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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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코미디


모든 세대와 계층이 소외감과 박탈감을 하소연한다. 어린이들은 과외에 시달리느라 유년기를 반납했다하고, 학생들은 입시 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불만이다. 장애인은 마음대로 외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시위하며, 노동자는 임금과 처우 개선을 부르짖고, 여성은 일과 가사 노동의 이중고에 시달린다고 한다. 동성애자는 편견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명퇴자들은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고 한다. 직능과 나이별로 뭉쳐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실버 세대도 빠질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직후에 했던 말로 기억한다. “모두 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수십 년 전부터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잘 견디어 왔습니다” 정말 그렇다. 모두들 내일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올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지만, 오늘도 아이들은 자라나고 꽃은 피고 진다. 컴퓨터와 핸드폰도 장만했으며, 집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얼마나 더 풍족해져야 불만이 사라질까.

여기 인생의 황혼기를 즐겁게, 그리고 보람차게 보내는 노인들을 만나본다. 어느 세대, 계층보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지만, 친구와 가족과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은 노인들. 그들로부터 웃음과 활기를 배워본다.

잭 레먼과 월터 매튜는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영화 출연이 끊이지 않은 행복한 배우였다. 젊은 시절부터 숱한 명작에 출연해 각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두 스타. 말년에는 성격, 취향이 달라 늘 티격태격하면서 인생의 황혼기를 함께 하는 오랜 친구 사이로 분해, 실버 무비계의 인기 스타로 장수했다. 이들이 구현한 할아버지상은 미워할 수 없는 심술 영감이다. 2000년에 월터 매튜가 2001년에 잭 레먼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살가운 정을 삐딱하게 표현해온 건장한 노인의 유쾌한 콤비 플레이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도날드 패트리 감독의 1993년 작 <그럼피 올드맨 Grumpy Old Men>은 잭 레먼과 월터 매튜의 대표적인 실버 무비다. 호수와 숲에 둘러싸인 미네소타의 워바셔. 그림처럼 아름다운 전원 마을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으니, 56년 동안 담장을 마주하고 살며 서로를 골탕 먹이는 일에 몰두해온 심술 영감 존(잭 레먼)과 맥스(월터 매튜) 때문이다. 상대를 모욕하는 인사로 아침을 시작해 차 안에 썩은 생선 집어넣기, 지붕에 뜨거운 물 붓기, TV 볼 때 리모콘으로 방해하기 등 아이디어 만발이다. 어느 날 이들의 앞집에 아름답고 정열적인 독신 미술 강사 아리엘(앤 마가렛)이 이사 오면서, 두 홀아비의 구애 작전에 불이 붙는다.

양로원에서 TV를 보는 장면이 나오는 실버 무비에는 “<그럼피 올드맨>을 봐야한다”는 대사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 덕분에 1995년엔 하워드 더치 감독의 속편 <그럼피어 올드맨 Grumpier Old Men>이 나왔다. 곁에 없으면 궁금해 견디질 못하면서, 막상 만나면 티격태격 서로를 못살게 구는 두 할아버지의 모습은 살가운 표현을 하지 못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말년의 삶, 그대로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는 요즘 세대에겐, 이들의 아옹다옹 우정이 늙은이의 주책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브로드웨이 무대극을 원작으로 한 허브 가드너 감독의 1996년 작 <트러블 커플 I`m not Rappaport>에서는 젊은 날의 신념을 버리지 않은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접한 노동자들의 궐기를 가슴 깊이 담아두고 살아온 노인 냇(월터 매튜). “가진 자의 착취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하다”는 신념을 갖고, 슈퍼의 물건값 하나 그대로 지나치지 않는다. 뉴욕 시장 직속 자문 기관인 소비자 문제 상담소의 암행 감사를 자처하며, 사사건건 감시의 눈초리를 멈추지 않는다. 냇이 일으키는 소동을 뒤치닥거리하는데 지친 딸은 우리 집으로 들어와 조용히 사시라고 애원을 한다. 어느 날 공원에서 아파트 관리인으로 15년을 살아온 조용한 흑인 카터(오시 데이비스)를 알게 된 냇. 늙은 카터를 내쫓으려는 아파트 주민 대표에 맞서 카터의 변호사를 자임한다.

사회주의자의 꿈을 안고 살아온 다혈질의 백인 노인과 현실 순응주의자로 살아온 흑인 노인. 서로 다른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지녔지만, 바른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젊은 날의 꿈과 신념을 잃지 않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두 할아버지의 안간힘을 잘 조명하고 있다. 상상과 회상을 통해 자칫 처지기 쉬운 극 분위기를 잘 살려낸 점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쿵푸 선생 Pushing Hands>은 <센스 앤 센스빌리티>와 <와호장룡>으로 세계적인 감독이 된 대만 출신 감독 이안의 1992년 작이다. 미국 여자와 결혼하여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네 집에 살러온 주 노인(랑웅). 집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는 파란 눈의 며느리와 붓글씨를 쓰는 주 노인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 크고 작은 트러블이 끊이질 않는다. 견디다 못해 가출한 주 노인은 중국 음식점 접시 닦이가 되나, 행동이 느려 해고당한다. 그러나 주 노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연마해온 쿵푸 실력으로 노인 센터의 건강 교실 강사로 홀로 선다. 이민 간 아들, 딸을 따라 낯선 나라에 가서 외롭게 살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처럼 피부에 와 닿는 내용이다.

피터 시걸 감독의 1996년 작 <프레지던트 My Fellow Americans>에서는 은퇴 후의 바람직한 대통령상을 만나볼 수 있다. 공화당 소속 전직 대통령 러셀(잭 레먼)과 민주당 소속 전직 대통령 매트(제임스 가너)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을 외치던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요리책과 자서전, 강연으로 푼돈을 벌고 있다. 대통령 자리를 노린 부통령이 현직 대통령은 물론 두 전직 대통령까지 모함하자, 앙숙이었던 러셀과 매트는 워싱턴에서 오하이오까지 종횡무진하며 사건을 해결한다.

촌철살인의 대사를 주고받으며, 한국산 소형차를 타고 맹활약하는 두 전직 대통령 할아버지가 어찌나 사랑스럽고 든든한지. 비록 정치 노선이 달라 으르렁거리기는 했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대통령이었다는 체면 따위는 완전히 내던지고, 사건 해결을 위해 의기투합하는 두 전직 대통령이라는 가상의 소재로 만든 실버 코믹 액션물이다.

 

글_옥선희
비디오, dvd 칼럼니스트
oksunny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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