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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잊어도 되는 ‘추억’일까

`이제 잊어도 되는 ‘추억’일까

- 6.10민주항쟁의 도화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

글. 사진 권기봉 (작가, 여행가) warmwalk@gmail.com

올해는 6.10민주항쟁이 있은 지 30년이 되는 해다. 항쟁의 도화선이라 일컬어지는 ‘박종철 열사 고문 치사 사건’의 현장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지난 2005년 경찰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인권의 보루로 만든다며 인권보호센터를 입주시킨 이곳에는 애당초 직원 50여 명이 일하는 경찰청 보안3과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1976년 대간첩 수사업무를 위해 세웠다지만 실상은 ‘남산’이라 불린 안기부와 ‘서빙고 호텔’로 불린 보안사령부 대공분실 등과 함께 간첩을 잡는 것보다 만들어내는 데 더 능숙했던 곳이다. 화물차로 들이받아도 끄떡 없을 것 같은 1미터 두께의 철문과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다란 담장이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맞이하는 곳, 바로 옛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쥐색 벽돌로 지은 지상 7층짜리 본관과 부속건물은 이미 4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상당히 세련된 느낌을 준다.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선(線). 창틀을 벽체에서 약간씩 튀어 나오게 함으로써 질서정연한 대오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5층 전체와 3층 일부에는 좁은 창문을 사용함으로써 변화를 노리는 디자인. 그리고 정문에서 90도 돌려서 배치한 현관은 당시 세워진 다른 관공서들에 비해 위압적이지 않다. 이곳에서 행해진 무수한 고문의 기억들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더 의아하기만 한 외관이다.

이 건물이 독재자의 정권 유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史實)은 현관 옆에 “1976년 10월 2일 내무부장관 김치열”이라고 새겨져 있는 머릿돌에서 넌지시 가늠해볼 수 있다. 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법 살인’ 당시 검찰총장을 지냈고, 이후 제37대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해 대공분실과 사직동팀을 만들어 위세를 떨친 인물이다. 건물의 무게감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건물의 역할과 특징을 오롯이 느끼려면 현관이 아니라 건물 뒤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 낫다. 건물 뒤쪽에 있는듯 없는듯 자리잡은 쪽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반지름이 채 1m도 안 되는 나선형 계단을 만나는데, 그곳이 바로 입구이다. 피조사자들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끌고 온 뒤 바로 이 나선형 계단을 통해 조사실로 올라갔다. 피조사자들의 공간감과 방향감각을 잃게 하려는 의도였다.

조사실들이 몰려 있는 5층 내부 구조는 더 지능적이다. 그 중 509호실은 지난 2000년 실시한 리모델링 대상에서 제외되었기에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데 제격이다. 예컨대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은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반대로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고, 불을 켜고 끄는 스위치 역시 문 밖 복도에 있다. 설령 조사실 안에 피조사자가 혼자 남겨지더라도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대소변을 보는 모습까지도 감시당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고자 했던 것이다. 신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상대를 심리적으로 위축시키고 스스로를 인격적 파멸로 몰고 가게 하는 강온양면 고도의 심리적 압박전술이다.

비거덕거리는 마찰음에 인상을 찌푸리며 509호실 문을 여니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국화 한 송이와 박종철 열사의 흑백 사진 한 장만이 물끄러미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 너머 박 열사의 표정이 너무나도 평온해, 그가 이곳에서 고문을 받다 숨졌다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에서 시선을 거두는 순간, 고문의 추억은 이내 현실로 바뀌었다. 철망으로 싸인 형광등 불빛 아래 바닥을 제외한 벽면과 천정이 모두 방음장치로 뒤덮여 있던 것이다. 창밖 민간인 거주지로 비명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하기 위한 장치였다. 책상 한 개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철로 된 간이침대는 모두 굵은 나사로 바닥에 굳건하게 고정되어 있다. 피조사자가 자해를 하거나 그것을 들어 조사관을 가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방 면적은 고작 13제곱미터 남짓하지만 그 안에는 인조대리석 욕조와 세면대까지 설치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욕조의 길이는 고작 120여 센티미터로 성인 한 사람이 눕기 힘들 정도인 반면, 깊이는 60센티미터 정도로 꽤 깊다. 피조사자의 청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위해 고안한 시설들이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는 폭이 15센티미터는 될까 싶은 유리창이 있다. 피조사자의 투신을 막고, 그로 하여금 행여 고문을 받다 죽더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고립감을 느끼게 하려고 일부러 좁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겉은 시대를 초월하는 세련미를 자랑하면서도 그 내부는 지극히 지능적으로 설계한 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당대 가장 유명한 건축가이자 ‘한국 현대건축의 풍운아’라 불렸던 김수근이다. 서울대 건축과를 다니다가 일본 도쿄예대 건축과에 유학해 막 대학원을 수료한 김수근은 1959년 29살의 나이로 국회의사당 현상설계 공모에 출품한 작품이 선정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한국인에게 익숙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다.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을 비롯해 서울지방법원 청사와 남산 타워호텔, 자유센터, 세운상가, 워커힐호텔 더글라스하우스, 대학로의 샘터 사옥과 율곡로의 공간 사옥, 지금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이라고 부르는 옛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옛 국립부여박물관과 마산 양덕성당 등 방방곡곡 진진포포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특유의 감각을 치안본부 청사나 육사교훈탑 등 독재정권들이 발주한 공사에서도 발휘하다 보니 때로 무리수를 두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피조사자들의 인권이 무참히 유린될 수 있도록 ‘너무나 계산적으로’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은 김수근의 씻기 힘든 치명적 오점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 건물을 설계할 때 고려한 용도가 직접적인 살인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건물 내외부의 빈틈 없는 설계에 조사관들의 적극성이 겹치면서 1987년 1월 14일, 결국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이 건물에서 행해진 고문의 잔혹성이 23살 박종철 열사의 목숨을 제물 삼아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당시 박종철은 피의자나 수배자가 아니라 단순한 참고인 신분이었지만, 고문기술자는 대상을 가리는 법이 없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내가 아는 한 가혹행위는 없었다”거나 박처원 대공담당 치안감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망언까지 해가며 어떻게든 은폐하려 했지만, 그렇게 쉽게 마무리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삼류 개그보다도 못한 거짓말은 16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곧 탄로가 나고 만다. 시신 부검에 입회한 한양대병원 박동호 교수와 삼촌 박월길 씨의 증언을 인용해 “숨진 박 군은 머리에 피하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십 군데에 멍자국이 있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경찰은 사건 발생 5일 만에 “박종철이 조사실 내 욕조에서 물고문을 받다 질식사했다”고 정정 발표하고,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등 경찰관 두 명을 희생양 삼아 구속하기에 이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승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가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이 세 명 더 있고, 황정웅 경위와 반금곤, 이정호 경장 등 대공 간부 세 명이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결국 박처원 치안감 등이 은폐축소 조작을 지휘했으며, 처음 구속된 두 경찰관에게 입막음 대가로 1억 원을 주었다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이로서 박처원 치안감과 유정방 과장, 박원택 계장 등이 추가 구속됐다.

애초 경찰은 일부 경찰관들의 공명심과 직무 의욕이 넘쳐 벌어진 우발적인 사고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는 누가 보아도 신군부의 폭압통치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국민들의 분노는 이미 임계점을 넘고 있었고, 역사의 시계추는 한국 정치사의 분수령이 되는 6월 10일을 향해 가열하게 달려갔다.

제 국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80년대를 그야말로 고문이 일상화된 사회로 몰아갔다. ‘칠성판’에 눕혀진 사람이 비단 민주화운동가들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18살 어린 나이에 학도병에 자원해 해병대 장교와 군사학교 교수까지 13년을 직업군인으로 살아온 이장형 씨의 경우, 무려 57일 동안 거듭되는 고문 끝에 ‘간첩이 된 뒤에야’ 대공분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군 제대 후 일자리를 얻으러 일본에 갔다 온 것이 화근이었다. 일본에서 북한과 조총련의 지시를 받아 간첩 행위를 했다는 혐의였다. 결국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에야 가석방될 수 있었다. 2008년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명예가 회복되었으나, 이 씨는 이미 2년 전에 세상을 뜬 상태였다.

그나마 70년대까지만 해도 대공사건이라고 하면 정권 차원의 대형 간첩단사건이 대부분이었지만, 제5공화국 들어서는 이 씨처럼 금성충무무공훈장까지 받은 군인은 물론 어부나 촌부까지 잡아다 간첩이라고 누명 씌울 정도로 ‘칠성판을 짊어진 자들의 파이팅’은 드높기만 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고문으로 대표되는 국가폭력은 사라진 것일까. 경찰청 중앙현관 대리석 벽면에 새겨져 있던, 내란죄와 군사반란죄 등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두환이 쓴 ‘護國警察[호국경찰]’이라는 대형 휘호가 무궁화 그림으로 가려진 것은 지난 2004년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가 없으면 대공수사가 안 된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마찬가지이다. 200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로 변신한 그는 2012년 목사직을 빼앗길 때까지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닌 애국자”이며 자신이 한 고문은 “하나의 예술”이었다고 두둔해 왔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도화선으로 활활 타올랐던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30년이 흘렀다. 지난 2008년 남영동 대공분실 4~5층에 문을 연 ‘박종철 기념전실’은 현재 서울미래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상태다. 미래세대에게 한국 근현대사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줄 공간적 가치를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 무수한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가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인권 중시 사회에 어느 정도나 다다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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