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고추분쟁의 선봉에 선 봉화

 
  전국적으로 국지성 호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던 길 내내 장대비가 물대포로 쏘아대듯 퍼붓다가 잦아들었다가 말끔하게 개었다가 다시 기습적으로 퍼붓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나 봉화로 접어들자 더 이상 변덕스런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 시간에도 강원도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해마다 물난리로 생지옥을 겪는 강원도와 접경지대를 이루는 지역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봉화의 날씨는 천연덕스러웠다. 도 경계선이 언제 어떻게 그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땅의 생김새가 그것을 구분 짓는 첫 번째 조건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하늘이 변하고 땅과 하늘의 궁합이 빚어내는 조화와 변덕 속에서 식생이 결정된다. 그리하여 사람의 삶과 앎이 스스로 그러하게 되니 지역색이야말로 자연에 가장 순종하는, 자연의 일부인 사람으로서 당연한 몫이 아닐까 하는, 조금은 생뚱맞은 생각을 추스르며 약속 장소로 갔다. 그곳에서 당시 봉화군농민회 준비위 위원이었던 이경한(53세·농사) 씨와 사무국장 이상식(50세·농사) 씨를 만났다.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이 부른 고춧값 폭락


1988년에 일어난 고추 파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한다. 수출이 감소하고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자 정부가 내놓은 해법은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과 농산물 가격 통제였다. 그 결과 농산물 수입이 크게 늘어났고, 1980년 이후에도 이 같은 정책은 일관되었다. 이중곡가제가 폐기되고 추곡수매가가 동결되었으며 부족한 농산물은 즉시 수입되었다. 1986년 이후 개방 농정시대로 접어들면서 농산물 수입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농가 소득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농민의 생활 수준은 날로 악화되었다.
그 중에서도 고춧값이 폭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양담배 수입이었다. 양담배가 들어오자 잎담배 농가는 부득이 작물을 고추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봉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고추 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이다. 고춧값 폭락은 고추가 농가소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봉화 농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었다. 고추 한 근에 들어가는 생산비는 2,600원이었는데, 고추 가격은 한 근에 500원이었다. 생산비의 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농민들은 분개했다.
고추 생산비 보장 투쟁은 경상북도 북부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1988년 8월에 영양을 시작으로 한 고추투쟁은 봉화, 청송, 안동, 의성 등지로 파급되어 갔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9개 지역에서 연 5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투쟁이 전개되었다. 봉화에서는 같은 해 9월부터 농민대회가 열렸고, 대회 때마다 1천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대회도 자주 열렸을 뿐만 아니라, 참여한 농민들의 숫자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준비가 철저했어요. 전단지 1만 장을 뿌리고, 포스터 1천 장으로 동네마다 도배를 했죠. 또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방송도 하고, 회원들이 많은 곳에는 버스를 넣어줬기 때문에 참여 인원이 많을 수밖에 없었죠. 날짜를 장날에 맞춘 것도 한몫 했구요.” 이상식 씨의 설명이었다. 그러고 보니, 농민대회가 있던 날은 2일과 7일에 열리는 봉화 오일장과 겹쳤다. ‘장에 간다’는 한 마디는 시골 사람들의 발길을 자유롭게 해주는 훌륭한 구실이었던 것이다.

 



봉화군청 앞에서는 연일 농민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군청 앞 중앙인쇄사는 농민들의 선전물을 만들어주던 유일한 곳이었다. 지역에서 장사하는 이가 아무리 비싼 값이라도 그 험한(?) 유인물을 공개적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경한 씨와 이상식 씨가 예전 모습 그대로라며 반가워했다.

열차를 탈취해 청와대로 가고자


고추투쟁만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는 각오로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첫 대회부터 1천여 명의 농민들이 장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투쟁의 기반을 다지고 동력을 계속 얻기 위해 면 단위 집회에 힘을 모았다. 그리하여 고추투쟁은 지역 최대의 현안으로 떠올랐고, 전 봉화 농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대중적 기반은 마련되었지만, 지역 내에서 벌이는 투쟁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쟁점으로 부각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3차 대회, 농민운동사에서 전무후무한 일대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철도 점거였다. 봉화에는 영동선이 지나고 장이 서던 봉화읍에 철도 건널목이 있다.
여섯 대의 경운기가 건널목 양쪽으로 세 대씩 나란히 섰다. 이윽고 서울로 향하던 화물차가 건널목 못 미쳐서 제동을 걸어야 했다. 잇달아 하행선 무궁화호가 전역에서 출발하지 못한 채 대기해야 했고, 그로부터 세 시간 반 동안 영동선은 봉화 농민들이 접수했다. 농민대회는 사전에 알려졌지만, 철도를 점거한다는 것은 경찰 당국으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해괴한 사건이었다. 몇 안 되는 전경만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건널목은 농민 3백여 명과 가을 농활을 온 서강대, 상명여대(현 상명대 전신) 학생 2백여 명으로 꽉 찼다.
농민회 깃발과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열차 위로 올라갔다. 구호를 외치며 깃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기관사에게 열차를 끌고 청와대로 가자고 요구했다. 농민들의 뜻을 청와대로 가지고 가야 한다고 했다. 얼마 후, 도경 헬기가 날아왔다. 헬기는 건널목을 둘러싼 5백 명의 머리 위로 최루탄을 투하했다. 읍내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농민들과 학생들은 철로에 깔린 자갈을 집어던지며 저항했다. 곧이어 전경들이 들이닥쳤고, 수십 명이 연행되었고, 네 명이 구속되었다. 그렇게 1988년 10월 2일은 군 단위 집회에서는 유례없는 강경진압이 행해진 날이며, 봉화에서 처음으로 최루탄이 터진 날로 기록되었다.

고추더미로 여당 중앙당사를 장악하다


고추투쟁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던 무렵,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왔다. 봉화군의 패기 넘치는 일꾼들은 권력의 핵심을 공격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고심을 했다.

 


이경한 씨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디를 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고추투쟁 때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늘 농협중앙회 아니면 야당 당사로 몰려갔어요. 근데 우리는 청와대로는 못 갈망정 여당 정도는 들쑤셔놔야 뭐가 되도 된다고 본 거란 말이죠.”
그리하여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 중앙당사를 장악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사전답사를 통해 민정당사까지 가는 도로 상황과 경비 상황, 당사 내부구조까지 알아내는 등 치밀한 준비를 했다. 공무원들에게는 택시노조와 직거래를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안심을 시켜 놓고 화물차 12대에 고추 5만 근을 싣고, 전세 버스를 탄 사람까지 모두 60명이 흩어져서 서울로 향했다.
밤 12시, 12대의 화물차가 지금은 여주휴게소로 바뀐 가남휴게소에 집결했다. 민정당사 경비들이 가장 나태해지는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에 맞추어 도착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서울에 가 있던 이상식 씨는 한겨레신문사를 찾아가 권오상 기자와 함께 취재차를 타고 다니면서 계속 상황을 점검하고 취재용 카폰을 이용해 화물차 대열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가남휴게소에서 장작불에 몸을 녹이며 대기하고 있던 1호차가 휴게소를 출발했다. 그 뒤를 2호차, 3호차, 4호차가 차례대로 따라붙었다. 12대의 트럭이 일렬로 서서 관훈동 민정당사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봉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고추 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이다. 고춧값 폭락은 고추가 농가소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봉화 농민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었다.

당사 앞 일방통행 도로에 고추자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11대분의 자루가 다 부려지고 난 후, 성능이 시원찮아 뒤늦게 도착한 12호차가 그때서야 부랴부랴 달려온 전경들에게 가로막혔다. 몸싸움이 시작되었고, 그 틈을 타 12호차 위로 올라간 이상식 씨가 포장을 찢고 자루를 부리기 시작했다. 60킬로그램이 넘는 자루가 굴러 떨어지자 전경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바빴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그때 권오상 기자의 연락을 받은 종로서 출입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달려왔다. 그렇게 해서 고추 생산비 보장 투쟁은 전국에 알려지면서 탄력을 받게 되었다.
민정당사 앞은 5만 근의 고추자루로 길이 막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전량 수매라는 농민들의 요구안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버티는 일이었다. 전경들은 막힌 길을 뚫기 위해 당사 앞 공터에 고추자루를 쌓기 시작했고, 농민들도 합세해 자루더미 안쪽에 공간을 두어 벙커를 지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12월이었다. 농민들은 화물차에 함께 싣고 간 장작과 시민들이 가져다 준 연탄과 폐가구를 때면서 민정당 의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농성을 했다.
당시 민정당사뿐만 아니라 농협중앙회와 김대중 씨 집 앞에도 몇 십만 근의 고추가 부려져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은 고추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결국 정부는 전국에서 20만 톤을 수매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전량 수매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고추 투쟁은 봉화의 효과적이고 치밀한 작전으로 일정 부분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20만 톤 수매는 미봉책일 뿐이었으니, 이듬해 2월 13일 여의도에 2만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 ‘수세폐지 및 고추 전량 수매 쟁취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하려다 경찰에 제지당한 농민들은 돌과 화염병으로 맞서고 차량을 불태우는 등 수십 년 쌓인 분노를 폭발시켰다. 노태우 정권은 이날의 농민투쟁을 폭력난동으로 매도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다.
 

왼쪽부터 권영물, 이상식 이경한 씨가 인터뷰 중 20년 전 당시의 자료사진을 보며 기억을 추스르고 있다.

 

계속되는 싸움, 그러나…….


이후 생산비 보장 투쟁은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이농이 가속화되었다. 젊은 사람들이 대거 빠져나가고 없으니 농민회 활동도 예전 같을 수가 없다. 또 당시에는 한 농가의 경지면적이 3천 평만 되어도 생활이 유지되었지만 농산물 가치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지금은 평균 1만 5천 평을 붙여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앞뒤 돌아볼 여력 없이 농사일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여전히 농민회 활동을 하며 굵직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상경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동안 싸움은 늘 밀렸고 농민들은 지쳤다. “지금 현실에 울화통이 터지지만, 쉰을 넘긴 나이다 보니 가정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현장에서 함께하고 싶어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이경식 씨의 말은 오래 전부터 고령화 사회가 되어버린 농촌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농가에서 재배하는 모든 작물이 농민들의 목숨줄이나 마찬가지였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 작물을 지키려했지만 이제 농민들은 그것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비가 내리자 고추밭에서 일하던 한 노인이 일을 멈추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이상식 씨는 대안은 생명운동밖에 없다고 말한다. 생명계의 깨진 균형을 회복하는 일만이 초국적 자본의 전 세계 장악과 곧 닥칠 식량 안보 위기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이라고 전한다. 그의 또 하나의 소망은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여태까지 내 자식만큼은 농부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어요. 그러나 농축산물의 가치가 계속 떨어질 게 뻔한데, 지금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갈등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상이 시작될 무렵, 청와대로 찾아간 전농 의장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차피 농촌은 망하는데, 한미 FTA가 타결되든 안 되든 무슨 상관이냐?”와 비슷한 말이었을 게다. 8월의 들녘 가득 넘실거리고 있는 곡식들은 더 이상 풍요와 안식의 상징이 아니다. 종자회사가 모두 외국자본에게 넘어가 유전자 조작 종자가 전국의 들녘에 뿌려지고 있으니,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먹을거리는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가.

 

글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6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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