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장안벌을 흔든 27년 전의 함성. 건대 항쟁의 현장을 가다.

장안벌을 흔든 27년 전의 함성. 건대 항쟁의 현장을 가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애국운동 탄압하는 살인정권 타도하자는 애학투련 학생들(1986.10.28) @openarchives 

요즘 대학생들이나 일반시민들에게 ‘건국대학교’ 하면 무슨 생각이 나느냐고 물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00시티라는 대규모 주상복합단지로 대표되는 서울 동부권의 대표적인 상권을 떠올릴 것이고 일부는 건국대학교의 상징인 황소상이나 서울 시내에 보기 드문 인공호수 일감호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27년 전인 1986년 10월 28일, 이곳은 전 국민의 눈과 귀가 집중되었던 건대항쟁이 일어난 현장이었다.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 본관 앞에서 전국의 27개 대학 2,000여명이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발족식을 가졌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한국사회변혁운동의 성격에 대한 논쟁, 반외세 투쟁과 개헌투쟁의 방향에 대한 논쟁, 대중투쟁과 선도투쟁을 둘러싼 논쟁으로 내부역랑이 분산되어 있었다. 애학투련의 출범은 이런 소모적인 논쟁을 접고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켜 민주화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위한 첫 걸음이었다. 애학투련은 전대협, 한총련 같은 전국적인 학생조직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곳에 모인 그 누구도 자신들의 집회가 66시간 50분에 걸친 항쟁이 시작될지,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단일 사건으로 1,288명이 구속되는 거대한 사건이 될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불이 붙은 매트리스의 검은 연기로 가려진 학생들과 건물(1986.10.28) @openarchives 

사실 당국은 집회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당일 오전 7시부터 경찰을 배치했지만 학교로 모여드는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대학은 모두 원천 봉쇄했다. 당시 대학간 연합집회는 원천봉쇄가 원칙이었지만 학생증 검사조차 하지 않고 집회 현장으로 학생들을 들여보낸 것은 학생운동 세력을 일망타진 하고자 하는 당국의 의도를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사실 애학투련 지도부 입장에서는 건국대는 집회장소로서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우선 서울의 대형 캠퍼스 중 거의 유일하게 평지에 위치해 있어 경찰이 진입하면 막기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기가 크기에 그 만큼 틈도 많았고, 앞서 말했듯이 다른 대학은 이미 집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인 학생들이 건국대의 상징 황소상 앞에서 오후 1시 집회를 시작하고, 3시 20분 경 구국행진을 선포하는 순간 경찰의 진압은 시작되었다. 수천 명의 경찰 병력이 학교로 밀려들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관, 학생회관, 사회과학관, 중앙도서관 등으로 분산되었고 건물에 고립된 채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하지만 철야농성에 필요한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학생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첫날부터 경찰은 건물의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차단했고, 건물 안까지 최루탄을 쏘아 창문이 깨져 찬바람을 막을 수 없었다. 설사가상으로 이른 추위까지 밀어닥쳤지만 대부분 가벼운 점퍼 차림이었다.

 

도서관에 있던 일반 학생들이 제공한 도시락이나 자판기 커피 정도를 제외하면 음식이 있을 리 없어 각 건물을 끈으로 이어 빵 등을 공수해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농성 학생들의 주된 요구가 `안전귀가보장`이었다는 사실은 이 점거 농성이 우발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치밀한 각본에 의해 이들의 집회를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으로 꾸몄고 언론은 이를 그대로 받아 보도했다. 경찰은 여학생들과 1학년생들만이라도 내보내 달라는 요구조차 거절했다. 같은 시기에 `금강산댐 사건`과 같은 날조된 뉴스를 유포한 독재정권은 눈에 가시였던 학생운동 세력을 공산혁명분자로 몰아 한 번에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농성 사흘째가 되자 감기에 걸려 앓아누운 학생들이 속출했고, 결국 농성 마지막 날인 31일 아침 8시 50분, 경찰은 그야말로 ‘스펙타클’한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헬기와 소방차까지 동원했고 8,000여 명의 진압병력을 동시에 각 건물로 투입시켰다. 헬기에서 퍼붓는 최루탄, 고가사다리차에서 쏟아 붓는 최루가스와 물줄기. 당시 본관 옥상은 30cm 정도까지 물이 찼다고 당시 참가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학생들은 투신을 막기 위해 깐 매트리스에 화염병을 던지고 깨진 벽돌과 변기를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지만 오전 10시 20분, 학생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이것이 1,525명이 연행되고 1,288명이 공산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되었으며, 엄청난 수의 부상자가 나온 건대항쟁의 끝이었다. 이 사건은 학생운동 사상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동시에 사법사상 가장 많은 단일 사건 구속자를 낳았다. 10월의 마지막 날, 66시간 50분, 사흘 밤, 나흘 낮의 투쟁은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끝이 났다. 건국대학 측이 입은 재산 피해만도 당시 금액으로 23억 5천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폭력진압과 만행은 학교 주변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건대 앞 화양리 시민들이 “학생들은 빨갱이가 아니다.” “경찰은 즉각 철수하라” 고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좌경, 용공 매도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발생한 건대항쟁은 오히려 80년대 중반 흩어졌던 투쟁역량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천 명이 넘는 학생운동의 핵심을 구속시켰지만 이 사건이 가져온 충격은 다른 민주화 운동 세력의 각성을 가져왔다. 석 달도 안돼 박종철 열사가 희생되었고 6.10 민중항쟁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건대항쟁은 5.18 광주민중항쟁과 87년 6.10 민주항쟁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역할을 했다. 따라서 건대항쟁은 건국대만의, 학생운동권 만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 민주화 과정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거대한 우리 모두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그 날의 집회가 열린 ‘황소상’을 비롯해서 본관, 사회과학관과 도서관 , 학생회관, ‘10.28 건대항쟁 기림상’을 돌아보았다. 본관은 지금 행정관이라 불리우는데, 도색만 새로 했을 뿐 그 때 그 모습 그대로다. 저항이 가장 극심해서 가장 많이 파손된 건물이었다고 하는데 물론 그 때의 상처는 찾아 볼 수 없다.  

사회과학관 앞에 서 있는 ‘10.28 건대항쟁 기림상’은 남녀학생이 등을 대고 함성을 지르고 있는 모습이서어서 무척 독특하다. 동상은 얇은 점퍼를 입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상이 어느 정도 연륜이 지난 것으로 보여 건립연도를 확인해 보았더니 항쟁 후 불과 6년 후인 1992년 10월 28일에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항쟁이 당시의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리라. 학생들에게 ‘10.28 건대항쟁 기림상’을 물어보니 모르는 학생들이 많아 실망스러웠지만 10.28예술제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학생회관 앞 쪽에 추모비가 있어 살펴보았다. 추모비의 주인공은 1992년 여름, 고향 울진 바다에 빠진 시민 3명을 구하다 숨진 당시 건국대 부총학생회장이었던 고 안경준 씨 였다. 전대협은 고인에게 ‘전대협 영웅상’을 수여했고 건국대 학우들은 캠퍼스에 기림나무를 심고 추모비를 세웠다. 건국대 민주동우회는 매년 8월 첫 주 토요일 추모비 앞에서 추모식을 연다고 한다. 

건국대 캠퍼스는 10.28 항쟁의 현장으로서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인 도정궁 경원당과 등록문화재인 구 서북학회회관도 있고 일감호수도 있어 나들이 코스로도 가볼 만하다. 주위에 약속이 있는 분들이 잠시 시간을 내 방문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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