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고문으로 얼룩진 오욕을뒤로하고 인권센터로 바뀐 치안본부 남영동대공분실

 
<이 글은 사업회가 2008년 발간한『그날 그들은 그곳에서』(다시 가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에 실렸던 글입니다. 1월 16일 박종철 열사 25주기를 맞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이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중인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에 의해 참고인으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화장을 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하였으나, 다음날 15일 석간신문에 사망 보도기사가 나가자 단순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이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하자, 경찰은 1월 19일 물고문으로 인한 질식사로 정정 발표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 2명을 구속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박종철의 연행 시간과 사망 경위, 고문에 가담한 경찰의 숫자 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3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3명의 경찰이 추가 구속되었으며 5월 29일에는 범인 축소 조작에 나섰던 박처원 치안감 등 4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되었다.
또한 박종철을 부검하였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이 사건 발생 1년 후인 1988년 1월 12일 경찰이 자신을 회유하려했다고 폭로하면서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이 직권남용과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되었다.
2000년 12월에는 국가가 유족에게 지불한 손해배상금의 70%를 사건 가담 경찰이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고문이라는 잘못된 수사 관행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경찰의 사건 은폐 등으로 우리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 박종철기념관 설명 중에서-
 
  영원한 청년 박종철
 
지난해 6월 10일 6월민주항쟁 21주년을 맞은 이날,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관 개막식이 있었다. 기념관은 남영동 옛 치안본부 대공분실인 경찰인권센터 내 일부 시설을 리모델링해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 특히 박종철 열사가 1987년 물고문을 받다가 숨진 509호 조사실은 박 씨의 영정과 함께 물고문을 하던 욕조와 간이침대 등 그때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4층 기념전시실에는 박종철이 사망 당시 입었던 옷을 포함해 책과 편지, 개인사진 등 기념유품이 전시됐다. 1980년대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신문과 사진 자료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 80번지에 있는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산’으로 불리던 구 안전기획부, ‘서빙고호텔’로 불리던 보안사령부 대공분실과 더불어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행해지던 곳으로 악명 높았다.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승격 독립하면서 대공분실에서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꾼 이곳의 공식명칭은 ‘경찰청 보안3과’이다. 그러나 과거 대공분실 시설 각종 시국사범을수사하면서 대공분실로 각인되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남영동 대공분실’이 더 익숙하다. 홍제동에 있는 보안4과와 함께 보안경찰의 외근 부서 중 하나인 남영동분실은 이른바 ‘안보 위해 사범’을, 홍제동분실은 ‘방첩’ 분야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안보 위해 사범’이란 다름 아닌 시국사범, 즉 독재자를 불편하게 했던 인사들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현재는 보안3과와 보안4과가 통폐합되고 과거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변하면서 오욕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모습을 역사의 뒤안으로 물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고문으로 악명 높은 수사기관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가 대간첩 수사를 명목으로 만들었다. 한국 건축에서는 보기 드물게 검은색 벽돌을 사용한 이 건물은 다른 수사기관과 달리 지하실이 없고 조사실을 건물 5층에 배치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건물 뒤편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중간층을 거치지 않고 바로 5층 조사실로 올라갔는데, 이 통로는 반경이 채 1미터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인데다 외부를 볼 수 있는 창문도 없이 곧바로 5층으로 이어져 있다. 박종철의 선배였던 박종운은 "이런 폐쇄적 구조는 피의자들에게 공포감을 주고 1~4층에 드나드는 어떤 인물도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5층에는 똑같은 구조의 ‘조사실’이 들어차 있는데 각 방은 4.09평 공간에 책상과 의자, 침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일부 방에는 욕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설치된 가구들은 끌려온 사람들의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각 방은 폭이 좁고 위아래로 긴 2개의 창문만 나 있어 비명소리 조차 새어나오기 어려웠다. 박종철의 고문사 이전에도 김근태 전 의원 등이 여러 사건을 통해 이곳에서 행해진 고문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결국 한 젊은 생명이 스러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고문의 현장’이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과 관련해 조사받은 김근태는 이곳에서 행해진 고문을 법정진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 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 중략 -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 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근태를 비롯한 수많은 인사들을 고문해 세칭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은 지난 1988년 퇴직 후 수배자로 10년 이상 도피생활을 하다 2000년 7년형을 선고 받고 만기 복역 후 출소하였다. 옥중에서 기독교를 접했다는 이근안은 출소 후 신학을 공부하며 전도사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간증집회를 가졌으며 최근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공간으로서의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모습을 바꿨듯이 그 안에서 고문을 행하던 사람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 그 역할을 바꿨다. 이는 다만 역사적 우연일 뿐인가. 자못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대공분실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인권센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대공분실을 당대 최고의 건축가의 한 사람인 김수근이 설계했다는 것이다. 건축가의 작업을 그 건물에서 행해진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많지만, 일부에서는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공간배치나 동선 등 건축가의 구상이 그 공간에서 이루어진 일과 관련성이 높다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건축가는 연어가 죽기 전에 산란하러 마지막으로 힘들게 강 상류로 올라가는 의무처럼 마치 유전자적인 운명과 같이 설계할 수 있기 위해 모든 짓을 한다. 건축가의 직업은 악마와의 조약을 맺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물강박관념> 데이안 수직, 2006.
그러나 당시 김치열 내무부장관의 이름으로 발주된 보안분실은 80년대 5층에서 7층으로 증축된 바 있고, 2001년 내부 공간을 변경하는 등 몇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건축가의 의도를 온전하게 확인할 길은 없다. 김수근은 1986년 6월 14일 간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불과 7개월 뒤 한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음을 맞고 19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설계된 타워호텔(1962년)을 비롯해, 인천상륙작전기념관 (1982년), 치안본부청사(1983년), 서울법원 종합청사(1984년), 육사 교훈탑(86년) 등 3공화국부터 5공화국까지 독재자들의 뜻과 관련된 건축을 주로 수행해왔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만한 근거가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1968년에 대규모의 국가 건설기획을 담당하는 한국기술개발공사의 대표이사가 된 것이나 1981년 당시 새 주한 미대사 워커에게 광주학살의 주범인 허화평과 허삼수를 소개해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수근이 독재자와 협력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특히, 당시에 일종의 경쟁자인 건축가 김중업이 독재정권과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7~8년 동안 프랑스로 추방당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 강미노 <독재자 철학 구현한 건축가 김수근의 업적과 책임> 레디앙 2006. 6. 3 기사 중에서
 

달라진,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목숨을 잃기도 한 곳 남영동 대공분실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변한 것은 분명 87년 6월민주항쟁 이후 진행된 한국 민주주의의 성과임에 틀림없다. 경찰청 소유의 건물에 박종철기념관이 들어선 것 또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분명 한국사회는 20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출범한 진 얼마 되지도 않은 인권보호센터의 규모가 축소되고,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며 경찰청이 구성한 민간인권보호위원들이 집회참가자들에 대한 과잉 진압에 항의해 전원 사퇴한 현실 또한 오늘의 모습이다. 때문에 21년 전 박종철을 보내며 목울대를 울렸던 외침, 마침내 다가올 그날을 향한 뜨거운 열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침내 그날
우리 모두가 해방춤을 추게 될 그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그리하여 무진벌에서 북만주에서 그리고 무등에서 배어난
너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그날
비로소 그날에야
뜨거운 눈물을 네게 보내주리라

 
- 이 시는 1987년 1월 20일,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 거행된 박종철 군 추모제에서 박종철이 과회장으로 있던 인문대학 언어학과 학생들이 바친 추모시이다. 이 추모시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 있는 묘비와 서울대 교정에 세워진 추모비에도 새겨져 있다.

 

 

글 김종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

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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