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가장 치열했던 수세폐지운동의 현장, 순창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이었던 수세

 

강물을 팔아 한몫 챙긴 봉이 김선달은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이다. 현대판 김선달이 팔아먹는 물품은 상수도에서부터 달나라 땅까지 다양한데, 아무튼 김선달은 환금될 수 없는 공공의 재산을 얄팍한 혹은 기막힌 상술로 팔아먹는 자를 빗대는 대명사가 된 지 오래다. 그렇다고 김선달이 백성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상대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상인 혹은 양반네였다. 세균이 서식하는 ‘먹는 샘물’이나 성능 미달의 정수기를 파는 기업에 비하면 그는 그저 꾀 많고 해학이 넘치는 인물일 뿐이었고, 농민들을 상대로 강물 장사를 한 정부기관에 비하면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도까지 권력기관은 농민들로부터 수세를 징수해왔다. 수세란 쉽게 말하면 ‘물값’인데, 댐과 저수지, 수로 등 수리시설 건설비와 관리유지비 그리고 조합 직원의 인건비까지 포함하는 세금이었다. 이것은 일제가 자국 내의 부족한 식량과 군량미를 보충하는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1917년 조선수리조합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식민지 수탈 기구 중 하나였던 수리조합은 해방 이후에도 존속되다가 토지개량조합을 거쳐 1971년 농지개량조합(농조)으로 개칭되었다. 수리시설은 철도, 항만, 도로와 같은 사회간접자본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투자·운영되어야 함에도 농민들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농민들은 조합원으로서의 권리가 완전히 박탈된 채 과중한 수세에 허덕이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수세는 일 년에 한 번씩 부과되었고, 조곡(쌀로 가공하기 전의 벼 상태)을 기준으로 300평당 수십 킬로그램을 내야 했는데, 1987년에는 쌀값이 오른 만큼 수세도 올라 전국 평균 23킬로그램에 이르렀다. 물론 벼를 현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환산해서 현금으로 냈다. 작게는 몇 천 평에서 많게는 몇 만 평까지 짓는 것이 논농사이고, 땅의 소유 면적이 아니라 경작 면적에 따라 부과되었기 때문에 그 계산법에 따르면 수세는 농가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 년에 수억대에서 수십 억대까지 거둬들인 거액의 수세는 농민들을 위해 거의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수매가가 시중가보다 높을 때는 수매가를 적용했고, 시중가가 수매가보다 높을 때는 시중가를 적용하는 등 어떻게든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얄팍한 수법으로 일관했다.

노령산맥 자락의 가난한 땅


8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부당한 세금을 내야 했던 농민들의 분노는 결국 민주화운동의 물결을 타고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그 이전부터 함평, 무안, 해남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수

세 거부 움직임이 전국으로 파급되어, 1987년에 조직적인 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전국적이라고는 하지만, 투쟁의 규모나 양상에 있어서 전라도만한 곳이 없었다. 전남 나주는 군 단위에서 5천 명, 1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대중 참여를 이끌어낸 지역으로, 전북 순창은 가장 선도적이고 치열하게 싸운 지역으로 각 도를 대표한다.
이 밖에도 해남, 광주, 곡성, 정읍 등지에서도 수세 거부, 농조 해체, 적립금 반환 등 세 가지 단일한 목표를 세우고 투쟁을 벌였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투쟁의 치열함에 이끌려 순창을 취재지로 택했다. 전국에서 전라북도가 재정 자립도 등 여러 면에서 가장 가난했고, 순창군은 노령산맥 자락에 형성된 산간지역인데다 특용작물과 같은 상업영농이 타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어 전북에서도 가장 가난했다. 그런데도 수세는 전국 평균보다 높은 28.7킬로그램을 냈기 때문에 농민들의 원성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높았고, 그랬던 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치열하고 끈질기게 싸우다

 

이렇듯 수세폐지운동은 대중의 의식전환을 시작으로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했고, 순창 농조 앞마당에서 결의대회가 세 차례 열렸는데, 나중에는 참가인원이 700여 명까지 불어났다.
가장 큰 대회였고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던 곳은 1988년 4월 14일 ‘전남·북 농민대회’가 열린 나주천주교회였다. 전남·북이 함께한 최초의 도 단위 연합대회였는데, 이 대회를 추동해낸 이가 바로 이선형 씨다. 당연히 주최지인 나주에서 가장 많이 참가했고, 순창은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 참가한 지역으로 전세버스 4대를 꽉 채워 250여 명이 원정 투쟁을 갔다.
집회 후 가두시위를 벌이다 27명이 연행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연행자 중 16명이 순창 농민이었고, 부상자 3명 모두 순창 농민이었다. 순창 농민들이 대오의 선두에 섰고 가장 맹렬히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했다. 그 다음날에 평민당 총재인 김대중 씨의 대중 집회가 나주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터라 정치적 파급력을 우려한 나주경찰 측이 순창으로 돌아가면 연행자를 모두 석방시키겠다고 했다. 물론 속임수였다. 새벽에 순창으로 돌아와 속았다는 것을 안 농민들은 밤을 새워 순창경찰서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결국 경찰서장의 사과를 받아냈고 연행자 모두 풀려났다. 당시 순창경찰 측은 나주경찰한테 당한 것을 왜 자기들에게 항의하느냐며 당혹해했는데, 그에 맞선 항변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같은 경찰밥 먹으면서 연대 책임이 있지 않느냐, 순창군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순창경찰이 왜 보호를 안 해줬느냐는 식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억지 부리듯이 몰아붙였는데, 그때는 그런 말이 먹혔어요.”
그리고 부득불 농민들 앞에 나와 사과를 하게 된 경찰서장은 다리며 마이크를 잡은 손이며 할 것 없이 심하게 떨었다고 한다. 그러기는 농조 조합장도 마찬가지였는데, 농민들의 단합된 행동은 물론 연행과 부상을 각오한 결기를 생전 처음 겪었기 때문에 의료보험조합 등 딱히 상관도 없는 정부기관마저 행여나 불똥이 튈까 초비상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부상자 3명에 대한 피해보상도 완전히 받아냈는데, 여기서 ‘완전히’는 그때나 지금이나 유례가 없는 보상내역을 일컫는 것이었다. 머리를 다쳐 뇌수술까지 받은 서정일 씨를 비롯해 이충영 씨와 오정식 씨도 병원 치료를 받았는데, 입원비와 치료비, 간병비는 물론이고 본인과 가족의 정신적 피해보상, 입원 및 치료 기간 중의 노동력 피해보상, 거기다 군대책위와 마을대책위 경비까지 포함되었다. 이 경비는 주로 병문안을 오가는 데 드는 교통비로 쓰였다고 한다.
말만 들어도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전 4월 26일 총선에서 야당인 평민당이 호남지역에서 37개 선거구를 석권한 덕을 본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학생·노동운동권에 대한 탄압은 무자비했던 반면, 농민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격적이지 않았던 것이 당시의 정서였다. 적어도 아버지뻘, 할아버지뻘 되는 시위대를 향해 죽어라고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는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순창 내에서는 최루탄이 터진 일도 없었고, 농성자들을 위협하거나 강제로 끌어내는 일도 없었다. 경찰들은 그저 건물 내에서 대기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윤리의식이 뿌리 뽑힌 요즘의 시위진압과 비교하면 그때는 그래도 참 푸근했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사명

 

이후에도 농지개량조합은 존속되다가 2000년에 농지개량조합연합회, 농어촌진흥공사와 함께 농업기반공사로 통폐합되었고, 그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요구로 수세가 폐지되었다. 농업기반공사는 2005년에 농촌공사로 개칭되었다.
비록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수세폐지운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농민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단일한 과제에 대해 최대 규모의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지역을 넘어서는 연대투쟁을 벌였다. 농민들은 순창군농민회에서 만든 소식지에 적힌 글귀처럼 “뭉치면 주인이고 흩어지면 머슴이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이러한 자각의 물결이 이후 전농이라는 대중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아귀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속속 편입되는 이즘, 한미무역협정(FTA)를 통해 현 정부로부터 가장 먼저 폐기처분될 위기에 놓인 농업의 앞날은 어둡기 그지없다. 이에 대한 이선형 씨의 생각을 전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갈음하고자 한다.
 


 

“농촌사회는 농촌과 농업, 농민 이 세 가지의 종합체입니다. 그런데 정부는 농업과 농민은 배제하고 도시문제의 심각성을 해소하려는 완충지대로서 가시공간인 농촌만 남겨두려고 합니다. ‘농촌공사’라는 이름이 의도하는 것도 같은 이유지요. 우리에게는 여기에 저항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조국을 지키지 못해 부끄러워했던 독립투사들과 마찬가지로 후세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농촌과 농업과 농민 모두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류외향 1973년 경남 합천 출생. 1966년 대구 매일신문으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사진 황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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