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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당시 50세

김영자-당시 50세

김영자(당시 50세)

1944년 3월2일 충남 출생
1963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가정학과 입학
1966년 대학 졸업후 정읍농림고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
1969년 3월 상계동에서 비닐하우스 시설원예 농사 시작
1975년 지역탁아소인 ‘원터 어린이집’ 운영
1977년-78년 ‘가톨릭농촌여성회’ 초대회장 역임
1986년 성남민주화운동연합 여성분과 위원장으로 활동
1989년 경기도 여성농민위원회 총무 역임
1990년 ‘큰우리 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으로 활동
1993년 3월 위암진단을 받고 투병
1993년 9월 11일 오전 9시30분 운명
66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뒤 정읍농고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이어진 동지의 삶은 자주적인 여성농민운동 조직의 건설과 지역운동의 대모로서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25년간 “고난의 가시밭길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동지가 77년 건설한 한국가톨릭 농촌여성회는 해방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농민 단일조직으로서 이후 89년 전국여성농민위원회를 거쳐 현재는 전국 60개 군에 조직을 갖춘 ‘전국여성농민회 총연합’으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평생을 여성농민의 권리회복을 위해 살아왔으며, 운명하기 얼마전에도 그동안 모아온 여성농민운동사 자료정리와 여성농민회의 재정자립을 염려했다.



동지가 남긴 글


<가톨릭 농촌여성회 회지인 [농촌부녀]에 나온 글>

농촌여성도 인간이다

농촌여성 운동은 여권운동이냐 아니면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하는 논란이 오가고 있으며 농촌여성이 하는 일에 대해서 퍽 걱정스럽고 위험스럽다는 듯한 표현을 자주 접해오고 있다.

농촌여성 운동은 단순한 여권운동이 아닌 농업문제의 본질적 차원에서 농민 안에 있는 농촌여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촌 내부의 구조적인 모순을 타파하고 농촌여성의 입장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교육을 실시함과 아울러 인간으로서 권익신장을 위한 일련의 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총체적인 농업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농촌여성이 피부로 느끼는 어려움과 고통을 실감할 수 있도록 하면서, 농업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농촌여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점이 여성문제만 다루면 모두 해결되는 것이냐? 하는 의구심을 일이킨 듯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농업문제 해결없이 농촌여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질 수 없으며 농업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해서 농촌여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농촌여성은 농업문제와 여성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농촌여성 스스로가 힘을 모아서 총체적 운동에 대등하게 참여하고 그 능력을 입증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같은 농민이라할지라도 처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여성문제의 어려움은 남성도 똑같이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하겠다.

농업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농민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인식된 남성 가운데서도 농업문제에 대한 논리는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시각을 지녔다고 하겠으나 그 실천 과정에서 표현되는 생활태도와 농촌여성 문제를 보는 시각은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요소인 남존여비적 인식의 속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우리 농촌 여성들로서는 묵과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농촌여성만이 안고 있는 과제와 농촌 내부적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를 알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적 고통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과 총체적 농민운동의 차원에서 농촌여성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케했고 실천적 단계에 임하여 농촌여성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제가 농촌여성 문제의 일면이며 여기에 농촌여성 운동의 필연성과 자주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농촌여성 운동은 여성해방운동으로서 가정을 파탄지경으로 이끌고 농사일을 떠나서 살기로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또한 남자를 닮은 여성으로 선머슴아처럼 되자는 것도 아니며 적대적 감정에서 남성에 대한 단순한 여성 상위적 입장을 내세우거나 대립관계에서 싸우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농가의 주부로서 의무와 희생만 강요해왔는데 이제는 농촌여성의 권리도 찾고 사람으로 존중받으며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온가족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가정에서 존중받고 사람대우 받는 여성이 사회의 부조리를 보고 어찌 그대로 참고 있을 수 있겠는가.

서로 존중하고 대우받는 부부를 보면서, 그 화목한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자란 자녀는 시키지 않아도 사람을 대우할 줄 알고 대우도 받을 줄 알게 되는 민주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러한 자녀로 구성된 사회는 민주화가 보다 더 앞당겨질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농촌여성 운동은 가정은 물론 사회의 민주화 운동이며 인간 평등적 인권운동이요 나아가서 인류사회의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이룩하는 데 참여하려는 진실한 여성으로서의 소망인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으로 믿기 때문이다.



추모의 글

삼가 고 김영자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저는 지금 조사를 읽는 이 순간 일년 전 성남연구 창간기념식 때의 여사님의 밝고 화사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여사님의 명복을 빌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영령이시여, 제 말이 들리십니까? 저는 김준기 선생과 4월혁명연구소 동지이며 김준기 선생이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평화통일 연대회의 감사를 맡고 있는 친구 기세춘입니다. 여사님께서도 잘 알다시피 저는 김준기 교수님을 사귄지도 얼마되지 않고 여사님을 뵈온지도 얼마되지 않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저는 누구보다도 두 분을 존경했고 좋아했습니다.

평화통일연구소에서 저에게 김준기 교수를 처음 소개한 어느 선배님 말씀이 김교수는 정말 우리 민중 민족 운동권에서 보기드문 이론가이며 몸으로 실천하는 일꾼으로 성품이 곧고 깨끗한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김교수를 두 번 만났을 때 말하기를 “여보 김교수! 자네는 정말 몸이 좋은 친구군! 사실 나야 맘으로만 운동을 하는 물이 간 놈이라 자네에게는 썩은 생선 냄새가 날 것이네. 그러나 자네같이 두려운 친구를 사귀면 나도 물이 좋아질 것 같으니 앞으로 지도편달을 바라네!” 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김교수를 존경하는 벗입니다.

또 저는 김여사님을 친구의 부인으로서가 아니고 여성운동가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다정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주어지면 꼭 한가지 고백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전에 말하지 못하고 마지막 가는 길에 조사로써 그 말을 대신하게 되었군요. 사실은 저도 김여사님과 똑같이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4H구락부운동을 열심히 했고 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 교편을 잡다가 장학금을 받아 대학에 조금 다닌 사람이랍니다. 그러나 저는 여사님처럼 힘 없는 농민을 위해 일해 보겠다는 의로운 결심으로 대학을 간 것이 아닙니다. 저는 대학을 나와 높은 관직에 앉아 힘없는 자들에게 거들먹거려 보려고 대학을 갔던 속물이었습니다. 김여사님에게 저의 이러한 참으로 부끄러운 말씀을 생전에 고백하려고 했는데 여사님은 이제 이승의 사람이 아니군요!

······

존경하는 여사님! 여사님께서 그렇게도 염려하시는 농촌은 요즘 냉해로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요 며칠동안 날씨가 좋아 우선은 한결 마음이 놓였답니다. 그러나 여사님이 바라시던 이상적인 농촌은 풍작만이 아닌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농촌은 우리들 삶의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가 바로 농촌이었고 이러한 농촌을 지키기 위해 여사님은 싸우셨던 것입니다. 근대 산업혁명 이후 우리 인류는 생산기능을 공장이라는 살벌한 물신의 신전에 거의 빼앗기고 소비기관으로 전락한 가족이라는 혈연공동체 외에 유일하게 남은 생산공동체적인 농촌이 살벌한 물신에게 해체되려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더구나 도시에서는 가족이라는 혈연공동체마저 핵가족화로 무너지려는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 오늘의 문명입니다. 인류는 이제 이리떼와 늑대들이 득실거리는 광야에서 너는 죽고 나만 살자는 피비린내나는 무한경쟁의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야수의 세계가 되려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서로 돕고 사랑하는 공동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공동체에 익숙한 인정미 넘치고 순박한 여사님과 우리들의 고향 농부들은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살벌한 야수의 정글에 버려져 앙코배기 코끼리떼들에게 짓밟힐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때에 여사님은 이승을 버리고 저승으로 떠나셔야 하니 어찌 눈인들 감으셨겠습니까?

존경하는 김여사님!

그러나 염려를 놓으시고 편히 잠드소서! 오늘 이 자리에 여사님을 보내기 위해 모인 여사님의 벗들 그리고 낭군님이자 동지였던 김교수의 벗들 그리고 성남의 여러 이웃들의 따뜻한 사랑과 인정에 넘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리고 사랑스럽고 씩씩하고 영민한 여사님의 자식들을 보십시오! 우리들에게 이러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한 우리의 보금자리를 결코 이리떼들이 짓밟지 못할 것입니다. 여사님께서 못다한 일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며 우리들은 그 몫을 결코 다할 것이오니 여사님께서는 편히 잠드소서!

여사님은 옥살이를 마다하지 않는 빈민운동가인 남편을 내조해야하는 고난에 찬 아내의 길도, 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의 길도, 여성농민운동가 그리고 여성 사회운동가로서 옹골찬 삶을 살아온 참으로 훌륭한 일생이었습니다.

영령이시여! 이제 편히 잠드소서!


<1993년 9월13일 평화와 통일을위한 연대회의 기세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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