵심요소인 인격의 도야, 자주적 생활능력,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은 서로 연결돼 있다. 인문학과 민주시민교육은 연결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인문학 교육은 단지 문화예술의 향유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지만,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삶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통해, 혹은 그림이나 음악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경험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갖는다. 인문학에서 문(文)은 글월을 뜻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무늬나 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문학은 본래 사람의 무늬나 결에 관해 배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무늬나 결을 어떻게 파악하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희망의 인문학을 설파한 쇼리스는 “인문학의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찾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우리 삶의 무늬나 결을 포착해 내고, 다른 사람과 그것에 관해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교육이 해야 할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학습자들이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들을 찾고 자기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민중교육을 주창한 허병섭의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외침도 이와 일맥상통한 것이 아닐까. 시민들에게는 지금 먼저 자신이 직면하는 삶의 모습이 어떠하며, 왜 그런 모습을 띠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습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설명할 언어를 찾도록 할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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