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

김세진

김세진

- 1965년 2월 2일 충북 충주 출생
- 1983년 2월 경복고등학교 졸업
- 1983년 3월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자연 4계열 입학
- 1984년 3월 서울대 자연대학 미생물학과 진입
- 1984년 7월 감리교 자교교회 청년회장
- 1985년 3월 자연대학생회 부학생회장 및 미생물학과 학회장
- 1986년 3월 자연대학 학생회 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헌신적으로 학생운동함.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학생회장단 대표
- 1986년 4월 28일 이재호 동지와 함께 `전방입소 거부 및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 호라동 중 전방입소 결사반대 및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
- 1986년 5월 3일 운명(서울대 추모비에서 추모제 진행)
- 제 26차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인정자

86년 4월 28일 아침 9시30분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400여명의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반전반핵 투쟁위원장 이재호, 자연대 학생회장이던 동지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을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 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며 강제진압하려는 폭력경찰에 경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폭력경찰의 강제진압에 맞서, 두 동지는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시뻘건 불속에서 "양키고홈"을 외치던 두 동지는 추락하여 10분간이나 방치되었다. 동지는 전신 60의 3도 화상을 입었다. 동지는 5월 3일, 이재호 동지는 5월 26일 운명하였다. 이 투쟁을 계기로 반미구국투쟁은 급속히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한국의 운동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86년 4월28일 아침 9시30분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400여명의 서울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반전반핵 투쟁위원장 이재호,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 동지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을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며 강제진압하려는 폭력경찰에 경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폭력경찰의 강제진압 도중, 두 동지는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시뻘건 불속에서 “양키고홈”을 외치던 이재호 동지는 추락하여 10분간이나 방치된 채 감을수 없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재호 동지는 전신 80%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으며, 김세진 동지는 전신 60%의 3도화상을 입었다. 몇몇 병원을 전전하다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진 두 동지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으며 병원 주변은 전경차량 6대와 사복경찰버스 2대가 배치되어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미제의 예속 정권은 1981년부터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양키의 용병교육인 전방입소 훈련을 강제적으로 실시하여 왔으며, 이에 두사람은 “전방입소 훈련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군사기지화 결사저지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결성하여 한반도에서 핵무기와 미군을 철수시켜 전쟁을 방지하고, 핵전쟁의 참화로 멸족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위해, 미제의 예속과 억압을 뚫고 자유와 해방을 찾기위해 최선봉에서 투쟁한 것이다. 김세진 동지는 5월3일, 이재호 동지는 5월26일 운명하였다. 이 투쟁을 계기로 반미구국투쟁은 급속히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한국의 운동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B>동지가 남긴 글</B> <B><유서 - 마지막 편지></B> 대학에 들어와 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눈앞에서 개패듯이 끌려나는 선배와 동료를 바라보며 저는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았습니다. 이 땅 가난의 원흉은, 뼈아픈 분단의 창출자는, 압살되는 자유의 원인은 바로 이 땅을 억압하고 자신의 대소 군사기지화, 신식민지화시킨 외세이며, 그 대리통치 세력인 군사파쇼라는 것을. 저의 대학생활은 인간의 해방과 민중의 해방,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과정이었으며, 그것의 쟁취를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중략..... 민중은 바로 자신의 권력을 원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권력을 쟁취할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의 합법칙성이고, 인간존재의 합목적성입니다. 저의 행위는 한 순간의 영웅심이나, 학생회장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읽은 수백권의 책과 객관적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고뇌하며 오랜시간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를 믿어주십시오. .....중략..... 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자랑스러운 아들임을 가슴 뿌듯하게 느낄 때가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투쟁 속에서 그 날을 앞당길 것입니다. 1986. 4. 26. 세진 올림 <김세진 동지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B>추모시</B> <B>열사여 그대 누울 곳은</B> -서울대 반도문학회 공동창작-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고 / 사월 피빛이 붉어가는 가운데도 모두 가지를 향해 돌아앉은 듯 삭막한 이 곳 그대가 민족의 한과 민중의 삶을 되씹던 이 곳에서 그대 누울 곳을 찾읍니다. 양키의 정액받이라는 굴레를 쓴 채 누이는 제국의 병 ‘에이즈’ 하치장으로 떨어지고 형은 아직도 제국의 역사읽기를 멈추지 못하고 있읍니다. 열사여 그대 누울 곳은 / 섧디 설운 누이의 자궁과 형의 역사서일 것입니다. 지금 햇살같은 웃음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맞닿은 가슴마다 / 굳게 건 어깨마다 / 살아오는 새 날의 희망에 파안대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대 누울 곳을 찾습니다. 열사여 그대 누울 곳은 불순분자의 난동에 겨누어진다는 칼빈총 앞에 여지없이 드러난 그들의 작은 희망 / 여지없이 산산조각날 그들의 넓은 가슴 바로 거기여야 합니다. 붉게 문드러진 그대 몸의 누울 곳은 민족의 피가 거침없이 흐르는 이 산하 바로 우리가 함께 누울 그 곳입니다. 열사여.

이천 민주공원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