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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회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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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회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숙의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과 난관들

  이관후 서강대학교 글로컬한국정치사상연구소 연구원 / kwanhu.lee@gmail.com

촛불 이후 숙의, 심의, 토의 같은 새로운 수식어를 단 민주주의를 흔히 접한다. 이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제도로는 시민의회나 공론화위원회 같은 것들이 제안되고, 이미 실험을 거친 것들도 있다. 과연 이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일까?

대표제 민주주의의 실패
2016년 광장의 촛불은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의 한 형태이며, 작동하지 않는 대표제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대표제 민주주의를 보완하거나 대체하고자 하는 쪽에서도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은 것 같다. 광장에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면 시민들의 직접참여를 더욱 확대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논의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시민의회’라든지 ‘공론회의’라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대표의 위기(the crisis of representation)’라는 용어는 1960년대 후반 서구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할 때 흔히 등장한다. 투표율의 하락, 정당 가입자 수의 감소, 정치인에 대한 신뢰 하락, 제도권 정치에 대한 관심의 감소 등을 ‘위기’의 현상으로 본다. 선거로 뽑힌 대표들의 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는 18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첫 번째는, 앨버트 허시먼이 주장한 ‘무용 명제(futility thesis)’의 문제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모스카는 모든 조직화된 사회는 ‘어떤 정치권력도 소유하지 못한 거대한 다수’와 ‘정치권력을 가진 극소수 정치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유사한 시기에 파레토 역시 엘리트 지배가 역사의 상수이며, 보통선거권의 도입은 어떠한 진정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과두제의 철칙’이라는 법칙용어로 마무리한 것은 미헬스였다.

두 번째는 보통선거권을 통한 대표제 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현상들이 특정한 정당이나 정치인들, 유권자들의 이기적 행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행위자들이 나름대로 ‘합리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나타난 구조적 결과라는 주장이다. 나름의 합리적 행위들은 조직된 소그룹의 영향력이 다수의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의 선호를 압도하는 반민주적인 결과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의회의 본질로서 언급했던 토론의 부재를 들 수 있다. 19세기 후반, 칼 슈미트는 현대 의회주의가 그 정신적 기반인 토론과 공개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하원과 국회를 구성하는 대표들은 사실상 정당의 거수기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토론을 통한 공적 합의나 공적 궁리(public reasoning)의 과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참여민주주의에서 논쟁을 통한 민주주의로
서구에서는 68년 혁명 이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선거를 통한 대표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반발이 두드러졌다. 1970년대에는 그 대안으로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일단의 정치학자들은 공적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가 확실히 인간의 시민적 자아실현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의사결정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의식했다. 앞서 3가지의 위기 원인에서 결핍된 것은 실질적인 참여뿐 아니라 토론과 논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0년, 미국의 정치학자 조셉 베세트가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DD)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는 숙의민주주의를 ‘의사결정의 핵심적 과정으로 폭넓고 개방된 공적 논의(deliberation)를 취하는 민주주의의 형식’으로 정의했다. 이후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2000년대 중반의 한 정리에 따르면 숙의민주주의는 ‘입법과 같은 정치적 의사결정을 정당화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토론을 통한 논의를 사용하며, 정치적 결정의 영향을 받게 되는 모든 시민에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민주주의’로 이해된다.


✽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68혁명 당시 모습 ©연합뉴스

1980년대에 처음 나타난 숙의민주주의는 1990년대에 학계에서 일종의 ‘전환(deliberative turn)’을 만들어 낸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민주주의가 보통선거권과 주기적인 선거, 정당제의 발전, 정권교체와 같은 제도화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면, 민주주의의 질적인 측면이 거의 처음으로 주류 논쟁으로 떠오른 것이다. 90년대 당시 롤즈, 하버마스, 코헨, 엘스터, 드라이젝, 구트만과 톰슨, 피시킨 등 많은 연구자들이 이 이론에 관심을 기울였다.

숙의민주주의의 한국적 수용
최근 한국에서 시민의회나 공론조사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것은 촛불 이후에 생겨난 완전히 새로운 흐름이라기보다는, 서구에서 나타난 90년대의 전환이 2000년대 이후 한국에 꾸준히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전자민주주의’나 ‘온라인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일단의 민주주의 개념은, 최근 나타나는 시민의회 논의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전자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술돌파 형태의 방법론으로서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격과 그것의 대안으로서의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아직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인 수준에서 숙의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다듬어진 것은 아니었다.


위 2011년 미국 월가 점령 시위 ©연합뉴스
아래 스페인 신생 정당 포데모스의 모바일 플랫폼인 ‘루미오’

2016년 촛불 역시 직접/참여 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 그러나 ‘참여’에서 ‘숙의(심의/토의)’로의 전환이 대단히 급속하게 일어났다. 이와 관련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2011년 월스트리트점령운동(occupation movement)이다. 당시 참여자들은 스스로 이 운동의 정체성을 ‘직접적이고 투명한 참여민주주의’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미 비판이 존재했다. 지젝은 점령운동의 참여자들에게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고, 스테판 에셀은 분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언론인 토마스 프랭크는 이 운동이 ‘참가 숭배’, ‘직접 민주주의 숭배’로 변질되었으며, 과정이 곧 내용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보다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실제로 점령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오히려 다른 대안들이 주목받게 되었다. 대표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대안으로 숙의민주주의적 제도를 구축한 시도들이다. 아이슬란드는 2010년 헌법 개정을 위해 ‘오픈크라우드’ 방식을 채택해, 무작위로 선출된 일반 시민들이 헌법심의회를 구성해 개정안을 심사했다. 심의 내용 역시 인터넷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됐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국민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신생 정당 포데모스는 ‘루미오’라는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다. 루미오는 특정 주제에 대해 참여자들이 찬성, 반대, 기권, 차단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한 뒤 이유를 쓰도록 했다.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한 글은 다른 사람의 추천을 받아 상위에 노출되고 자연스럽게 토론이 이뤄진다. 이는 기성 정치인들이 생각지 못하는 ‘숨은 의제’를 발굴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외에도 스페인의 ‘마드리드 디사이드(decide.madrid.es)’라는 시민 참여 웹사이트, 아르헨티나의 ‘데모크라시(Democracy) OS’, 미국의 ‘브리게이드 미디어(Brigade Media)’, 핀란드의 ‘오픈 미니스트리(Open Ministry)’ 등의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 출현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참여보다는 논의에 초점이 있었다.


✽ 광장과 의회 사이에는 토론 과정이 필요하다.
사진은 서울시에서 주최한 ‘서울시민 미세먼지 대토론회’ ©연합뉴스

이러한 변화를 목도한 한국의 활동가와 학자들은 촛불 광장의 힘을 ‘시민의회’라는 제도로 구현하고자 했다. 촛불 광장이 민주시민으로서 학습과 훈련의 장이었다면 이를 더 지속적으로 확대, 심화하는 시민교육의 장을 만들어내고, 시민참여의 제도적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학계에서 논의되던 숙의민주주의가 이제 정치발전을 둘러싼 주류적 논쟁과 실천의 주제로 확실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갖는 맥락을 살펴보자. 이들은 참여민주주의나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이들은 전자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지만,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폐기하고 민회민주주의 차원의 직접민주주의로 이행하자는 주장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개개인이 전자투표를 통해 모든 이슈를 결정하는 방식에서 자기 통치의 자유는 획득할 수 있지만, 모든 현안마다 투표를 하다 보면 ‘참여의 피로감’ 때문에 갈수록 투표율이 떨어질 뿐 아니라 충분한 심의 자체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폭넓은 참여와 깊이 있는 토의는 양립하기 어렵다.

어떤 민주주의인가?
결국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시민의회나 공론화위원회는 ‘광장정치의 제도정치화’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한국에서 시민의회나 공론조사가 목표로 하는 전환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숙의나 심의/토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표성 확보와 다양한 사람들 간의 심의를 통한 공공선 확보,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교육의 장으로서의 기능 등 숙의, 심의, 토의를 모두 아우르는 넓은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면 강조점이 다소 다르다.

먼저 광장과 의회 사이에 숙의하는 토론과정이 필요하며, 시민의회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대체로 추첨을 통해 ‘미니 공중’을 만드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으로 논의된다. 여기서의 시민의회는 기존 의회를 보완/대체하는 대안적인 제3의회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개헌이나 선거법, 정치관계법은 물론, 외교, 안보, 환경 등 기존의 대의기구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다루는 대표기구로서의 ‘시민의회’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조금 다르게 숙의나 심의보다는 토론공화국, 토의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민주주의의 주체로서 ‘시민’을 육성하는 데에 더 초점을 맞춘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전반적으로 참여에서 토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의 시민의회들이 출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특정한 단위를 구성해서 이 단위가 심사숙고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식과는 확실히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그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공적 심의기구로서 소수가 추첨으로 뽑히는 시민의회를 추진한다면 제도적 완성도가 가장 높아지는 반면 민주시민교육의 장으로서의 활용도는 낮아진다. 반면 토의 문화의 활성화를 목표로 한다면 시민의회는 가능한 한 유동적인 형태로 많은 수가 만들어지는 것이 좋고, 대신 공적인 심의를 담당하는 기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심의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시민의회는 상당한 수준에서 정보의 습득과 전문가들의 협력, 토론의 경험을 갖추어야 할 것이고, 숙의에 초점을 둔다면 오랜 시간 참여 당사자들이 토론을 활성화하는 데 운영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시민의회의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남은 문제들
최근 기획재정부는 세계 최초로 국가단위에서 ‘국민참여예산제’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촛불 정부로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을 펼쳐 보이겠다는 청와대의 의지는 대단히 강력해 보이고, 행정부에서도 그러한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질적인 의미를 갖고 민주주의와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민의회가 숙의민주주의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시민의회의 옹호자, 주창자들이 시민의회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이론적, 실제적 어려움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것은 위험하다. 주장과 비판이 균형을 이룰 때 새로운 민주주의는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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