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당시 76세

문익환-당시 76세

문익환(당시 76세)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출생
1932년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 재학중 신사참배 거부로 중퇴
1976년 ‘3, 1 민주 구국사건’으로 첫 투옥
1980년 ‘내란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1985년 5월 서울대 강연도중 이동수 동지 분신사건으로 인해 선동죄로 수배를 받고 자진출두 네 번째 투옥.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89년 3월 방북
1991년 6월 6일 소위 ‘분신정국’에서 장례위원장을 맡는 등 활동.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수감(여섯번째 투옥)
1992년 1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93년 4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 제창
1993년 8월 제4차 범민족대회 대회장
1994년 1월 18일 ‘새로운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전력하던 중 운명
문익환 목사는 한마디로 암울했던 과거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며 줄곧 재야 민주운동을 주도해 온 정신적 지주였다.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사회진출 후에도 평범한 목회자로서 신학대 강단에 섰던 문목사가 유신정권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 민족민주운동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은 지난 74년 10월 반유신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75년 8월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벌이던 장준하선생의 의문의 죽음을 계기로 평범한 재야인사에서 민족민주운동의 한 복판으로 뛰어든 문목사는 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사건]을 주도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돼 20년형을 선고받으면서 첫 번째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후 문목사의 삶은 절반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낼 정도로 정권의 끈질긴 탄압으로 점철되었다.
77년말 투옥 22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문목사는 지난 78년 10월 '유신체제 6주년을 맞아'라는 성명을 발표한 사건에 연루, 재수감됐고 유신정권에 종언을 고한 10.26으로 두번째 출소한 이후에도 80년 [YWCA 위장 결혼 사건],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86년 5월 민통련의장 당시 [5.3인천사건] 등 민주운동의 역사적 현장마다 항상 선봉에 서서 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감내해왔다.
이 과정에서 문목사는 85년 3월 민주통일국민회의, 민중민주운동 협의회 등 당시 재야단체를 통합한 민통련 발족을 주도하고 초대 의장으로 활약했으며 89년초 전민련의 출범 후에는 전민련 고문을 맡는 등 재야운동의 대부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문목사는 89년 3월 통일문제를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직접 논의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이 사건은 통일을 구두선처럼 외치면서 실제로는 탁상공론만 일삼았던 당시 정부 당국자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또한 민족의 통일의지를 온 민족에게 호소하기 위한 의거였다. 문목사는 이 사건으로 90년 6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형이 확정돼 또 다시 수감되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10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으나 91년 6월 재수감돼 통산 6차례에 걸쳐 8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문목사님은 기회만 있으면 "분단 50년 이내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분단이 고착된다"며 통일운동에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문목사는 93년 3월 출옥 후 노령과 계속된 감옥생활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 상임고문 겸 범민련 남측본부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제4차 범민족대회 남측 대회장을 맡아 통일운동에 주력해 왔다. 또 문목사는 '통일맞이 7천만 겨레모임'등 새로운 통일운동단체의 결성을 추진했다.
문목사는 이밖에도 옥고를 치르면서 느꼈던 단상들을 모아 '옥중일기'라는 시집을 발간한 것을 비롯, 자신의 건강유지 비결을 담은 '건강하게 삽시다'라는 단행본을 집필하는 등 저술과 강연활동에도 열의를 보여왔다.
1918년 만주 북간도에서 출생한 문목사는 윤동주 시인과 교분을 가져왔으며 34년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그후 평양고보와 광명고보를 거쳐 일본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으나 “나는 일본을 위해 싸울 수는 없다”며 학도병으로의 참전을 거부하여 만주로 돌아왔다. 해방 후인 47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한 문목사는 55년 미국으로 유학, 프린스턴 신학대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 재야운동에 투신하기까지 한빛교회 목사, 한신대교수 등을 역임했다.
‘통일은 됐어’라고 힘주어 외치시던 목사님은 유신의 압제에 분연히 맞서고 이후 치열한 반독재 투쟁과 통일운동으로 일관해 오신 민족의 큰별이셨다.

동지가 남긴 글

지난해는 민족 통일 운동이 심각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해입니다.
그 시련은 아직도 극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저는 범민련 남쪽 본부 준비 위원장으로서 제 직책을 다 못하고 도중하차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감천만입니다.
제가 남쪽 본부 위원장직에서 물러난 것은 통일 운동을 그만두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남쪽의 통일 운동을 더 크게 묶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북쪽과 해외 통일 운동세력과 손을 끊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분단 장벽을 결정적으로 돌파해 내야 할 1994년 벽두에 서 있습니다.
금년에 벽을 뚫어내지 못하면 1995년은 민족 통일 원년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아주 갈라져 버린다면, 우리는 이 벽을 돌파하지 못한 한을 천추에 남길 것입니다. 영원히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 찍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변혁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어내야 하는 변혁 가운데 민족통일보다 더 큰 변혁이 어디 있을 수 있습니까? 그 통일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집어삼키는 통일이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변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변혁은 남과 북의 변증법적인 대종합이어야 합니다.
일찍이 없었던 새 세계를 창조해 내는 일입니다. 후천개벽입니다. 90년 1차 범민족대회 이후로 통일 열기는 요원의 불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인모옹을 북으로 보내드린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백에 여든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기뻐 환영할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들의 뜻을 담아낼 수 있도록 통일운동의 틀은 커져야 합니다.
이 또한 기뻐 환영할 일 아니겠습니까? 7천만 겨레의 통일 의지를 담아낼 틀을 다시 짜고 , 세 지역의 통일 운동이 한 흐름이 될 수 있는 길 또한 진지하게 모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분의 답신을 기다립니다.

<범민련 북쪽본부 백인준 의장님 , 범민련 해외본부 윤이상 의장님 , 범민련 남쪽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님께 보내는 마지막 글 中에서>

추모시

<문익환 선생 영전에 바치는 신경림의 시 “큰 별이여 작은 꽃이여” 中에서>
당신은 길을 만들었다.
대포와 탱크의 장벽을 넘어 우리의 형제를 찾아가는 길을 내었다.
철조망과 지뢰밭을 지나 형제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길을 닦았다. 모두들 하나가 되지 않으면 못산다고 외치고만 있을 때 당신은 표표히 혼자 나가 길을 만들었다.
철조망에 긁히고 가시에 찔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당신으로 해서 우리는 보다 값지게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보다 행복하게 사는 길이 어데 있는가를 배웠다.
이 나라 나갈 길이 어데인가를 알았다 당신으로 해서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을 찾아가는 우리들의 발길을 막을자 아무도 없음을 알았다.
문을 활짝 열었지만 혼자서 길을 내었지만 당신은 혼자서만 가지 않았다.
우리들 뒤쳐지면 되돌아와 이끌고 쓰러지면 일으켜세웠다.
갈라지려는 자 주저 앉으려는 자 가슴에 안았다 그 따듯한 가슴에 그 포근한 가슴에

마석모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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