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통일의 꽃이 넘은 분단의 벽 임수경 방북 사건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북의 행정구역상으로 개성 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 서울에서 서북방으로 62km,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km 떨어진 이곳 판문점은 유엔군과 북한군의 공동경비구역(JSA)으로 7천만 겨레의 통한이 서린 장소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지 60년을 맞는 올해도 이곳이 상징하는 분단의 현실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철저하게 옭아매고 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분할 점령했을 때, 분단체제가 환갑을 넘기게 되리라 그 누군들 상상이나 했을까!
또한 스물 두 살의 처녀가 백두산에서 출발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던 89년 한여름 전만 해도 저 북녘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산다고 생각한 남녘 사람들이 얼마나 됐을까!

 

분단체제의 통일운동
좌우 이념보다 자주적인 통일국가가 우선이라는 김구, 여운형 등 선구적인 지도자들의 예지가 반민족세력에 게 꺾이고 마침내 분단은 비극적인 전쟁을 유발시켰다. 동족끼리 잔혹하게 살육했던 만 3년 동안의 한국전쟁을 겪은 뒤 우리는 서로를 ‘괴뢰’ 또는 ‘원수’라 부르면서 적대시해왔다. 남과 북의 정부는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통일을 이용하려 들었다.


하지만 민중은 달랐다. 4·19혁명 직후 민주화의 열기가 거세지면서 통일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했고 이에 관한 많은 논쟁이 벌어졌다. 대학생들은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을 발족시켰고 혁신정당과 민주운동단체들은 ‘민족자주통일협의회’를 구성하여 통일운동에 힘을 집중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정치군인들은 수천 명의 혁신계 인사들과 학생들을 검거함으로써 통일과 민주화의 불씨를 신속하게 잠재웠고 그 뒤 오랜 암흑이 이어졌다. 남북 관계도 그랬다. 1972년, 분단 이후 최초의 당국 간 밀사외교의 성과로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됐으나 유신체제 성립에 이용됐을 뿐이다. 80년대에도 정부 차원의 간헐적인 남북 교류가 진행되었으나 양쪽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중단되곤 했다.


그러다가 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변화된 정세는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민간 통일운동을 다시금 고양시켰다. 이후 88년 서울 올림픽의 남북공동개최 논의는 통일 열기에 더욱 불을 지폈다.

 

88년, 3월에는 서울대생 김중기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와 27년 만에 6?10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고 5월에는 같은 대학 조성만 열사가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다.’라는 유서를 뿌리고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해 반미자주화운동을 각성시켰다.
한편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등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학생운동과 적극 연대하면서 통일운동은 각계각층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60년 4?19 직후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었다. 광범위한 통일 열기에 밀려 갓 취임한 대통령 노태우는 남북 인사의 교류와 해외동포의 자유왕래를 보장하는 ‘7?7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한편 북한의 조선학생위원회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이듬해 7월, 평양에서 개최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을 초청했다. 이를 수락한 전대협은 평양축전 참가를 89년 주요사업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당시 전대협 평양축전준비위원회(축전준비위) 위원장이었던 전문환(38) 씨는 당시 상황을 들려준다.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반드시 통일운동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있었어요. 노태우 정권도 당시 분위기에 부담을 느끼고 89년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때 대학생들 2백 명 정도를 평양 축전에 보내겠다면서 청와대 차원에서 남북학생교류추진위원회 같은 걸 만듭니다.

 

재미있었던 건 나도 평양에 갈 수 있느냐는 일반 학우들의 문의와 신청이 학생회실로 굉장히 많이 들어왔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통일운동은 용공으로 매도됐었는데 이번에는 정부가 허가해 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던거죠.”
 

 

 

 

‘통일의 꽃’으로 알려지기 전의 임수경은 한국외국어대 용인 캠퍼스에 다니면서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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