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서울역에서 청계천까지 소년 전태일, 청년 전태일의 길을 걷다.

서울역에서 청계천까지 소년 전태일, 청년 전태일의 길을 걷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11월은 공휴일도 없고, 4월의 4.19혁명기념일, 5월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6월의 6.10민주항쟁기념일처럼 이렇다 할 기념일도 없는데다가 마지막 달의 전 달이라 뭔가 ‘밋밋해’ 보인다. 하지만 13일만은 결코 평범한 날이 아니다. 물론 일반적인 달력에는 아무 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 민주화와 노동운동에서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날이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열사는 1954년, 여섯 살 때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자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이소선 어머니와 염천교 밑에서 노숙하면서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거의 동냥으로 연명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채소행상을 시작으로 2년 동안 중부시장, 남대문 육교, 미아리에서 이런저런 장사를 하면서 전태일, 전태삼, 전순옥 세 남매를 먹여살렸다고 한다.

그 사이 모은 돈으로 재봉틀 한 대를 마련한 아버지는 부지런히 돈을 벌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소년 전태일은 남대문 국민학교에 편입하였다. 지금은 없어진 이 학교는 대한상공회의소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이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브로커에게 속아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날려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동대문구 용두동 성북천가의 천막촌에서 살아야 했다. 이곳 역시 위압적인 서울 순환도로의 교각들과 잘 가꾼 산책로만 보일 뿐 염천교 주변처럼 그 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염천교 근처처럼 그 당시의 광경을 떠올리기엔 필자의 상상력은 너무나 부족하다.

1964년, 귀향했던 소년 전태일은 점퍼 8장을 들고 동생 태삼을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어떻게든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린 두 형제는 점퍼를 팔아 약간의 돈을 얻었고 사과궤짝을 사 당시에는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리던 탑골공원 뒤편 리어카 보관소 담 옆에 붙여 잠을 잤다. 물론 야경꾼에게 걸려 그리 오래 지내지는 못했다. 그곳에 가보니 놀랍게도 몇 대 되지는 않지만 아직 리어카들이 있었다. 물론 주력은 삼륜 오토바이였고 이 리어카들도 몇 년 지나면 사라지리라. 참고로 이 주위의 식당과 이발소는 서울에서 가장 저렴하다.

당시 소년 전태일의 ‘직업’은 바로 ‘뒤밀이’ 였다. 서울역에서 동대문시장까지 리어카를 밀어주면 30원을 받았다. 이 일이 없으면 대한문 앞에서 구두를 닦고 신문을 팔았다. 잠은 대한문 앞에서 가마니를 덮고 잤다.  


 

멋들어지게 복원된 청계천을 따라 전태일 다리를 향해 걷는다. 그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42년 전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신의 몸을 불사른 곳이다. 청계천 복원사업이 끝날 무렵인 지난 2005년 9월, 종로5가와 을지로6가를 잇는 ‘버들다리’가 세워졌다. 일이 이렇게 되어가자 자연스럽게 열사의 동상을 세우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국민 모금으로만 4억 원 가량이 모였을 정도로 전태일 기념상 건립 열기는 뜨거웠다.

보도블록에 깔릴 동판(23cm*11.4cm) 제작에 참여한 시민이 1만 5천명이 넘었고,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은 4천여 장에 달했다. 동판에는 성금을 낸 시민들이 절절한 글귀를 남겼는데 故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도 이에 동참했다. 노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 김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전태일 기념상은 반신상(140cm*210cm)으로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동대문 쪽에서는 기념상이 보인다. 왼손은 땅을 짚고, 오른 손으로는 하늘을 향한 이 기념상은 노동자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꿨던 전태일의 소망과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조각가 임옥상 씨는 기념상을 반신상으로 제작한 것은 “자기 스스로 산화한 전태일이 땅에서부터 되살아났다는 것을 나타내고, 전태일이 몽상가가 아니라 굳건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재단사가 그의 직업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양 팔에 두른 토시가 인상적이다.

전태일 기념상이 세워진지 7년이 흐른 지금, 기념상이 위치한 전태일 다리는 지친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생계에서 오는 고민, 노조활동에서 오는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근한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전태일 기념상을 그 자리에 세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당시 서울시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허가가 나와야 전태일 기념상과 동판을 세울 수 있던 ‘전태일열사 청계천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원회) 측에서는 줄기차게 허가를 요청했지만 서울시에서는 “죽은 지 100년이 지나지 않은 인물의 기념상을 세운 사례가 없다.”, “청계천을 ‘사유화’하지 마라.”며 번번이 거절했다. 하지만 서울에는 사후 100년이 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름이 붙어있는 지명들이 얼마든지 있다. 도산대로, 소월길, 백범로... 하기야 그들 입장에서는 전태일을 기억하라고 청계천 복원을 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당시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담당한 황만호 씨는 “한나라당에서도 김문수, 이재오 의원 등이 기념상 건립에 동참했지만 서울시 관료들이 보수적이어서 쉽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이명박 시장 등 서울시에서는 처음부터 전태일 기념상을 세울 의지가 없었다.”고 전한다.

추진위원회 측은 제막식이 예정된 9월 30일이 다가오는 데도 서울시의 답변이 없자 허가가 없더라도 전태일 기념상을 세우겠다는 뜻을 서울시에 전달했다. 마찰을 감수하고서라도 기념상을 세우는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이 추진위원회의 결심이었다. 결국 서울시에서 제막식 3일전 허가로 선회하면서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노동자들의 축제가 싸움터로 변할 수 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황 씨는 “사회단체, 시민단체, 노동단체, 여야 가릴 것 없이 범국민적으로 전태일 기념상 건립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시에서도 끝까지 반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시가 입장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이런 진통 끝에 전태일 기념상은 세워졌다. 그해 11월 12일 전태일 거리 준공식에서 고 이소선 여사는 “이런 날이 오기까지 애를 써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며 “아직도 비정규직에 피눈물 흘리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대우받는 그 날이 오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뒤끝’은 있었다. 다리 이름은 여전히 ‘버들다리’였다. 노동계와 전태일 재단은 2010년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아 이 다리에 전태일 열사의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했지만 서울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명위원회의 심의가 지연되면서 요구는 마냥 지연되었다. 그런 가운데 2년여가 지난 올해 8월 지명위원회가 재개됐고, 버들다리와 전태일 다리의 병행표기 안이 최종 확정됐다. 재단은 지난 11월 1일 오후 1시에 전태일다리 앞에서 명명식을 열었다. 인명이 다리의 행정명으로 확정된 것은 이순신대교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얼마 전 박근혜 후보가 이곳에서 헌화하려다가 유족들과 노동자들의 저지를 받았다. 다시 한 번 이곳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과연 박 후보는 열사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나 읽어 보았을까?

어쩌면 한국 현대사는 전태일과 박정희의 싸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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