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네안의‘선비’를 일으켜라” 한국형 NGO로 거듭나고 있는 흥사단 아카데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로 올라가면 허리 굵은 은행나무들이 늘어선 대로변에 빨간색 벽돌 건물이 보인다. 1층에 스타벅스가 입주해 있어 흔히‘스타벅스 건물’로 통하는 흥사단 본부다.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죄다 수용해 낼 듯한 대학로의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흥사단의 고색창연한 로고와 스타벅스의 당당한 영문 간판이 빚어내는 묘한 이질감과 부조화는 2000년대 흥사단이 감당하고 있는 난제들을 대강이나마 짐작케 한다.
 
선비를 일으키다
 
여름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던 금요일 오후. 나는 대학로 스타벅스 앞에서 우산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젊은이에게 흥사단 가는 길을 물었다. 1초도 못돼 대답이 날아왔다.
“흥사단이 뭐예요?”
‘흥사단’은 몰라도 스타벅스 대학로점은 아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흥사단은 이제 약간의 설명을 요하는 곳이 되었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도산 안창호가 민족의 자주 독립과 번영에 기여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단한 단체다. YMCA나 스카우트 등 기독교 단체를 제외한 순수 국내단체로는 아마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일 것이다.
왜‘흥사단’일까. 흥사단의‘흥(興)’은 일어난다는 의미요, ‘사(士)’는 선비이니 ‘흥사(興士)’란 말 그대로‘선비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선비란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문무(文武)를 겸비한 이상적 인간상이었다. 비록 조선조에‘유생(儒生)’과 결합되면서 그 뜻이 다소 퇴색하긴 했으나, 고구려의 선비(또는 선배), 신라의‘화랑’이 바로 그 전통을 잇는 것이다.
선비정신은 나라가 외침을 당하거나 위기에 처할 때 구국의 항거를 했던 이들의 삶에서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었다. 도산이 망국의 설움을 안고 미국에서 흥사단 운동을 일으킬 때 그 정수리에 세우고자 했던 정신도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역사적으로 흥사단은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1907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산하에 청년운동 단체로 설립한 청년학우회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단체다. 도산의 주도로 1909년에 결성됐다가 1910년 한일합방으로 해체된 청년학우회의 결성 취지는 당시 청년학우회 운영 실무를 맡았던 육당 최남선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도산 선생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한 시기의 역사적 배경은 독립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마지막 명운(名運)이 끊어지려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시 근대적 민족 자각으로서 청년학우회를 만든 근본 정신은 진실한 민족 혼의 자각으로서 진실한 독립 국가를 찾자는 것이었다.(최남선의 <진실정신>,『 새벽』창간호, 1954)
 
무실(務實 )?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으로 인격을 수양하 고 훈련에 힘써 각 분야에서 전문적 능력을 갖춘 엘리트가 되자는 흥사단의 계몽주의적 운동은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이 있는 것이었지만 육당 최남선의 행적에서 보듯이 민족운동 내부에서 관련 인사들의 친일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역사를 참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1913년에 흥사단이 만들어졌는데 1920년대에 이광수 씨가 민족개조론을 쓰지 않습니까, 일제하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사회주의나 신간회 같은 좌우합작운동에서 찾는 사람들은 민족개조론으로 대표되는 흥사단 운동을 친일로 경도될 소지가 있는 개량주의, 기회주의로 보는 거죠. 사실 나중에 친일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해방 이후 미군정하고 가까웠던 부분도 많이 있었어요. 그러나 100년 역사를 가진 조직,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조직으로서 흥사단에는 여러 면이 있는 겁니다. 어찌 보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하게 운동을 시작한 것이 민청학련 때부터 아니겠습니까? 그때부터 흥사단은 한국 역사에 아주 깊숙이 개입해 작용했고, ‘흥사단이 참여하지 않은 시위나 조직 사건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민주 역량을 배출해 냈습니다.”
조성두 전 조폐공사 감사(54세)의 말이다.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선 흥사단 아카데미
 
흥사단 본부에서 만난 홍승구 흥사단 사무총장(52세)과 조성두 전 감사(54)는 흥사단 아카데미 선후배 사이로, 197~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맹장들이다. 이들은 흥사단 아카데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한 만큼 흥사단 운동 100년의 명(??)과 암(??)을 밝히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흥사단이 명동에서 대학로로 이전한 1977년 대학에 입학한 홍 총장에 비해 74학번인 조성두 전 감사는 명동 대성빌딩 시절의 기억을 더 많이 갖고 있다.
“3층 건물에 3층이 강당이었어요. 여기가 유명한 곳입니다, 여기가!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기독교회관이 하나의 센터 역할을 했던 것처럼 흥사단 강당도 하나의 센터였어요. 1950년대 후반부터 우리 사회의 계몽주의적 시기를 대표했던 사상계 운동의 지도자들, 장준하?함석헌 선생 같은 분들 강연이 다 여기서 이루어진 거아닙니까, 정일형, 김대중 씨의 유명한 정치 연설도 마찬가지고 흥사단 금요강좌도아주 유서 깊은 강좌인데 1980년대에 이미 1,000회를 넘겼습니다. 강연이 있는 날이면 정부기관과의 긴장이 조성되곤 했는데도 강당은 늘 사람들로 꽉 들어찼지요. 당시 흥사단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에 맞선 거의 유일한 사회 비판 세력이 었어요.”
 
 
1977년, 흥사단은 많은 역사적 장면을 남긴 대성빌딩 시절을 마감하고 동숭동 새 회관으로 본부를 옮겼다. 동숭동 1-28번지. 1975년 관악캠퍼스로 대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서울 문리대가 있었던 유서 깊은 자리다. 자유와 투쟁, 문화와 낭만이 치열하게 대립하며 서로를 각성시키던 이 역동적인 공간을 물려받은 흥사단은 운동적으로도 전환기를 맞게 된다.
때는 긴급조치의 암울한 공기 속에서 학내 학생운동 세력이 지하로, 지하로 숨어들어가던 무렵이었다. 재임 기간 중 무려 여섯 차례나 군대를 동원한 박정희 정권의 폭정은 흥사단 주축인 젊은 단우들을 깊은 고뇌와 자성에 빠뜨렸다. 흥사단 운동이 정치 사회적 현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청년학생들의 고뇌와 자성은 필연적으로 이들을 반체제 운동의 중심에 세워놓았다. 다음은 홍승구 총장의 이야기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2년 동안 활동이 정지됐다가 청년운동 조직 육성을 위해 1963년에 대학생 아카데미와 고등학생 아카데미가 창립되면서 전국적인 아카데미 운동 시대가 열립니다. 전국에서 흥사단 아카데미가 없는 곳이 없었고, 숫자도 제일 많았죠. 학내 서클이나 학회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 지면서 흥사단 아카데미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거죠.”
 
적지 않은 아카데미가 현실 참여를 표방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면서 흥사단 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떠나서는 흥사단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밑으로부터의 문제 제기는 기존의 흥사단 이념과 운동 방법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다. 『흥사단운동 70년사』(1986)에 의하면 이 시기 흥사단 내부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갈등과 진통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홍 총장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지적했다.
“운동적 흐름에 대해 때로 흥사단 지도부는 조직 보호를 위해 제어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흥사단의 목적을 실현하는 거라고 이해했어요. 우리는 아이덴티티가 명쾌 하잖아요. 도산 선생으로부터 출발했으니까.”
 
 
1970년대 중반까지‘운동권 범주에도 들지 못하던’(신동호, 『70년대 캠퍼스 1』) 흥사단 아카데미는 긴급조치 9호 시대 들어 전국적인 조직망과 합법적인 틀, 풍부한 인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질적·양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하면서 운동권의 히어로로 급부상했다. 조성두 전 감사는 1975년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등사한 유인물을 각 대학에 배포하다 옥고를 치렀는데, 재밌는 것은 당시 구속자 5명 모두가 아카데미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흥사단 운동의 인프라, 흥사단 강당
“흥사단 운동, 특히 흥사단 학생운동 흥사단 아카데미 운동의 인프라라 할 수 있는 것이 흥사단 대강당이었어요.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이 진행되는 과정과 흥사단 대강당이 늘 엮여 있었다는 거죠.”(조성두)
흥사단 강당이 역사적 장소로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아무래도 1984년 5월 민청련에서 주최한 5·18민중항쟁 희생자 추도식일 것이다.그것은 당시 운동권에서조차‘쉬쉬했던’1980년 민중항쟁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최초의 광주 집회였다.
 
‘두꺼비’민청련이 전두환 정권이라는‘뱀’의 목에 정면으로 칼을 겨눈 것이다.
“아무도 광주를 말하지 못하던 때였어요. 그때까지 광주는 박형규,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들의 설교 속에서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정도였어요. 그건 거의 귓속말에 가까운 것이었죠. 그러다가 1983년 전두환 정권이 국제 여론을 의식해 약간의 유화국면을 열기 시작했어요. 그 틈을 비집고 민청련이 뜨면서 이걸 띄워 올린 거예요.
 
공식적 부문에서 이걸 치고 나가지 않으면 사회운동도 발전할 수 없다고 본 거죠. 최초로 광주항쟁 4주년 자료집도 발간하는 등 준비를 했는데, 장소를 선뜻 내주는 곳이 없었어요. 그런데 흥사단의 서영훈 이사장이 그걸 수용한 겁니다.”
조성두 전 감사는 당시 민청련 회원이자 흥사단 아카데미 단우로서 서영훈 이사장과 김근태 의장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다. 서 이사장의 중재로‘안전 귀가’를 약속했던 경찰은 집회가 끝난 후 이화동 로터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참석자들을 습격하여 당시 임신 6개월의 이경은 씨가 태아를 사산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흥사단 강당은 그 이후에도 민청련은 물론 수많은 민주화운동 단체의 집회나 토론, 강연회장으로서 너른 품을 열어주었다. 2008년 현재도 흥사단 강당에서는 여전히 우리 사회 현안과 관련된 크고 작은 집회와 세미나, 토론회가 열리곤 한다. 영어몰입정책에 대한 토론회도 열리고, 공명선거운동 발대식도 열리며, 각종 역사 강좌도 열린다.
 
 
우리 사회 현안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지금 흥사단 강당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지를 확인해 보면 된다.
홍승구 총장에 의하면 지금까지 흥사단 아카데미가 배출해 낸 인원은 10만을 헤아린다. 아마 그들은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중추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흥사단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단우들 층이 두텁지 못하다는 것이다.
흥사단 아카데미도 동문회 형태로만 남아 있을 뿐 실질적인 조직은 공중분해 된 지오래다. 이제 흥사단 아카데미는 역사적 소명을 다하고 사라져버린 것인가.
“어떤 조직이든 자기 후계 세대는 있어야 되겠지요. 1990년대 이후 사회적 격변속에서 대학생 세대를 흥사단 단우로 만들기 위한 몇 차례 시도가 있었는데 잘 안됐습니다. 이 부분은 조직원 재생산을 못해낸 주체의 측면과, 우리 사회의 역사적 단계와 문화가 바뀐 측면을 함께 바라봐주었으면 하고요, 또 젊은이들도 사회와 역사같은 공동 문제에 좀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흥사단은 최근 민족통일운동, 투명사회운동, 교육운동 등 3대 시민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사회 NGO로서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원 수를 늘리기 위한 홍보도 중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흥사단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리라 생각합니다.
 
글. 김기선 1965년 서울 출생. 평전 작가. 저서로는『저는 열네 살 선영이에요』, 『전태일』, 『김진수』, 『최종길』, 『한일회담 반대운동』등이 있다.
사진. 황석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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