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역사기념관

평화를 둘러싼 치열한 기억투쟁_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과 평화기념자료관

평화를 둘러싼 치열한 기억투쟁


-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과 평화기념자료관 -


양금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획예산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과거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평가하고 기억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집단도 마찬가지로 특정한 사건을 자신들의 정체성과 정치적 지향이 상처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리한 면은 최대한 부각시키고 불리한 면은 가능한 한 잊어버리거나 숨기려고 한다. 정치세력들 간의 기억과 망각을 둘러싼 이와 같은 갈등과 투쟁, 타협의 흐름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항상 존재하여 왔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지상최대의 격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와 그 엄청난 희생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놓고 일본의 정치세력들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평화’의 의피를 쓰고 치열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다.

 

  오키나와의 역사
  오키나와는 1429년 최초의 통일 류큐왕국을 세우는 등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가져왔으나, 1872~1879년의 이른바 ‘류쿠 처분’ 과정에서 일본으로 강제 병합되어 자주성을 상실하게 된다. 병합 후 류쿠는 일본 내의 다른 행정구역들과 제도적인 동질화가 진전되어 1921년 경에는 제도적 측면에서 차이가 사라지고 형식상으로는 일본의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그러나 오키나와현이 되었다고 해서 일본 본토인으로부터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그리고 오키나와 사람이 완전한 ‘일본인’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며, 바로 이것이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엄청난 희생, 패전 이후 일본국왕의 요청에 의한 미군의 오키나와 장기 점령, 1972년 일본 복귀,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과 ‘평화’를 둘러싼 기억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시즘의 미학을 보여주는 평화기념공원
  오키나와 남쪽의 이토만시 마부니 언덕 60여만 평의 광활한 대지에 오키나와전을 기념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짙푸르게 펼쳐진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이 언덕은 2차대전 당시 오키나와 수비를 담당하던 제 32군(당시)이 사령관의 자결과 함께 종말을 맞이햇던 곳이며, 지휘계통이 마비된 수많은 일본군이 그들의 ‘전진훈(戰陣訓)’에 따라 민간인과 함께 희생을 강요당한 역사적인 장소 중의 하나다.
  기념공원의 조성은 72년 5월 15일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시점에 맞추어 정부 조도 하에 착수되었고, 73년 10월에는 평화기념자료관을 착공하여 75년 6월에 개관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1억 3천만엔의 정부보조로 자료관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는데, 이는 오키나와의 일본복귀 기념 최대 이벤트인 오키나와 해양박람회의 개막 1개월 전의 일이며, 또한 왕세자가 오키나와를 공식 방문하는 일정과도 맞물러 있다. 이것은 ‘평화’라는 명분으로 ‘침략전쟁의 당사자’라고 하는 과거의 기억을 희석시키고 과거에 스스로 포기해 버렸던 오키나와 사람들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념공원은 평화기념당, 평화기념자료관, 평화의비, 국립전몰자묘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오키나와 관광의 명소로 연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 여기에는 당시에 한국정부에서 세운 한국인위령탑도 있어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은 반드시 들르는 모양인 듯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에는 일어, 영어 와 함께 한글도 표기되어 있다.



 
  공원 입구 왼쪽에 높이 솟아있는 건물은 78년에 개관한 평화기념당으로 높이 45미터의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내부에 12미터 높이의 오키나와 평화기념상이 놓여져 있으며 평화를 기원하는 미술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시설이다. 이 기념당에 대해서는, 정치와 종교가 결합하여 전쟁을 교묘하게 미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을 모르는 유명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이 있다. 역사에 대하여 가슴으로 깊이 고민하지 못한 자의 예술작품은 기념물로서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의미를 변질시킨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정부 주도로 조성한 기념공원의 숨겨진 핵심은 79년에 건립한 국립오키나와전몰자묘원으로 약 18만 명의 희생자를 안치하고 있다. 이 묘원은 그야말로 기념비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데 참전자를 추모하는 각종 위령탑 50여개가 일본 각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면서 테마공원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 일본 본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여명의 탑’이 바다를 내려다보며 언덕의 정상에 서 있다. 안내원을 통해 장렬한 전장미담을 들으면서 찾아온 참배객들이 향을 사르고 꽃을 바치고 절을 하는 대상은 바로 오키나와 수비군 사령관으로 ‘전진혼’에 따라 목숨을 바칠 것을 부하들에 요구하고 참모장과 함께 자결한 우시지마의 위령탑이다. 이 탐은 52년 우시지마의 부하들과 오키나와 불교회, 토건업자 등이 건립하고 62년 일본정부의 원조금으로 개수되었는데, 보는 이를 파시즘의 미학에 빠져들게 하는 힘을 느끼게 하는 대표적인 ‘권위’의 심볼이다.
  이처럼 오키나와에 세워진 위령탑의 상당부분은 ‘전쟁을 참미’하는 비문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60년대 이후에는 이 경향이 더욱 현저해진다.

 평화기념자료관을 둘러싼 갈등

  평화기념자료관은 75년 6월에 개관하였으며, 2000년 4월에 신관으로 이전하였다. 오키나와전의 역사적 교훈을 올바르게 다음세대에 전하고 전세계에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호소하며 항구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개개인의 전쟁 체험을 담아 설립되었다.

  그러나 자료관 건설은 주민의 의견을 반영할 기회도 없이 졸속으로 추진되었기에 그에 따른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민간차원에서의 자료관설립운동이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악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골 수집 때 모아진 군대자료만으로 상설전시장을 채우려고 하는 등 관료주의적 성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관의 전시는 그야말로 야스쿠니 신사의 “육군기념관” 그 자체여서 입구에는 대형 일장기와 우시지마 사령관의 군복, 군도 등의 유품류를 전시하고, 전시장 안의 진열 케이스에는 총기, 도검, 철모, 훈장, 전진훈 등이 정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군대관계의 자료는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일반주민의 전쟁체험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군대 중심의 전시장이었다.

  이에 대해 현지의 역사연구그룹은 전시내용 개선을 요구하였다. 오키나와전의 실상의 왜곡·은폐, 위령탑의 비문이라든지 전적지 관광버스에서 보여지는 일본군 찬미와 순국미담의 유포, 전쟁유적의 파괴, 그리고 전쟁처험의 공동화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오키나와전을 생각하는 모임’이 조직되어 전시내용 개선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지료관 설립의 기본이념’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77년부터 전시내용의 개선이 시작되어 주민의 체험증언을 중시한 증언의 방을 마련하고, 오키나와전의 전체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증언을 추출하여 전시 스토리를 구성, 새롭게 문을 열었다.


  2000년 4월에 개관한 신관은 4천여 평의 부지에 연건평 3천여 평의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오키나와 전통의 건축양식을 살려 하나의 건물이지만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의 촌락처럼 보이도록 지어졌다. 시설의 특징은 자라나는 세대를 위한 공간을 충분히 배려하고, 5개의 주제별 상설전시를 통해 전쟁체험을 보고 느끼면서 전시실을 나서면 곧바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전쟁과 평화’를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하고 있는 점이다.
  신관의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시변경사건은 보수적인 오키나와현 수뇌부의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역사인식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로, 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집단자살 강요, 스파이 색출을 명분으로 한 주민학살 사실을 숨기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세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그러나 주민의 반발에 의해 이 사건은 원래의 전시 기본안을 관철 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지기는 하지만, 진실을 감추려고 하는 세력과 주민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세력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자료관의 상설전시장은 오키나와의 과거 역사에서부터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증언과 패전 이후 미군점령기를 거쳐 일본복귀까지의 경과 등을 주제별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특히 미군에 쫓겨 숨어든 주민과 군인이 뒤섞인 동굴 속에서의 실상을 보여주는 전시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전시변경사건에서 가장 핵심이 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아무 생각 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은 대변할 수 있는 물적 자료의 부족을, 전쟁을 체험한 주민의 증언으로 엮어 글과 영상 및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 당시의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한다.


 
  또한 청소년을 주요 대상으로 한 미래를 향한 평화창조의 장으로서 프로세스 전시실을 두고 있는데, 상황을 인식하고 느끼고 이해하고 보다 깊게 조사하고 발표하는 일련의 흐름을 거치면서 구조적 폭력이라든지 21세기 평화창조에 관한 문제 등을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는, 그야말로 실천적 평화학습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료관은 최신 하이테크 기술을 구사한 다양한 자료전시와 함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하고 방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연구 활동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평화의 비’가 의미하는 것
  95년 6월 23일 점화된 ‘평화의 불’을 중심으로, 전쟁 당시 오키나와를 포위한 1500여척의 미군 함정과 그로부터 날아드는 엄청난 함포사격을 나타내는 ‘철의 폭풍’을 이미지화한 지그재그 형태로 희생자 각명비 (‘평화의 비’)가 조성되었다. 여기에는 2003년 6월 23일 현재 총 23만 8,429명이 각명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외국인은 한국인 326명을 포함하여 1만 4,526명이다.
  ‘평화의 비’의 최대의 특징은 오키나와전에서의 전몰자의 이름이 적·아군, 전투원·비전투원,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 없이 국적을 불문하고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전투원의 경우 부대와 계급명을 붙이지 않고 일개인으로 환원하여 기록하는 것에 의해 ‘전쟁미화’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 ‘평화의 비’는 위령탑으로서 건립된 것이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라는 측면이 중심이기 때문에 향로와 제단이 없다. 그러기에 2001년 6월 23일 고이즈미 총리가 여기에 참배한 것은 그 본래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야스쿠니 신사화 하려는 행위라는 비난의 여론이 생겨나고 있다.
  오키나와전을 체험하지 못한 자만이 남게 되는 수십년 후에는 ‘평화의 비’의 기능과 역할은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강해져 차세대에도 ‘전쟁반대의 마음’을 키워주는데 있다고 한다. ‘평화의 비’는 오키나와 주민의 과거에 대한 ‘관용의 마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모든 전쟁을 부정하는 ‘오키나와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화’를 위해 계속되는 투쟁
  오키나와 전투는 전선이 사라지고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라져 모든 사람들이 전쟁으로 내몰린 총력전이었다. 이는 일본군에 의한 전면동원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군 함대의 무차별 함포사격이 초래한 것이기도 하였다. ‘히메유리학도대’로 대표되는 오키나와 전투 이야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결국 순국한 일본인을 미화하는 일종의 야스쿠니신사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 사회에서는 반전평화의 슬로건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바로 히메유리가 지닌 인기의 비밀과 야스쿠니 신사로 이루지 못햇던 전후 내셔널리즘의 재구축논리가 감추어져 있다.

  전쟁을 경험하고 미군 점령기를 거쳐 지금도 전체 면적의 20%가 미군 기지, 그것도 유사 시 동아시아의 발진기지로 위치 지워진 상태에서 항상 전쟁의 불안을 가슴 속에 안고 생활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러한 군국주의 부활에 대하여 강한 우려를 나타냄과 동시에 역사의 올바른 기억을 통해 ‘평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양금식
사진 조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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