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고등학생들, 4․19혁명의 아침을 열다

고등학생들, 4․19혁명의 아침을 열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는데, 한국 현대사의 4월은 제주4.3과 4.19혁명으로 그 말을 증명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등장하는 4.19혁명의 주역은 누구였을까?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생들이라고 대답한다. 사실 186명의 희생자 중 77명이 학생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학생의 숫자는 22명밖에 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36명이었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19명이었다. 꼭 사망자 수로 비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가 마산상고에 재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4.19혁명의 주역은 고등학생이었다는 당시 고등학생 참여자들의 자부심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당시는 지금처럼 대학생 수가 많지 않았다. 고등학생이면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 그래서 사회에서도 고등학생들을 요즘처럼 어리게만 보지 않고 꽤 어른 대접을 해주었다. 고등학생들도 요즘처럼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동아리활동을 하기도 했고, 방학 때 무전여행이나 캠핑을 가기도 했으니 물질적인 혜택은 부족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지금보다 더 성숙한 존재였다. 서울 특히 사대문 안팎의 거의 모든 학교가 4.19혁명에 참여했는데, 이런 놀라운 참여도는 고등학생들의 성숙도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을 자주 관제시위에 동원했는데, 자연스럽게 시위에 익숙해진 것이 또 다른 이유였다. 정권입장에서는 완전히 역효과가 난 것이다. 또 하나는 학도호국단 활동을 통해 인근 학교와 교류가 활발했다는 점이다. 동대문, 혜화동 일대에 모여 있는 대광고, 강문고(현재 용문고), 덕수상고 (현재 덕수고), 휘문고, 동성고 등이 몇 시간 만에 모두 시위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서울에서도 거의 모든 학교 특히 사대문 안과 주변 학교들이 참여했으니 한정된 지면에 전부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대표적인 학교인 대광고, 덕수상고, 동성고, 경기고의 4.19혁명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대광고등학교

4월 18일, 인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와 정치깡패들의 테러소식을 듣고 분노한 대광고 학생회 임원들은 밤을 새워 시위계획을 세우고, 결의문도 써놓았다. 또한 빈 밀가루 포대 조각을 이어 붙여 현수막도 만들었다.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시위가 시작되었다. 3학년이 선두에 서고, 1,2학년이 뒤에 섰다. 처음에는 뛰어나오느라 대열을 제대로 짜지 못했지만, 동대문에서는 정연한 대열이 되었다. 대광고 시위대는 종로 5가에서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공격을 받았고, 많은 학생들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상당수는 혜화동에서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의 함성은 서울대 문리대와 의대 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부 학생들은 대학생 선배들과 함께 경무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2006년, 교내에 그 날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졌다. 대광고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첫 시위를 했다는 사실과 결의문 때문에 4.19혁명 역사에서 빛나는 이름이 되었다.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의 결의문과 구호

우리는 제2세 국민으로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선포한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정사를 내일에 물려받을 주인공으로서, 붉게 피 발리고 정사를 계승받기는 싫다. 그리고 3.15의 불법과 불의의 강제적 선거로 조작된 소위 지도자들은 한시바삐 물러나야 한다.
부러워하던 형제들이여!
대한의 학도여 일어나라!
피 묻은 국사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의에 불타는 학도이거든, 진정한 일꾼이 되려거든 일어나라!
3. 1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 공화국이요, 결코 독재구가, 경찰국가가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학생들은 평화적인 해우이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

단기 4293년 4월 19일
대광고등학교 학생 일동

구호
1. 정부는 마산 사건을 책임지라.
2.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3. 3.15 협잡 선거를 물리치고 정. 부통령을 다시 선거하자!


덕수상고

서울의 랜드마크이자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 두타빌딩은 4.19혁명 당시 덕수상고 자리였다. 덕수상고 학생들은 4.19혁명에 열심히 참여했다. 덕수상고는 1978년 한양대학교 맞은 편 행당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은 학교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덕수상고에서 두 열사가 희생되었다. 먼저 김재준(18세 남) 열사로 당시 덕수상업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이었다. 그는 4월 19일 종로4가에서 총격으로 발에 부상을 당했지만 붕대를 감고서, 서울역 광장에서 소방차에 타고 시위를 감행하다 시청 앞에서 경찰이 쏜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리고 덕수상고 2학년이던 최정수(1942년 1월 16일 생) 열사가 있다. 당시 주소는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15-5로 나와 있다. 1960년 4월 19일 오후11시 경 부산진경찰서 앞에서 시위하다가 병원에서 절명했다. 4월 19일 어떻게 해서 저 멀리 부산까지 내려가서 희생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지만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두 열사의 추모비는 서정주 시인이 추모시를 짓고 당대 최고의 서예사 이철경이 글씨를 써, 같은 해 11월 29일, 윤보선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추모비 역시 행당동 교사로 같이 이전되었다.  


동성고등학교

4.19혁명에서 대광고와 함께 중․고등학교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낸 동성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시위는 1교시가 끝난 19일 11시에 시작되었다. 4.19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된 3.15부정선거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자행된 것이었으므로, 동성고 교장 출신인 장면 부통령에 대한 학교의 애정이 각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학생들은 학교 커튼을 뜯어 현수막을 만들었고, 거의 전교생이 질서정연하게 종로 5가로 행진했다. 사진에서 보듯이 덩치 큰 학생들이 앞장서고,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교장과 교사까지 학생들의 보호를 위해 따라나서는 아름다운 모범을 보였다. 동성중고 시위대는 종로1가에서 심한 저지를 당하자 을지로로 돌아 광화문을 거쳐 중앙청과 경무대 공방전에 참가했다. 경무대에서 천복수 열사가 희생되었다. 여기서 중상을 입은 김경한 님은 이로 인해 24년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학교 바깥 혜화동 로터리에 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1899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 된 경기고등학교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한국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다. 1976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했지만 휘문고나 배재고와는 달리 정독도서관과 교육박물관으로 원 교사와 교정이 보존되어 있다. 위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거리를 메우는 북촌이지만 정작 이 곳을 방문하는 이는 많지 않다. 4.19혁명 당시 동대문 주위의 학교들과는 달리 광화문 주위의 학교들은 준비 없이 뛰어들었다. 따라서 조직적인 모습은 부족했지만 열정은 모자라지 않았다. 경기고등학교는 최정규, 고완기, 이종량, 박동훈 4명을 민주제단에 바쳤다. 위령비는 2002년까지 그대로 종로구의 원 교정에 있었지만 2002년에 삼성동으로 이전되었다. 위령비의 글은 최고의 국문학자였던 이희승 선생의 작품이다. 선생 스스로 교수단 데모에 앞장섰으니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위령비가 꼭 이전해야 하는지는 논란이 있겠지만 어쩌면 민주화 유적이 거의 없는 강남에 4.19혁명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경기고등학교 홈페이지에는 4.19혁명 희생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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