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나던 날 - 손홍규


옛 서울대 문리대 터, 마로니에 공원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차에 적셔먹는 마들렌이라는 과자를 통해 과거를 복원해낸다. 마들렌만의 독특한 맛과 향이 그와 관련된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마들렌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씁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콤하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씁쓸하면서 달콤하기도 하다. 그래서 마로니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씁쓸한 기억을 가지고 누군가는 달콤한 기억을 가지고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박건이 부른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흥얼거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 마로니에 공원에 관한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게다.  
 

한일 회담 반대운동의 진원지

마로니에 공원이 옛 서울대 문리대 터라는 걸 증명해주는 기념비가 공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옛 서울대 교정을 축소 제작한 모형과 함께 서울대학교 유적 기념비가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서울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공원 오른쪽에 자리한 문예진흥원 앞에 가면 확실해진다. 문예진흥원 건물이 사적 278호로 지정된 옛 서울대 본관 건물이었음을 알리는 푯말이 서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아하 바로 이곳에 서울대가 있었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과거를 불러일으키기에 조금 부족하다. 기념비가 서 있는 공원 가운데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길차게 자라 있는 마로니에를 올려다보아야 바로 이곳이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쉼터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밑동 바로 위에서 대여섯 갈래의 커다란 줄기로 갈라져 뻗어 올라간 마로니에는 당시 문리대 학생들의 상징물과 같은 것이었다. 마로니에는 가로수의 대표적인 한 종류인데 나도밤나무과에 속하며 원산지는 유럽 남부이다. 마로니에 뒤편이 바로 문리대가 있던 자리인데 지난 1975년 서울대가 지금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문리대 건물은 헐렸다. 대신 그 자리에 문예회관 대극장이 들어서 있다. 

 



마로니에 공원은 이제 도심에 자리 잡은 서울 시민의 쉼터가 되었다. 그 앞의 대학로와 더불어 젊음의 상징이 되었으며 비단 젊은이뿐만 아니라 청소년에서 노인까지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거리의 악사를 비롯해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끊이지 않고 문화마당이 늘 펼쳐진다. 그것만은 아니다. 각종 추모식과 집회, 시위도 이곳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늘 사람이 들끓는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바로 이곳이 옛 서울대 문리대 터였으며 한일협정 반대운동의 진원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어쩌면 노랫말처럼 ‘사랑도 청춘도 다 마셔버’린 건지도 모른다.

한일회담이 급물살을 타게 된 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63년 말부터였다. 이듬해인 1964년 3월 5일 청와대는 4월 초순에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하순에는 협정문 초안을 작성하여 5월 초에는 조인을 하겠다는 일정을 발표하였다. 그 뒤 이 문제를 가지고 찬반이 나뉘면서 한반도가 들썩인다. 그리고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에서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모의화형식”을 거행한다.

이 화형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서울의 다른 대학 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고 박정희 정권은 허둥댔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 대표들이 박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화형식을 계기로 솟아난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얼마 가지 못했다. 박정희는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무시하고 한일회담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이에 다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일어섰다. 그것이 바로 5월 20일에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었다.


“불문과 연구실 입구 쪽에 4.19 기념탑이 있었어요. 주로 그곳에서 모든 집회를 했는데, 기억나는 건 조동일 씨가 준비한 원귀마당쇠라는 짤막한 마당극이 열렸던 거예요.”


미학과 59학번인 시인 김지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에는 4?19 기념탑이 없다. 지난 1975년 관악 캠퍼스로 의대, 농대, 수의대를 제외한 모든 단과대학이 옮겨가면서 기념탑 역시 옮겼기 때문이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이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다시 한번 거세게 타올랐고 6월 3일 1만 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이에 박정희는 그날 오후 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했다. 결국 이듬해인 1965년 6월 22일 한일회담은 정식 조인되었다.

유신 이후 최초의 학생 시위

서울대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인문대의 시위 역사를 알 수 있는데, 손꼽아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다. 그것만 보아도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서울 도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도 있었을 테고 양심적 학문의 대표라는 의무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리대 시위 가운데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1973년 10월 2일의 시위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인 김대중을 힘겹게 따돌리고 당선된 박정희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박정희의 위기의식은 1972년 10월 유신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금지되었으며 그해 말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투표를 통해 박정희가 8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박정희는 유신에 관한 어떤 비판도 수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고 대다수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탄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저항이 있게 마련이던가. 1973년 10월 2일 문리대 학생 250여 명은 4?19 기념탑 앞에 모여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체제 확립,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유신의 총구 앞에 겁도 없이 나섰다. 이는 유신선포 이후 유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수용하지 않는다는 박정희의 엄포를 거부한 최초의 몸짓이었다. 물론 이보다 앞서 천관호, 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법정, 이호철, 김지하 등이 종로 YMCA에 모여 유신헌법을 폐지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유신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한 건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처음이었다.



전국의 각 대학들도 이에 호응하여 유신철폐 시위를 벌였으며 재야인사들도 잇달아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지난 한일회담 반대 운동 이후로 다시 한 번 문리대 학생들이 전국적 시위의 도화선이 된 셈이다.

사실 문리대 교정은 그리 넓은 곳은 아니다. 마로니에 공원을 보면 알겠지만 이곳도 큰 공원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마로니에 공원에 들어와서도 마로니에 공원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넓지 않은 터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용기를 냈고 실제로 그런 용기 덕택에 그 다음 세대들은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지난 1975년 서울대가 지금의 관악 캠퍼스로 옮겨갈 때 많은 학생들이 반대했다. 문리대의 잦은 시위가 눈에 거슬렸던 박정희는 그런 반대를 묵살하고 이전을 추진하였으며 그 자리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옮겨가야 했던 사람들. 그래서 그들에겐 이곳 마로니에 공원이 더욱 각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문예진흥원장으로 있는 소설가 현기영 씨는 이제 날마다 한번씩 마로니에 공원을 거닌다. 6?3 한일회담 반대시위 뿐만 아니라 각종 집회와 시위가 있을 때마다 당시 청량리에 자리 잡고 있던 사범대를 벗어나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그에게도 마로니에 공원은 각별한 곳이다.

“지금은 이곳이 문리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도 드물뿐더러 역사적인 민주화 시위가 있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요. 4?19뿐만 아니라 그 뒤 독재정권과의 기나긴 싸움의 발상지이기도 한 곳인데……”

마로니에에 울려 퍼지던 젊은이들의 함성을 기억하는 이라면 비록 그날의 함성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는 없을지라도 조금 애처롭게 여겨지던 박건의 노랫소리만은 온전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마로니에와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라는 노래, 이 두 가지가 바로 문리대의 상징이었죠.”

마로니에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1929년 4월 5일 경성제국대학 시절이므로 일흔 네 해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온 셈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고희를 훌쩍 넘긴 셈이다. 그래서일까. 마로니에 공원에는 마로니에말고도 우람한 은행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다. 벌써 가을이 깊었음을 알리듯 군데군데 노란 은행잎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은행나무 앞에서는 발걸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마로니에 앞에 설 때만 절로 걸음이 멈춰진다. 그리고 문득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고개를 숙여 간밤은 잘 지냈느냐고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마치 신산스러운 한 생을 묵묵히 살아 아름답게 늙은 노인 앞에 선 듯이.


피고 지는 마로니에

마로니에 공원에서 샘터 쪽으로 가다보면 한국예총 건물이 있다. 그 부근에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서관과 정문 사이에는 청계천의 한 지류가 흘렀고 그 조그만 개천을 가로지르는 역시나 작은 다리가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이 개천을 세느강이라 불렀고 다리에는 미라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그곳은 복개되어 지금 우리가 세느강과 미라보 다리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마로니에 공원 맞은편에는 여전히 학림다방이 있으나 예전의 모습은 아니다.

“문리대 터에서 우리도 많은 걸 꿈꾸었어요. 술도 마시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고 젊은 날의 열정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었지요. 하지만 그런 기분들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었어요. 아름답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박건의 노래도 다분히 낭만적이긴 하지만 좀 더 서글픈 의미를 띠고 있었지요.”

아름답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었던 사람들. 시인 김지하는 마로니에 공원 하면, 이런 느낌이 떠오른다고 한다. 김지하의 일 년 선배이며 지금은 작고한 신명순 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김희갑 씨가 가락을 붙였으며 박건이 부른 그 노래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다.
주말이면 마로니에 공원은 도심 속의 공원답게 활기차다.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비둘기에 모이를 주거나 배드민턴을 치며 시간을 보낸다. 공원 입구 왼편에 있는 공연장에서는 매주 문화행사가 열리고 문예진흥원이 주최하는 각종 문예행사도 이곳에서 열린다. 또한 노동자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가 빈번히 열리며 때로는 추모식과 영결식도 열린다.

지난 1994년 문익환 목사가 서거했을 때도 수만의 인파가 마로니에공원과 대학로에 모여 추도행사를 치렀고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1987년 대선 당시, 민주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했던 백기완 씨의 사퇴 연설이 행해진 곳도 바로 이곳 마로니에 공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로니에 공원은 겉으로 보이는 활기와는 달리 많은 걸 잃어버렸어요. 이곳에 오면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요즘 젊은 세대들의 자화상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현기영 씨는 이렇게 변질된 마로니에 공원의 문화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비단 마로니에 공원만의 문제는 아니리라. 우리 사회 전체가 앓고 있는 어떤 병의 징후를
바로 이곳 마로니에 공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뿐. 그래도 마로니에 공원이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건 부정할 수 없다.가장 최근에는 소설가 이문구 씨의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앞으로도 이곳에서는 주말을 보내기 위해 찾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 모순에 저항하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리라.

그래서 여전히 마로니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할 것이다. 저마다의 마들렌을 하나씩 품고 씁쓸하거나 달콤한, 혹은 씁쓸하고도 달콤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훗날 되살릴 추억을 만들기 위해 찾아오리라.

따지고 보면 문리대는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그 시절의 눈물과 웃음이 남아있는 셈이다. 그 사람의 이름을 잊었다 하여 그 사람마저 잊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당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젊은이들의 눈물과 웃음이 이제 다른 이들의 얼굴로 옮겨갔을 뿐이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꽃이 피고 잎이 지고 있다. 무성했던 이파리가 하나 둘 떨어지고 나면 겨울이다. 하지만 이듬해 마로니에는 다시 기지개를 켜고 몸 한 번 부르르 떤 뒤 사람들이 쉴만한 그늘을 주기 위해 꽃을 피우고 잎사귀를 키우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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