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임진강 너머 최북단 도라산역

天網恢恢 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광대하여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하늘을 통일로만 바꾸면 이처럼 딱 들어맞는 말이 없지 싶다. 통일을 주제로 한다는 게 이처럼 곤혹스러울 줄 짐작도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단된 시점부터 통일운동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8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조국통일 촉진운동을 선언하면서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부문을 초월하여 통일운동은 모든 운동의 영역에 걸쳐 있다. 서울과 지방 가릴 것 없이 한반도 전체가 통일운동의 유적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통일, 이 낱말 하나가 하늘처럼 우리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다. 또한 통일은 쌍생아이다. 통일은 분단이란 낱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통일이 있는 곳에 분단이 있고 분단이 있는 곳에 반드시 통일이 있다. 시인 김남주가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존재한다고 읊었던 것처럼 통일 역시 우리의 삶 곳곳에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 하늘의 그물로 펼쳐져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통일과 관련한 유적지를 손꼽으라면 머뭇거리게 된다. 대체 어떤 곳을 지목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통일을 주제로 한 민주화유적 답사가 직면한 곤혹스러움이었다.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곤혹스러움이 유난히 통일과 관련하여 두드러지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일 터이다. 여전히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통일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곧 한반도 어느 곳이나 통일운동 유적지라는 뜻이며 미처 포함되지 못한 곳이 있다면 그곳 역시 잠재적 유적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필자는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아니, 하늘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노력을 포기했다는 게 더 정직하리라.
 

임진강역을 지키는 사람들

“남과 북을 잇는 최초의 철도 아닙니까? 통일에 조그마한 이바지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었습니다.”

임진강역의 박운학(41)역장은 원래 경의선 가좌역에서 근무했다. 그가 이곳 임진강역으로 자원 해 온 건 지난 2001년 9월 22일. 경의선 종착지였던 문산역과 임진강역 사이 철도 개통은 9월 30일이다. 임진강역에서 일하는 나머지 여섯 명의 역무원 모두 지원자들이다. 근무환경이 더 좋다거나 특별한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경의선 개통과 관련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면서 관광객이 늘어 다른 곳보다 업무가 많다. 그들은 다만 경의선 연결의 소망이 실현되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해, 아니 그 일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 위해 임진강역의 근무를 자원했다.

평일에는 이천 명 가량이, 주말에는 오천 명 가량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교외선의 간이역이 흔히 그렇듯 이곳 역시 고즈넉한 풍경을 배경으로 작은 역사가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도라산역으로 들어가는 손님들이라면 이곳에서 신분증 검사를 해야 합니다.”

역 왼쪽에는 공터가 있고 그 한쪽에 간이 매표소가 마련되어 있다. 매표소 앞에는 관광을 온 듯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그 줄을 가리키며 묻자 박운학 역장이 이렇게 말했다. 임진강역 바로 다음 역인 도라산역은 민간인통제구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진강역 구내에는 헌병 완장을 찬 군인들이 있다. 최전방을 실감케 하는 풍경이다.

서울역에서 임진강역으로 오는 기차는 한 시간에 한 대 꼴로 있지만,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으로 들어가는 기차는 하루에 석 대뿐이다. 이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군인들의 검문을 거쳐야 한다.

임진강역에서 도보로 오 분 거리에 임진각이 있다. 북한기념관, 각종 기념비 및 통일공원을 포함한 국민관광지 조성의 시발점으로, 지난 1972년 임진각이 세워졌다. 주변의 통일공원 등은 2005년경에 공사가 완공된다. 이곳도 진행형이기는 마찬가지다.

통일을 위한 최초의 노력은 1948년 남쪽의 김구, 김규식 등이 참여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를 들 수 있다.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한 남북 4자회담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다. 6․25를 거치면서 남과 북의 대결상황은 극으로 치달았다. 이 견고한 대립양상에 균열을 일으킨 건 4월혁명이었다. 4월혁명 이듬해에는 통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미 당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특히 4월혁명 이듬해, 20여 개 대학이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을 조직, 5월내로 남북학생회담을 판문점에서 열 것을 선언했으나, 5․16군사쿠데타로 실현되지는 못한다. 그 뒤 남과 북의 냉전에 숨통을 열어준 건 7․4공동성명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공동성명이 발표되던 해 임진각이 세워진 것이다.

2002년 4월 8일 도라산역 개통 앞까지만 하더라도 실향민들은 임진각에 마련된 망배단에서 차례와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조금 더 북쪽으로, 한 걸음 더 자신들의 고향과 가까운 도라산역으로 갈 수가 있다. 명절 즈음에는 도라산역으로 가는 망배열차가 특별 운행되기 때문이다.
 

철마는 달리고 있다

도라산역으로 가는 기차는 오전 10시 39분, 오후 12시 39분, 2시 39분, 이렇게 석 대가 있다. 한번에 기차에 탈 수 있는 인원은 300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물론 차량을 이용해 가는 방법도 있지만 철마의 기적소리를 먼 기억에서 끄집어내려면 이 기차를 타는 방법밖에 없다.

도시 통근형 디젤동차가 임진강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면 박운학 역장은 이상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승강장에서 이 기차를 마중한다.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들 가운데 일부는 임진각 관광객이고 다른 일부는 도라산행 관광객이다. 도라산행 관광객들은 임시매표소에서 신분증을 확인하고 다시 이 기차에 오른다. 그 동안 임진강역의 역무원들은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찾아오시거든요. 그래서 저희가 이것저것 질문에 대답도 해 드리고 직접 기차에 태워드리기도 합니다.”

박 역장이 이렇게 말하는 사이 벌써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역장의 팔을 붙들고 어떻게 해야 도라산역에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경의선이 복원되고 통일이 되었을 때 꿈이 뭐냐고 묻자,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개성역장이 되는 거라던 박운학 역장은 도라산역으로 가는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승강장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임진강역을 출발한 기차는 임진각을 오른편에 끼고 지나 임진강을 건넌다. 차창을 통해 바라본 임진강은 도도하기 이를 데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 강을 건너다 죽거나, 건너 간 뒤 혹은 건너 온 뒤 자신이 떠난 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도도한 강물 위로 우뚝 솟은 낡은 교각이 보인다. 다리 상판은 사라진 채 교각만 남은 독개다리다. 교각과 교각 사이, 상판이 없는 그 허전한 공간만큼 우리의 분단도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수천 년을 두고 흘러온 임진강으로서는 사람들이 제 맘대로 다리를 놓았다 부쉈다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리라.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까지는 불과 5분. 마찬가지로 도라산역에서 다음 역인 장단역까지도 불과 5분 거리며, 개성까지는 15분 정도다. 남쪽의 최북단역인 도라산역에 닿으면 승강장에 세워진 이정표가 눈을 아프게 찌른다. 평양 205 킬로미터.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검문을 하는 데, 개찰구에서 군인들에게 신분증을 맡겨놓아야 한다. 임진강역과 달리 도라산역은 규모도 만만치 않다. 고개가 아프도록 젖혀도 천장은 저 위에 있다.

“이곳에 오신 실향민들은 한결같이 통일에 대한 기대를 안고 돌아갑니다. 예전보다 통일이 가까워졌음을 피부로 느끼고 가시는 거죠.”

도라산역 윤여희(33)부역장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희망이 담긴 눈빛에서 보람을 찾는다고 한다. 도라산역에는 역장을 포함해 모두 여섯 명의 역무원이 근무하고 있다. 아무래도 민통선 내의 역이어서 어려움이 많다. 출입할 때마다 군인들의 검문을 받아야 하고, 하루에 두 명씩 교대로 숙직도 해야 한다. 비록 아직은 종착역이지만 그들은 마치 경의선이 완전 복원된 것이나 다름없이 생활한다.

도라산역 옆에는 ‘경의선 철도 복원 침목 기증자 명단’이라 적힌 기념판이 있다. 길이만 삼십 미터를 넘을 것 같은 이 판에 기증자 이름이 빽빽이 적혀있다. 익명의 기증자 일곱 명을 포함해 모두 13226명이다. 어쩌면 이곳을 방문한 실향민들도 저 수많은 이름들에서 희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역명은 도라산에서 따온 것인데, 도라산(都羅山)이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아침저녁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옛 신라의 도읍 서라벌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분단 이전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더 많이 찾는 산이 되어버렸지만.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통일운동 재점화

1960년대 이후 거의 이십 년 동안 역사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던 통일운동을 부표처럼 한반도에 띄운 건 바로 학생들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각계각층의 민주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건 두말 할 나위 없다. 이듬해인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남북공동개최 문제와 맞물리면서 통일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이 급물살의 수문을 연 건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온 김중기다. 김중기는 선거유세에서 서울대와 김일성종합대학간의 교류, 남북청년학생회담 개최를 공개적으로 제안했고, 비록 낙선했지만 이 공약은 전대협에 받아들여졌다. 특히 이 해 오월에는 서울대 화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성만 씨가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옥상에서 남북올림픽공동개최, 조국통일 등을 외치며 할복투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특히 유념할 것은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등을 통해 보여진 반미의식이, 조성만 씨에 이르면 반미와 통일운동의 완전한 결합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조성만 씨가 통일운동의 도화선이었다면,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은 통일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당시 김일성 주석과 3단계 통일방안에 합의하고 돌아왔는데, 이는 남녁의 통일운동체들이 실현가능한 통일방안을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임수경과 그를 보호하기 위해 뒤이어 방북한 문규현 신부는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과해 남쪽으로 들어온 최초의 민간인이었다.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판문점 통과로 그때까지 단지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통일의 상징물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1980년대 후반 통일운동은 학생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고,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을 거치면서 이십 년 동안 억눌려 있던 민중들의 통일 열망이 하나로 모이는 역사적인 시기로 자리매김 되었다.

판문점이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었듯, 이제 도라산역 역시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고 있었다. 더 이상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표어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북측의 장단역과 봉동역 구간이 연결되고 남측의 문산역과 장단역 구간이 완전 연결되면 철마의 종착역은 사라지게 된다. 이미 문산역과 장단역 구간 중 임진강역과 도라산역이 연결되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하루 세 번, 그것도 겨우 300 명씩 타고 오는 기차를 맞이하기에는 턱없이 커다란 역사이지만, 어쩌면 경의선이 완전 복원되고, 통일이 되는 날에는 무척이나 비좁을지도 모른다. 훗날을 위해 넉넉히 지은 도라산역 역사처럼 가슴 한켠이 부풀어오른 듯한 기분이다.

 

글 손홍규

1975년 전북 정읍 생

1993년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입학

2001년 최명희 청년 문학상 소설 당선

<작가세계>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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