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강원대 성조기 소각 시위

 

 

 

지난 설연휴의 마지막 날에 있었던 북한 외무성의 핵 보유 선언은 한반도와 주변국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이라크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이란을 다음 표적으로 삼아 압박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돌발 선언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분위기다.


우리 사회에서도 북핵에 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에 앞서 북한을 궁지로 몰아간 미국의 일관된 대북 적대정책과 경제 제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자신은 수천 개의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다른 나라는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게 하는 일방적인 초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자유의 수호신이자 세계의 경찰 역할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양 지구 곳곳에서 패권을 뽐내고 있는 미국. 우리에게도 이라크 파병과 미군 범죄 등으로 인해 많은 논란 속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 조금 꺼림직 하긴 해도 미국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우리의 은인이고 우방인 것인가? 아니면?

 

5·18민중항쟁과 부산 미문화원 사건
한국 사회에서 미국의 정체에 관한 고민과 회의는 이미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지난 군부독재 시기에 그 배후에 있는 미국의 문제를 드러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친 매우 상징적인 시위 현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춘천에 소재한 강원대학교 교정 한복판에서 학생들이 성조기를 불태우고 ‘양키 고 홈!’을 외친 시위가 일어났다. 이른바 ‘강원대 성조기 소각 사건’ 이 사건의 사회·역사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민주화운동의 과정을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79년 12·12 쿠데타로 정치권 전면에 등장한 전두환 일당은 80년 5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에 공수부대를 파견해 대학살을 저지른다. 이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승인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해 8월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은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고, 82년 2월 워커 주한 미 대사는 “한국의 재야인사와 민주를 부르짖는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들은 철부지와 같다.”고 빈정대어 물의를 빚었다. 

 

 

  

 

 
그런 상황에서 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에 화재가 났다. 학생들이 ‘광주민중항쟁에 개입한 미국은 물러가라’는 주장을 하며 건물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 그 와중에 한 명이 죽고 세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남한 사회에서 미국에 대해 전면적으로 문제 제기한 최초의 사건이었고, 주장한 내용이나 피해 정도 모두가 나라를 뒤흔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전두환 정권과 어용 언론은 가담자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좌경분자로 규정하고 학생운동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에 교회단체들은 4월 15일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용인, 한국민 비하 발언, 한미불평등 관계’를 근거로 반미 성명을 발표해 국면은 더욱 긴장으로 치달았다. 그 직후인 4월 22일 강원대학교에서 반미 시위가 일어났던 것이다.

양키 고 홈!
송민석, 정재웅, 이재영, 박인균, 이헌수, 김래용, 황기면, 김을용 이상 8명의 청년은 부산 미문화원 사건에서 제기한 반미의 문제를 학생운동에서 받아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당시 춘천고를 나와 성결교 신학대에 다니 던 송민석은 미국의 본질에 대한 폭로투쟁이 절박한 시기라 판단하고 고향의 친구들에게 성조기 소각 투쟁을 제안했다.

 

한편 민중문화연구회라는 모임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학습을 해오던 다른 이들은 부산의 사건을 공개적으로 알리려 했으나 학교 측에 의해 제지가 됐고, 결국 대외적 상징성과 폭발력이 큰 성조기 소각 시위를 기획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일을 벌이려니 고민되는 부분이 많았다. 80년 초 포고령 이후, 학생운동권이 구속과 수배 등으로 초토화됐다가 82년 즈음 겨우 조직이 회복되고 있었기에 역량이 미비했던 것이다. 더욱이 미국에 대한 혈맹 정서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경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반미’를 걸고 나서면 애써 복원 중인 조직이 송두리째 뽑히는 것까지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현재 남북강원도협력협회에서 활동 중인 이헌수(46, 당시 교육학과 80학번) 씨는 벌써 오래된 일을 회상하며 당시의 고민을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그때 운동 역량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정책과 한반도에 대한 지배전략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모험주의적 발상이란 견해도 있었죠. 전반적으로 감당하기 부담스럽다는 분위기였어요. 토론을 참 많이 했죠. 결국 우리가 받을 타격보다 미국 문제를 한국 사회에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지요.”

 

학원사찰을 따돌리고
하지만 문제는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악명 높은 ‘학원사찰’의 장벽이 그것이었다. 강원대만 하더라도 춘천 경찰서 정보과에서 학원담당계를 만들어 형사들이 대학 본부와 학생회관에 사무실을 두고 아예 학교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또 보안대에서는 복학생들을 이용해 학생들 사이에 그들의 정보원을 심어 놓았고 대공과에서도 요원이 들어와 있어 학내에서의 대규모 시위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민중문화연구회 활동을 하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의 경우에 각 개인마다 담당 형사가 정해져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행이 붙을 정도였다.“시위 며칠 전 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써클 회식을 하는데 우리는 2층에서 하고 형사들은 1층에서 했지요. 그때 형사들의 긴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특이사항 없이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느라 신경을 많이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재웅(46, 당시 경제학과 80학번) 씨는 삼엄한 학원사찰을 따돌리면서 시위 준비를 한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송민석 동지가 서울 종로에서 대형 성조기를 구입해 왔고 유인물 작성은 이재영 동지와 제가 했구요. 교사이셨던 제 아버지가 사용하던 가리방(당시 학교에서 사용되던 시험지 작성 원판)을 가져다 김을용 동지의 자취방에서 이재영 동지와 프린트 작업을 밤새 했습니다.”

이날 준비된 유인물은 <강원대학교 민주화투쟁 선언문>과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동지들의 투쟁에 찬사를 보낸다>라는 8절지 2종으로 각각 1천 매 씩 만들었다.

4월 22일 오전, 일행은 춘천 시내 모 레스토랑에서 유인물 분배와 역할분담을 확인한 뒤 시간 등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헤어졌다.

 

 

 

  

 

 

 

학생회관 3층에서 불타는 성조기
정오가 될 무렵, 1층에 식당이 있는 학생회관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학생들이 차츰 몰려 들었다. 학생회관 3층 구석에 위치한 써클 룸(현재 강원대 합창단 동아리방)에서 이헌수, 김래용은 출입문의 열쇠구멍에 못을 박고 캐비넷, 회의 탁자, 의자 등을 총동원해 서둘러 바리게이트를 쌓기 시작했다. 시위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경찰의 진입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곧 창문을 활짝 열고 주변을 지나가는 학생들을 향해 메가폰의 사이렌을 울리며 유인물을 뿌렸다.


이헌수와 김래용은 성명서를 낭독한 후 “양키 고 홈!”이란 구호와 함께 들고 있던 성조기에 불을 붙였고 살랑이는 봄바람에 성조기는 훨훨 잘 타올랐다. 같은 시간에 다른 이들은 도서관(현재 박물관), 사범대와 연적지(연못) 부근, 경영대, 공대, 춘천 시내 명동거리 등에서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렸다.


최대한 상황을 유지하며 마지막에 집회를 조직하려던 이들의 계획은 이들의 간절한 기대와는 달리 5분여를 넘기지 못했다. 날렵한 경찰들이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온 것과 공들여 쌓아 놓은 바리게이트가 운동으로 다져진 경찰들의 완력에 허물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헌수, 김래용, 박인균은 현장에서 체포, 연행됐고 다른 이들은 사전에 약속한대로 서울 종각으로 도피했다가 논의 끝에 이틀 뒤에 자수했다. 

 

 

  

학생회관 앞에서 이헌수 등을 태운 봉고차가 경찰서로 출발하는 순간 학생들 2,3백여 명이 주변에 모여들었지만 안타까움과 응원의 눈빛만 보낼 뿐 경찰의 기세 때문에 시위는커녕 박수조차 치지 못했다. 체포 과정에서 박인균은 늑골이 부러졌는데도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다른 이들과 함께 대공분실로 이송되어 불법 구금 상태에서 3박 4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이헌수 씨의 안내로 다시 찾은 대공분실은 여전히 춘천 시내 대로변(효자로)에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높은 담과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대문 위의 철조망, 내부가 가려진 창문 등 지금 봐도 음산하고 불쾌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삼일 낮밤을 한숨도 안 자고 조사를 받았는데 그 당시는 워낙 고문을 심하게 하던 때라 우리 생각에 잠 안 재우는 건 고문 축에도 끼지 않는다고 위안을 했을 정도였죠. 잡혀가자마자 물어본 게 ‘간첩과 접촉했냐’, ‘집안에 월북한 사람 있냐’ 하는 거 였어요.”
일반 가정집인 것처럼 명패를 달아 놓았으나 대문에 쓰인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 본 결과 강원도경 보안과 소유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내부 취재는 거절당했다.

 

보도 통제와 탄압
강원대의 시위는 엄혹한 독재정권 시절에 부산 미문화원 사건의 의미를 확산시키고 학원 내에서 미국의 문제를 제기한 최초의 시위였다. 더욱이 성조기를 불태운 방식은 학생들의 결연한 반미의식과 함께 공개적인 언로와 의사소통이 차단된 당시의 폐쇄적인 학원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시위 직후, 주요 일간지 1면에 국회에서 이 문제가 다뤄졌다는 내용이 나왔으나 곧 가판에서 회수됐고 모든 신문에서 1단 기사로만 처리됐다. 이렇듯 철저한 보도 통제로 인해 이 사건이 갖는 강렬한 상징성과 의도가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지지는 못했으나 이후 80년대를 뜨겁게 달군 반미투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반면 강원대 학생운동 세력의 피해는 당초 예상했던 대로 엄청났다. 참가자 전원은 당일 오후에 신속하게 학교 당국에 의해 제명이 됐고 함께 활동했던 이들은 많은 수가 제적이 되거나 강제징집이 되어 몇 개월 동안 정상적인 모임조차 이뤄내지 못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제7조 1항의 북괴 동조죄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제3조 1항의 사회혼란죄 위반으로 기소되어 우방의 국기를 태운 죄 값으로 최고 2년 6개월에서 최하 1년의 징역형을 살았다.
2005년 2월의 강원대는 방학 중이라 한가하다. 학생회관(천지관)을 오가는 어린 학생들은 이런 사건과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비록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라크 파병, 불평등한 소파협정, 국가보안법이 유지되는 지금의 한국 현실은 그때에 비해 과연 얼마만큼이나 나아졌을까?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시위 청년들이 82년 재판정에서 했던 말을 돌이켜본다.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성조기 소각은 우리가 비폭력적으로 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미국이 진정한 우방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송민석)

‘분단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민중과 지배집단의 괴리는 더욱 깊어지고 모든 시민들은 공포감 속에서 무력해지고 있다. 역사 앞에서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질곡 속에 헤매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길을 택한 것이다.’(정재웅)

‘양키 고 홈! 은 2차 대전 후 후진국 전반에서 걸쳐 나온 구호로서 이것을 두고 북괴 동조 운운하는 것은 전두환 전기집을 읽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이재영)

‘이제는 더 이상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말 외국 보기 부끄러워 못 살겠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우리 국민 진짜 한번 잘살게만 해 달라.’(박인균)
 
‘우리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특정집단과 국가를 위해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리의 조그만 행동이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우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비록 지고 있지만 우리 뒤에 오는 이들은 우리 위를 밟고 필 것이다.’(김래용)
‘한번도 민주실현을 못해 본 나라이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양심적 지식인, 학생, 근로자, 농민들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이나마도 이어온 것이다. 그 꿈틀거림은 지금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며 결국 독재체제는 무너져 민주정치가 이 땅 위에도 꽃 필 것이다.’
(이헌수) 

- 1982년 7월 5일 재판기록 중에서


<글 최영환>

1974년 서울 출생
2004년 청계천 르뽀집 『마지막공간』 공저(삶이보이는창), 경기도 시흥
작은자리이주노동자센터에서 활동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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